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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 박쥐 / 깃발 / 생명의 서(1장) / 일월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1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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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박쥐


유치환

 

 

너는 본래 기는 짐승
무엇이 싫어서
땅과 낮을 피하여
음습한 폐가의 지붕 밑에 숨어
파리한 환상과 괴몽(怪夢)에
몸은 야위고
날개를 길러
저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서
호올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

 

 


(『청마시초』. 청색지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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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닮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청마시초』.청색시사. 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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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서(1장)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여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 행문사.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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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


유치환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에
또한 무슨 회한인들 남길소냐.

 

 


(『청마시초』. 청색지사. 193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