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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대의 등산칼럼] 등산의 역사를 바꾼 장비, 아이젠
월간마운틴 글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입력 2013.02.07 13:05 수정 2013.02.07 13:23
올 겨울은 시베리아급 한파의 영향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산길은 빙판길이 됐고 정형외과는 낙상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등산장비점들은 아이젠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의 수요가 늘어나 재고가 바닥이 났다고 한다. 오늘날 '아이젠'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이젠(Eisen)은 독일어 슈타이크 아이젠(Steig Eisen)의 줄임말이며, 프랑스와 영어권에서는 크램폰(Crampons)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류사회에 아이젠이 출현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그 기원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등산용구 가운데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장비가 바로 아이젠이다. 무려 4세기 전에 발명된 유서 깊은 이 장비는 카프카스 지방의 초기 원주민이 눈과 얼음 위를 걸을 때 가죽 밑창에 쇠 징을 박은 신발을 신고 다닌 것과 함께 유럽 켈트족의 광부들도 이미 수세기 전에 신발 밑창에 징을 박아서 신고 다닌 것에서 기원한다. 또 1574년경부터 알프스의 양치기 목동들도 3개의 날카로운 징을 박은 말편자 모양의 프레임으로 된 3발톱 아이젠을 신고 다닌 것으로 나와 있다. 초기 아이젠은 원시적인 형태로 3발톱짜리의 유치한 용구에 불과했다. 주로 목초지와 설사면, 빙하 등 완경사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걷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가벼운 보행용으로만 사용되었다.
근대 등산의 창시자 드 소쉬르가 1787년 두 번째로 몽블랑을 오를 때 이런 종류의 아이젠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알프스 황금시대를 마감한 1865년 마터호른 등정 때 에드워드 윔퍼는 친구인 케네디로부터 4발톱짜리 아이젠을 받았지만 발판을 만들지 않는 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용구이므로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젠은 피켈보다 3세기나 앞선 16세기에 출현했으나 알프스 개척기에 피켈의 우수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 실용가치는 3세기가 흐른 뒤에야 인정받게 된다. 오늘날 아이젠이야말로 피켈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빙설등반용구지만 초창기에는 피켈에 비해 단순 조역에 불과한 용구였다. 현대 등반에서는 어느 용구가 주역이고, 조역인지 구별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손(피켈)과 발(아이젠)을 함께 쓰는 등반기술이 중요관건이므로 두 용구 모두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초기 개척자들은 얼음 위에 발판을 깎는 일에만 열중했을 뿐 얼음 위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아이젠을 개발하는데 무관심했다. 등산 초기부터 아이젠의 진가가 정당하게 평가되었더라면 아마도 등산은 한 세대를 앞당겨 발전했을 것이다.
프랑스 등반기술의 바탕이 된 에켄슈타인 테크닉
1908년, 현대 아이젠의 원조가 된 혁신적인 발명품이 등장하여 눈과 얼음의 등반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아이젠이 현대적인 형태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영국의 오스카 에켄슈타인(Oscar Eckenstein)이다.
그는 발톱 10개가 달린 아이젠을 발명한다. 이 아이젠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장비로 미등의 벽에 새로운 길을 열며 한 시대를 리드해 나갔지만,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보수적인 여러 등반가들은 아이젠이 등산의 순수성을 해치는 발명품이라고 적의(敵意)를 보였다. '아이젠과 같은 인공용구를 써서 정상에 도전하는 일은 알피니즘의 정신에 위배되며, 이런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등산'이란 이유를 내세워 사용을 기피한 것이다. 오늘날 보편화된 이 장비가 한때는 이단시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이젠 무용론자들은 이 용구를 신고 산에 오르는 것은 '목마를 타는 것 같은 장난질'이라고 냉소했으며 '도깨비 발명품'이라고 혹평을 했다. 또 인간의 능력한계를 극복하는데 '해악을 끼치는 쇠붙이'라고 적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에켄슈타인 아이젠의 기능은 뛰어났다. 이 아이젠의 위력이 입증된 것은 1931년 마터호른 북벽 초등시 슈미트 형제에 의해서다. 두 형제는 에켄슈타인 아이젠을 신고 북벽 초등정에 성공하여 아이젠의 실용가치를 널리 알린다.
