목련 열매를 가진 오후
김선우
목련꽃을 사랑하는 이에게
목련 열매를 마저 보여주어라
꿈지럭거리며 허물 벗는 무섬증 같은
여러 개의 심방을 가진 심장
분열하는 붉은 열매를 찢고
꽃이 사뿐 날아오를 때
꽃을 기억하는 사람의 꽃이 아니라
꽃이 기억하는 열매까지 보여주어라
꽃으로 보여주어라
-격월간『유심』(2009, 1-2월호)
-----------------------------
맞짱 뜨는 오후
권애숙
뭐라카노, 니가 먼저 그카이 내가 그카지
뭐시라꼬? 이기 고마…
앞집 여자와 옆집 여자 또 한판 붙는 모양이다
야간 근무를 하고 자던 건넛집 남자가
잠옷바람으로 내다본다
핥고 뒹굴던 똥개 두 마리도 꼬리 내리고
비칠비칠 옆걸음친다
불어라, 함 붙어봐라
속으로 은근히 부추기며 나는 블라인더를 올려
소란스런 현장 기웃거린다
쓰레기봉투 한 장을 위해
저렇게 목숨 걸고 한판 붙는 여자들
누가 저들에게 사소한 것으로 핏대를 올린다 할 것인가
지문마저 사라진 뭉툭한 삿대질 사이
오후의 햇살이 챙! 갈라진다
-시집『맞장 뜨는 오후』(문학의 전당. 2009)
---------------------------------
재수 없는 날의 오후
-게놈지도 5
양해열
14시, 게놈지도를 훑어본 보험설계사는 청약서에 ×표를 쳤다 붉은 십
자가가 기울자 우울증이 심해졌다 탈모가 일어나고 비곗살이 많아지고
시력이 나빠질 게 뻔하단다 우성인자를 복제하지 않고 자연 임신을 선택
한 엄마가 오늘따라 더 밉다 왜 유전학자를 안 믿고 하느님을 믿었나요?
또 취직에 실패했다 인사부장은 근로계약서를 화면에서 지웠다 진짜
이력서는 내 핏속에 있었다 1년 안에 조증에 걸릴 확률 50%, 상사 폭
행 60% 집중력 상실 70%...... 양극성장애를 관장하는 내 11번 염색체,
빌빌 꼬인 불멸의 코일 탓이다 15시 정각의 비행기가 3초씩이나 연착
했을 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
16시, 게놈지도를 위조하려던 극악무도한 놈과 유전자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오늘도 불신검문에 걸렸다 세상에나, 제 몸의 설계도를 바꾸
려는 놈이 또 있다니! 귓불이 따가운 건 둘째 치고 요즘은 피 한 방
울도 아깝다 유진 머로우 피도 이제 몇 팩 남지 않았다
맞선 본 17시는 차라리 치욕이었다 공부 못하는 유전자를 가졌다며 비
너스처럼 못생긴 여자에게 퇴짜 맞았다 요즘도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가
있다니! 텅 빈 동물원에나 보낼 인간, 아냐 아직까지 그 여자, 사타구니
에 캐스터네츠를 붙이고 있는 지도 몰라
-계간『애지』(2009년 가을호)
-------------------------------
오후
고영민
암자에는 아무도 없다
털이 북실한 강아지 세 마리가
낯가림 없이 꼬리를 치며 달려나와 배를 뒤집었다
개밥그릇엔 며칠치 사료가 부어져 있다
마당 한 귀퉁이엔 저 혼자 목단이 피어 환하고,
문마다 꼭 닫혀 있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는
계곡물을 받아쓰는 샘에서
물을 떠 입을 헹구고 손을 씻고 터벅터벅
다시 걸어내려왔다
풍경소리가 들렸다
오는 길에 노인 두 명이 암벽에 붙어 있는 뭔가를 따기에
물어보니,
석이(石耳)라고 했다
돌의 귀
늦은 오후인데도 날이 뜨겁다
누가 들을 것 같아
아, 하고 소리를 내보았다
-시집『공손한 손』(창비. 2009)
------------------------------------
뒤뜰의 오후
김점용
묵은 차 마시며
내다본 뒤뜰
소국 지고
모과 잎 다 졌는데
마알갛게
햇살 귀신이 내려온 듯
오래전 입술 위에
옛 발자국 위에
-시집『메롱메롱 은주』(문학과지성사, 2010)
----------------------
가을 오후
도종환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
서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
웃는 낯빛이 쓸쓸하여
풍경은 안단테 안단테로 울고
나는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늘해진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
내 품에 머리를 기대오는 가을의 어깨 위에
나는 들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는 걸
나도 알고 가을도 알고 있었다
늦은 가을 오후