10발 아이젠을 고안한 에켄슈타인은 아이젠의 발명뿐만 아니라 10발 아이젠과 짧은 피켈을 함께 조화시킨 '에켄슈타인 아이젠기술'을 창안한다. 이 기술은 오늘날 프랑스기술로 대표되는, 발톱전체를 고르게 박는 삐에 다 쁠라(Pied a' Plat)라고 부르는 '평평하게 딛기(Flat Footing)'다. 이 기술을 사람들은 정통 프랑스식 기술로 오인하고 있으나 처음 창안한 사람은 영국의 에켄슈타인이다. 삐에 다 쁠라 기술은 에켄슈타인이 처음 개발했지만 서부알프스의 굳은 설벽에 잘 적응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이 더욱 정교하고 우아한 형태로 발전시켜 프랑스를 대표하는 설빙기술로 완성시킨다.
고안자마저 혐오했던 아이젠
10발 아이젠을 최초로 고안한 에켄슈타인조차도 처음에는 아이젠 사용을 경멸했던 사람이다. 1886년 그가 호베르그호른(Hohberghorn・4219m)의 빙벽을 등반하던 중 발판 깎기(Step Cutting)에 지쳐 등반을 포기하면서 아이젠의 효용가치를 새삼 깨닫게 되자 서둘러 신형 아이젠을 고안, 현대적인 형태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한다.
알프스 황금시대는 등산가이드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시대다. 손님들은 가이드가 얼음 위에 깎아 만든 발판을 딛고 산에 오르면 되었다. 이래서 당시 가이드들은 발판 깎기의 달인이 되어야했고, 수백 개의 발판을 깎을 수 있는 야수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어야 훌륭한 가이드로 평가 받았다.
아이젠의 원조가 된 10발 아이젠은 이후 눈과 얼음이 혼재한 루트에서 새로운 길을 여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한다. 에켄슈타인 아이젠의 출현은 스텝을 일일이 깎아야하는 엄청난 중노동으로부터 등산가들을 구해냈고, 많은 미등의 설벽과 빙벽에 새로운 루트를 열어주었다. 또한 종래의 쇠 징(Triconni) 박힌 등산화를 퇴출시키는 데 한몫 했으며, 비브람(Vibram) 고무창을 출현시키는 계기를 제공한다.
발톱 두 개가 등산의 역사를 바꿨다
1932년에는 아이젠의 두 번째 혁명인 12발톱 자리 그리벨 아이젠이 로랑 그리벨(Laurent Grivel)에 의해 발명된다. 단단하고 경사가 심한 눈과 얼음의 수직벽을 오르기 좋도록 열 발 아이젠의 앞부분에 발톱 두 개를 추가하여 열두 발짜리 아이젠을 특별히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현대등반의 필수품이 된 오늘날의 아이젠으로 진화한다.
앞 발톱 두 개를 추가한 12발 아이젠의 출현으로 10발 아이젠은 그 효용가치가 떨어진다. 앞 발톱 2개는 스텝 커팅의 필요성을 줄여주고 경사진 눈과 얼음에서 프런트 포인팅(Front Pointing)을 가능케 해주었다. 12발톱 아이젠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반가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수직의 빙설벽에서 등반기량과 속도를 한층 향상시켜 급속하게 보급된다. 이 아이젠을 신고 에귀 베르트(Auguille Verte・4122m) 윔퍼 쿨르와르에서 시험등반을 해본 결과 앞선 팀을 즉시 따라잡았고 이후 앞발톱을 이용하는 프런트 포인팅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다.
새로운 용구의 출현과 등반기술의 향상은 불가분의 관계다. 새로운 용구가 출현하면 과제로 남아있던 난제가 해결되었으며, 등반불가능 판정을 받았던 곳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12발 아이젠의 출현은 등산용구 발전사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등반은 프런트 포인팅 기술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아이젠 발전사에서 12발 아이젠이 위력을 보인 일화는 많다.
1938년 7월 아이거 북벽에서 벌어진 독일과 오스트리아 두 팀 사이의 속도대결은 독일 팀이 사용한 12발 아이젠의 위력 앞에 무너지고 만다. 오스트리아 팀보다 하루 늦게 출발한 독일 팀의 헤크마이어는 12발 아이젠을 신고 오스트리아의 하인히리 하러 팀을 추월하여 하루를 앞서나가 상대팀을 놀라게 한다. 결국 두 팀은 한 팀이 되어 초등정을 이룩한다.
당시 헤크마이어의 등반속도를 목격한 하인리 하러는 그가 펴낸 아이거북벽 등반기 < 하얀 거미(Die Weisse Spinne) > 에서 그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 팀의 뒤에서 따라 오르던 헤크마이어는 처음 보는 12발 아이젠을 신고 체조선수처럼 얼음 위에서 곡예등반을 연출했다. 이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그의 동작은 명인의 예술 같기도 하였으며, 얼음 위에서 연출하는 발레와 같았다. 앞발톱 두 개로 얼음에 구멍을 내며 야금야금 속도를 내며 올라오고 있어 이용구의 장점에 모두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정교한 기능으로 진화하는 아이젠
지금 보급되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젠은 기계공업의 발달에 힘입어 그 기능이 정교해지고 있다. 등반목적에 따라 부품(발톱)을 교환해서 쓸 수 있는 모듈러 시스템(modular system)으로 발전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 정교해진 것이다. 프런트 포인팅 기술의 전성시대를 맞은 지금의 아이젠은 재질, 포인트의 각도와 형태, 손쉬운 탈착 방식 등 기능의 집합체라 불릴 만치 진화했다. 현대적 감각의 고정형 아이젠 개량에 공헌한 사람은 현대판 에켄 슈타인이라 불리는 장비제작의 귀재 이본 취나드다. 그가 최초로 고안한, 몸체가 하나로 고정된 리지드(Rigid) 아이젠은 빙벽등반에서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으며 픽이 굽은 피켈과 함께 수직벽 등반에 적합한 더블 액스 테크닉(double axe technic) 기술을 탄생시킨다. 프랑스인들은 취나드가 개발한 이 혁신적인 기술을 삐올레 트락시옹(Piolet traction)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의 모든 아이젠은 바인딩 방식의 탈착시스템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전에 끈으로 묶던 스트랩 방식 보다 탈착이 쉽고, 등반 도중 벗겨지지 않으며, 킥킹을 할 때 떨림이 없어 힘이 분산되지 않고 감각이 잘 전달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 또한 현대 아이젠이 지니고 있는 강점이다. 1980년대 초에는 제프로우가 개발한 20발톱짜리 일체형의 푸트팡(Footfang) 아이젠이 출현하여 빙벽등반에서 관통력과 접착력을 높이기도 했다.
근대등산이 시작된 이래 아이젠은 가장 중요한 용구로 평가되어왔다. 등산이 두 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 아이젠은 세계 도처의 미답봉에 인류의 발자취를 남기는 데 충실한 파트너 역할을 함께했다.ⓜ
그렇다면 인류사회에 아이젠이 출현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그 기원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등산용구 가운데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장비가 바로 아이젠이다. 무려 4세기 전에 발명된 유서 깊은 이 장비는 카프카스 지방의 초기 원주민이 눈과 얼음 위를 걸을 때 가죽 밑창에 쇠 징을 박은 신발을 신고 다닌 것과 함께 유럽 켈트족의 광부들도 이미 수세기 전에 신발 밑창에 징을 박아서 신고 다닌 것에서 기원한다. 또 1574년경부터 알프스의 양치기 목동들도 3개의 날카로운 징을 박은 말편자 모양의 프레임으로 된 3발톱 아이젠을 신고 다닌 것으로 나와 있다. 초기 아이젠은 원시적인 형태로 3발톱짜리의 유치한 용구에 불과했다. 주로 목초지와 설사면, 빙하 등 완경사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걷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가벼운 보행용으로만 사용되었다.
↑ 스위스 취리히대학 교수였던 요지아스 짐러가 1574년 출간한 < 알프스에 관한 주석서 > 에 나와 있는 당시 아이젠의 스케치
근대 등산의 창시자 드 소쉬르가 1787년 두 번째로 몽블랑을 오를 때 이런 종류의 아이젠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알프스 황금시대를 마감한 1865년 마터호른 등정 때 에드워드 윔퍼는 친구인 케네디로부터 4발톱짜리 아이젠을 받았지만 발판을 만들지 않는 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용구이므로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이젠은 피켈보다 3세기나 앞선 16세기에 출현했으나 알프스 개척기에 피켈의 우수성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 실용가치는 3세기가 흐른 뒤에야 인정받게 된다. 오늘날 아이젠이야말로 피켈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빙설등반용구지만 초창기에는 피켈에 비해 단순 조역에 불과한 용구였다. 현대 등반에서는 어느 용구가 주역이고, 조역인지 구별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손(피켈)과 발(아이젠)을 함께 쓰는 등반기술이 중요관건이므로 두 용구 모두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초기 개척자들은 얼음 위에 발판을 깎는 일에만 열중했을 뿐 얼음 위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아이젠을 개발하는데 무관심했다. 등산 초기부터 아이젠의 진가가 정당하게 평가되었더라면 아마도 등산은 한 세대를 앞당겨 발전했을 것이다.