-시집『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
---------------------------------
식물성 오후
정용화
버스를 타려고 언덕을 내려갈 때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힘겹게 서 있는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꽃도 다 시들어버린 목련나무 옆에서
수직으로 내리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오래 걸어왔던 걸음이 제 그림자에 갇혀있다
분주함도 사라지고 야성적 본능이
식물성으로 순해지는 시간
미련이 없으면 저항도 없다
조금씩 땅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그 노인
물끄러미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저 무심함이 품고 있는 견고한 내력들
걷지 않는 발은 뿌리가 된다
나무가 되어가는 노인과
죽어야 비로소 걷는 나무가
한 몸이 되어있는
나 한때 저 목련나무의 꽃으로 핀 적이 있다
-반년간『시산맥』(2010, 상반기)
-------------------------------
내게 남겨진 오후
이미란
멀지만 가까운 길 위에 서 있다. 나는 자꾸만 궁금해져서 미리 당도한 마음을 여러 갈레로
뒤척인다. 내게 남겨진 시간은 뛰는 걸음처럼 멀리 가는 길 위에 서 있다. 나는 자꾸만 아프고
가슴과 무릎을 타고 오르는 불안한 예감의 전류 때문이 밤이 두렵고 잠이 두렵다. 너무 늦은
반성의 거친 호흡은 서두를 것도 미련도 없는 신발의 그림자를 재촉한다. 미루나무 꼭대기엔
뭉게구름이 걸려있고 산 너머 아득한 그리움을 따라가던 어린 날의 풍경은 어디만큼 와있나.
뒤돌아보면 모두 한숨이고 눈물뿐인 생이었다. 후회하지 않으려 등을 돌리던 가려진 손바닥
안의 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이 길을 통과해야 한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성긴 빗물과 건널목
의 시원한 바람처럼 불어오는 넉넉한 등걸의 오후가 남아있는 내 생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눈앞을 휘돌아 흐르는 저 강물의 끝이 수상하다.
-계간『디시올 문학』(2012, 가을호)
----------------------------------
늙은 오후
김위숙
칠 벗겨진 외벽은
광대뼈 드러나도록 문드러지는 우주다
외벽 앞 빨랫줄에
호박오가리 말라가고
책꽂이 한 구석 빛바랜 오후가
길게 늘어진 가을 위로
바쁘게 매달린다
점박이날개나비
묵언처럼 말아쥐고
저 선을 넘어왔을 늘어진 빛이여
말라죽은 딱정벌레
입에 착착 감기는 감칠맛에 홀린 걸까
늘어졌던 몸통
칭칭 걸어 말린
저 문들어지도록 깃들었던
간절함도 우주의 그늘처럼 깊어진다
―『대구문학』(2012. 7/8)
-----------------------------
주말 오후
안용태
종종걸음 오후 통유리창 풍경 너머
떡볶이집 차림표 깃발이
만장처럼 나부끼고
정처 없는 눈발
자동차 바퀴 따라 흩날리는 주말 오후
난로 위 들끓는 주전자 뚜껑이 딱히,
갈 곳도 없는 사내 맘 들썩이고 있다
-시집 『몽돌』(학이사, 2012)
-------------------------
늦여름 오후에
홍신선
오랜만에 장마전선 물러나고 작달비들 멎고
늦여름 말매미 몇이 막 제재소 전기톱날로
둥근 오후 몇 토막을 켜나간다.
마침 몸피 큰 회화나무들 선들바람편에나 실려보낼 것인지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
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집 밖 남새밭에 나와
나는 보았다. 방동사니풀과 전에 보지 못한 유출된 토사 사이로
새롭게 터져 흐르는 건수(乾水) 투명한 도랑줄기를
지난 한 세기의 담론들과 이데올로기 잔재들을 폭파하듯 쓸어묻고는
천지팔황 망망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집중된 힘으로 넘쳐흐르는
마음 위 깊이 팬 생각 한줄기 같은
물길이여
그렇게 반생에 살고도 앎의 높낮은 뭇 담장들 뜯어치우고는
범람해 흐르는 개굴청 하나를 새로 마련치 못했으니
다만 느리게 팔월을 흐르는 나여
꼴깍꼴깍 먹은 물 토악질한
닭의장풀꽃이
냄새 기막힌 비누칠로 옥빛 알몸 내놓고 목물 끼얹는
이 풍경의 먼 뒤꼍에는
두께 얇은 통판들로 초저녁 그늘 툭툭 쌓이는 소리.