↑ 1908년 오스카 에켄슈타인이 고안한 10발 아이젠의 설계도. 1930년대 스위스산악회 연감 45호 부록으로 인쇄해 배포한 것이다.
프랑스 등반기술의 바탕이 된 에켄슈타인 테크닉
1908년, 현대 아이젠의 원조가 된 혁신적인 발명품이 등장하여 눈과 얼음의 등반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아이젠이 현대적인 형태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영국의 오스카 에켄슈타인(Oscar Eckenstein)이다.
그는 발톱 10개가 달린 아이젠을 발명한다. 이 아이젠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장비로 미등의 벽에 새로운 길을 열며 한 시대를 리드해 나갔지만,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보수적인 여러 등반가들은 아이젠이 등산의 순수성을 해치는 발명품이라고 적의(敵意)를 보였다. '아이젠과 같은 인공용구를 써서 정상에 도전하는 일은 알피니즘의 정신에 위배되며, 이런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등산'이란 이유를 내세워 사용을 기피한 것이다. 오늘날 보편화된 이 장비가 한때는 이단시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아이젠 무용론자들은 이 용구를 신고 산에 오르는 것은 '목마를 타는 것 같은 장난질'이라고 냉소했으며 '도깨비 발명품'이라고 혹평을 했다. 또 인간의 능력한계를 극복하는데 '해악을 끼치는 쇠붙이'라고 적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에켄슈타인 아이젠의 기능은 뛰어났다. 이 아이젠의 위력이 입증된 것은 1931년 마터호른 북벽 초등시 슈미트 형제에 의해서다. 두 형제는 에켄슈타인 아이젠을 신고 북벽 초등정에 성공하여 아이젠의 실용가치를 널리 알린다.
10발 아이젠을 고안한 에켄슈타인은 아이젠의 발명뿐만 아니라 10발 아이젠과 짧은 피켈을 함께 조화시킨 '에켄슈타인 아이젠기술'을 창안한다. 이 기술은 오늘날 프랑스기술로 대표되는, 발톱전체를 고르게 박는 삐에 다 쁠라(Pied a' Plat)라고 부르는 '평평하게 딛기(Flat Footing)'다. 이 기술을 사람들은 정통 프랑스식 기술로 오인하고 있으나 처음 창안한 사람은 영국의 에켄슈타인이다. 삐에 다 쁠라 기술은 에켄슈타인이 처음 개발했지만 서부알프스의 굳은 설벽에 잘 적응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사람들이 더욱 정교하고 우아한 형태로 발전시켜 프랑스를 대표하는 설빙기술로 완성시킨다.
고안자마저 혐오했던 아이젠
10발 아이젠을 최초로 고안한 에켄슈타인조차도 처음에는 아이젠 사용을 경멸했던 사람이다. 1886년 그가 호베르그호른(Hohberghorn・4219m)의 빙벽을 등반하던 중 발판 깎기(Step Cutting)에 지쳐 등반을 포기하면서 아이젠의 효용가치를 새삼 깨닫게 되자 서둘러 신형 아이젠을 고안, 현대적인 형태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한다.
알프스 황금시대는 등산가이드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시대다. 손님들은 가이드가 얼음 위에 깎아 만든 발판을 딛고 산에 오르면 되었다. 이래서 당시 가이드들은 발판 깎기의 달인이 되어야했고, 수백 개의 발판을 깎을 수 있는 야수와 같은 힘을 지니고 있어야 훌륭한 가이드로 평가 받았다.
아이젠의 원조가 된 10발 아이젠은 이후 눈과 얼음이 혼재한 루트에서 새로운 길을 여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한다. 에켄슈타인 아이젠의 출현은 스텝을 일일이 깎아야하는 엄청난 중노동으로부터 등산가들을 구해냈고, 많은 미등의 설벽과 빙벽에 새로운 루트를 열어주었다. 또한 종래의 쇠 징(Triconni) 박힌 등산화를 퇴출시키는 데 한몫 했으며, 비브람(Vibram) 고무창을 출현시키는 계기를 제공한다.
발톱 두 개가 등산의 역사를 바꿨다
1932년에는 아이젠의 두 번째 혁명인 12발톱 자리 그리벨 아이젠이 로랑 그리벨(Laurent Grivel)에 의해 발명된다. 단단하고 경사가 심한 눈과 얼음의 수직벽을 오르기 좋도록 열 발 아이젠의 앞부분에 발톱 두 개를 추가하여 열두 발짜리 아이젠을 특별히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현대등반의 필수품이 된 오늘날의 아이젠으로 진화한다.