(『자화상을 위하여』.세계사. 2002 :『홍시선 시전집』.산맥출판사. 2004)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박정대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사랑은 멀리서 젖고
나무들은 선 채로 외투를 털고 있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고 생각하는 건
그대의 휘파람 소리가
환청처럼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구름의 휘파람 소리,
러시아 혁명사처럼 흐르던 한 떼의 구름이
허공에 인생 사용법을 쓰고 있다
계명을 몰라도
나는 휘파람을 불며
멀리에서 젖고 있는 그대에게
허밍의 세계사를 전해본다
그대의 머리카락이 떠받치고 있던 허공에서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견고함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두툼한 외투
외투 끝으로
손을 내밀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눈송이를 받으면
세상의 한 끝이 내 손 위로 내려와
차고도 부드럽게 녹는다
나는 손금을 따라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바라본다, 누운
물
사랑은 멀리에서 이렇게 나에게로 당도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다,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월간『현대시』(2010년 3월호)
---------------------------------------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홍순영
젖기 위해 태어나는 운명도 있다
누군가는 탈출하기 위해 자신의 뼈 하나쯤 예사로 부러뜨리며, 골목에 쓰러져있기도 하지만
뾰족이 날만 세우고 좀체 펴지지 않는 고집도 있다
그런 것은 십중팔구 뼈마디에서 붉은 진물을 흘리기 마련,
정지된 시간 위로 녹슨 꽃 핀다
사람이나 동물에게만 뼈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거
기민한 종족들은 물과 돌, 쇠에도 뼈가 있음을 일찍이 알아챘다
어긋난 뼈를 문 우산, 길 위에 젖은 채 쓰러져있다
그도 내 집 담장 밑에 저처럼 누워있었다
젖는다는 것은 필연처럼 물을 부르고
눈물에, 빗물에, 국 한 그릇에 젖는 허기진 몸들
젖은 몸으로 태어난 당신과 나
살면서 몸을 말릴 수 있는 날은 의외로 적다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출발을 재촉하는 채찍 소리 도로 위에 쏟아지면
날고 싶어 퍼덕거리는 새들 몸짓 요란하다
기낭 속으로 반달 같은 슬픔 우르르 몰려들면
둥글게 휘어지는 살들 팽팽히 끌어당기는 뼈
긴장이 도사린 새의 발목은 차갑고 매끄럽다
새의 발목을 끌어당기다 놓친 사내가 도로에 뛰어든다
『제13회 수주문학상 대상』(2011)
-------------------------------------
오후를 견디는 법
오명선
몇 겹으로 접혀
낡은 소파에 누웠다
며칠 현관문이 '외출 중'을 붙잡고 서있는 동안
나는 세상에서 방전되었다
익숙한 풍경이 커튼처럼 걸리고
빛이 차단된 몸에서
수많은 눈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다
화창한 오후는 그림자를 둘둘 담요처럼 감는다
뱉지 못한 문장 뒤틀린 서술들
나는 오래전 어둠에 길들여진 어긋난 문법, 나를 필사하는
오후의 손가락이 한 뼘 길어졌다 흐린 지문으로 나를 한 술 떠먹는다
적막의 두께로
낡은 하루가 완성되었다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 본다
-계간『詩로 여는 세상』(2011, 여름호)
'<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 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진달래 산천 / 신동엽 - 진달래 山川 / 서지월 (0) | 2013.02.10 |
|---|---|
| 유명한 시인, 시 모음 (222인) (0) | 2013.02.09 |
| 틈 시 제목의 모음 - 김기택/주용일/이태관/김영철/이화은/이상국/임영조/박성현/정끝별/이진명 (0) | 2013.02.06 |
| 해감 / 고영민 - 맨발 / 문태준 (0) | 2013.02.06 |
| 풀 시 모음 - 풀 / 남국벽 외... (0) | 2013.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