앞 발톱 두 개를 추가한 12발 아이젠의 출현으로 10발 아이젠은 그 효용가치가 떨어진다. 앞 발톱 2개는 스텝 커팅의 필요성을 줄여주고 경사진 눈과 얼음에서 프런트 포인팅(Front Pointing)을 가능케 해주었다. 12발톱 아이젠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반가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수직의 빙설벽에서 등반기량과 속도를 한층 향상시켜 급속하게 보급된다. 이 아이젠을 신고 에귀 베르트(Auguille Verte・4122m) 윔퍼 쿨르와르에서 시험등반을 해본 결과 앞선 팀을 즉시 따라잡았고 이후 앞발톱을 이용하는 프런트 포인팅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한다.
새로운 용구의 출현과 등반기술의 향상은 불가분의 관계다. 새로운 용구가 출현하면 과제로 남아있던 난제가 해결되었으며, 등반불가능 판정을 받았던 곳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12발 아이젠의 출현은 등산용구 발전사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등반은 프런트 포인팅 기술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아이젠 발전사에서 12발 아이젠이 위력을 보인 일화는 많다.
1938년 7월 아이거 북벽에서 벌어진 독일과 오스트리아 두 팀 사이의 속도대결은 독일 팀이 사용한 12발 아이젠의 위력 앞에 무너지고 만다. 오스트리아 팀보다 하루 늦게 출발한 독일 팀의 헤크마이어는 12발 아이젠을 신고 오스트리아의 하인히리 하러 팀을 추월하여 하루를 앞서나가 상대팀을 놀라게 한다. 결국 두 팀은 한 팀이 되어 초등정을 이룩한다.
당시 헤크마이어의 등반속도를 목격한 하인리 하러는 그가 펴낸 아이거북벽 등반기 < 하얀 거미(Die Weisse Spinne) > 에서 그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 팀의 뒤에서 따라 오르던 헤크마이어는 처음 보는 12발 아이젠을 신고 체조선수처럼 얼음 위에서 곡예등반을 연출했다. 이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그의 동작은 명인의 예술 같기도 하였으며, 얼음 위에서 연출하는 발레와 같았다. 앞발톱 두 개로 얼음에 구멍을 내며 야금야금 속도를 내며 올라오고 있어 이용구의 장점에 모두가 경탄을 금치 못했다."
↑ 1967년 미국의 이본 취나드와 톰 프로스트가 선보인 최초의 리지드형 아이젠. 당시 취나드-사레와라는 브랜드로 출시된 제품이다
정교한 기능으로 진화하는 아이젠
지금 보급되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젠은 기계공업의 발달에 힘입어 그 기능이 정교해지고 있다. 등반목적에 따라 부품(발톱)을 교환해서 쓸 수 있는 모듈러 시스템(modular system)으로 발전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 정교해진 것이다. 프런트 포인팅 기술의 전성시대를 맞은 지금의 아이젠은 재질, 포인트의 각도와 형태, 손쉬운 탈착 방식 등 기능의 집합체라 불릴 만치 진화했다. 현대적 감각의 고정형 아이젠 개량에 공헌한 사람은 현대판 에켄 슈타인이라 불리는 장비제작의 귀재 이본 취나드다. 그가 최초로 고안한, 몸체가 하나로 고정된 리지드(Rigid) 아이젠은 빙벽등반에서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으며 픽이 굽은 피켈과 함께 수직벽 등반에 적합한 더블 액스 테크닉(double axe technic) 기술을 탄생시킨다. 프랑스인들은 취나드가 개발한 이 혁신적인 기술을 삐올레 트락시옹(Piolet traction)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의 모든 아이젠은 바인딩 방식의 탈착시스템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전에 끈으로 묶던 스트랩 방식 보다 탈착이 쉽고, 등반 도중 벗겨지지 않으며, 킥킹을 할 때 떨림이 없어 힘이 분산되지 않고 감각이 잘 전달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 또한 현대 아이젠이 지니고 있는 강점이다. 1980년대 초에는 제프로우가 개발한 20발톱짜리 일체형의 푸트팡(Footfang) 아이젠이 출현하여 빙벽등반에서 관통력과 접착력을 높이기도 했다.
근대등산이 시작된 이래 아이젠은 가장 중요한 용구로 평가되어왔다. 등산이 두 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 아이젠은 세계 도처의 미답봉에 인류의 발자취를 남기는 데 충실한 파트너 역할을 함께했다.ⓜ
↑ 현대등반에서 사용하는 모듈러형 아이젠. 원터치 바인딩 식으로 착용이 가능하며 앞발톱 등 각 부분을 용도에 맞게 변환해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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