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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막돌리 소묘 1 ~ 185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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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동리 소묘


나태주  

 

 

1

아스라이 청보리 푸른 숨소리 스민 청자의 하늘,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지 마셔요.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지 마셔요.

보리밭 이랑 이랑마다 솟는 종다리

 


2

얼굴 붉힌 비둘기 발목같이 발목같이

하늘로 뽑아 올린 복숭아나무 새순들.

하늘로 팔을 벌린 봄 과원의 말씀들.

그같이 잠든 여자, 고운 눈썹 잠든 여자.

 


3

내버려 두라, 햇볕 드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때가 되면 사과나무에 사과꽃 피고

누이의 앵두나무에 누이의 앵두가 익듯

네 가슴의  포도는 단물이 들 대로 들을 것이다.

 


4

모음으로 짜개지는 옥빛 하늘의 틈서리로

우우우우, 사랑의 내력來歷 보 터져오는 솔바람 소리.

제가 지껄인 소리 제가 들으려고

오오오오, 입을 벌리는 실개천 개울물 소리.

 


5

겨우내 비워둔 나의 수란에

밤새워 조곤조곤 봄비 속살거리고

사운사운 살을 씻는 댓잎의 노래.

비워도 비워도 넘치네. 자꾸 술이 넘치네.

 


6

물안개에 슬리는 차운 산허리

뻐꾸기 울음 소리 감돌아 가고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하여라,

아침마다 골짝 물소리에 씻는 나의 귀.

 


7

감나무 나무 속잎 나고

버드나무 실가지에 연둣빛 칠해지는 거,

아, 물찬 포강배미 햇살이 허물 벗는 거,

보리밭에 바람이 맨살로 드러눕는 거.

 


8

그 계집애, 가물가물 아지랑이 허리를 가진.

눈썹이 포로소롬 풋보리 같은.

그 계집애, 새봄맞이 비를 맞은 마늘촉 같은.

안개 지핀 대숲에 달덩이 같은.

 


9

유채꽃밭 노오란 꽃 핀 것만 봐도 눈물 고였다.

너무나 순정적인 너무나 맹목적인

아, 열여섯 살짜리 달빛의 이슬의

안쓰러운 발목이여. 모가지여. 가슴이여.

 


10

덤으로 사는 목숨 그림자로 앉아서

반야심경을 펴 든 날 맑게 눈튼 날

수풀 속을 헤쳐온 바람이 책장을 넘겨 주데.

꾀꼬리 울음 소리가 대신해서 경을 읽데

 


11

산 너머 푸른 산 잇대어서 출렁여 오고

산에는 푸른 나무며 풀꽃들 어우러져 피어 있기에

내 마음 나래 달고 하늘 위에 흰구름 되어 뜨다.

푸른 강심江心에 발을 묻고 울고 싶은 흰구름 되어 뜨다.

 


12

감나무 가지 끝에 초록 별님 매달러

개나리 울타리 가에 노랑 등불 내걸러

사뿐사뿐 까치발로 몰래 왔다 몰래 간다,

봄비는 산짐승처럼. 밤고양이처럼

 


13

민물고기도 약이 차면 맛이 있었다.

버들붕어 비단 지느러미에 풀꽃 무늬 자세 보면

연한 쑥물 빛 물이 들어 있었다.

보리는 풋보리 가는 모가지 바람에 가슬가슬.

 


14

비가 오면 산의 눈썹도 파르라니 젖어서

비가 오면 산의 가슴도 들먹숨을 쉬어서

파아란 새싹은 돋는다, 그대 눈물자죽.

진보랏빛 제비꽃은 무더기로 피어난다, 그대 발자죽.

 

15

탱자꽃 탱자꽃 하얀 탱자꽃

그대 웃는 입매무새 눈매무새 들어 있는 곷.

웃을까 말까 웃을까 말까 전생에

날 사랑하옵신 그 사람 웃는 눈매 들어 있는 꽃

 


16

놀부 마누라 흥부 뺨 때리던 밥주걱

한 알의 밥알이라도 더 묻기를 바라던

빈자소인貧者小人 흥부의 밥주걱

밥도장 찍네, 첫돌 맞이 우리 아기 두 뺨 위에.

 


17

보리밭에 바람이 실리면 보리밭은 파도,

소금 냄새는 없어도 보리밭은 저 혼자 바다 파도,

보리밭 사잇길로 춤추며 달려오는 여자, 복숭아빛 무르팍.

아?????? 구름의 면사포는 뉘에게 주나!

 


18

베갯모에 수놓인 두 마리의 두루미같이.

댓돌 위에 벗어논 두 켤레의 비단신같이.

사랑이여, 길고 짧은 두 매듭의 옷고름같이.

수줍음이여, 이슬길 풀섶에 숨어 피는 풀꽃과 같이.

 


19

문둥이 울음 울 때 진달래 피고

파밭에 이내 낄 때 뱅어회를 먹었다.

지집 죽구 자식 죽구 오두막집에

혼자 남아 울고 있던 꾹꾸기 영감.

 


20

소쩍새 <소쩍다 소쩍다> 울면 풍년이 들고

소쩍새 <소탱 소탱>하고 울면 흉년이 든다고

자장가 삼아 나를 안고 말해 주시던 외할머니

다음 세상 소쩍새 되어 야삼경 밝히시려나.

 


21

해묵은 슬픔에도 새살이 돋고

자르르 외로움에도 윤기가 도는 봄날에

깊은 산 속 아그배꽃 숨어서 핀다.

긴긴 날을 아그배꽃 발 묶여 운다.

 


22

골담초나무 덤불 아래 깨어진 상사발 무덤.

시나대나무 울타리 뽀로수나무 울타리.

풀섶에 이름 잊은 계집애들 혼백인 양

오오, 진보랏빛 보리밥풀꽃. 배암딸기꽃.

 


23

뻐꾸기 한 울음에 더욱 푸르러지는 산,

뻐꾸기 또 한 울음에 또 한번 깊어지는 산,

뻗어가는 댕댕이 멍가넝쿨 와르르

산은 무너져서 품 속으로 핏줄 속으로 달겨든다.

 


24

그전에 그전에 내가 좋아했던 그 계집애

오월이라 맑으신 날 나의 뜨락에

주근깨와 기미까지 핼쓱한 얼굴의 참나리 되어

향기와 때깔만은 옛대로 돌아왔습네.

 


25

보리 피는 아침, 꾀꼬리 우는 아침,

홧술 먹고 깨어서 구역질한다.

구역질 한번에 한 이랑씩 토해 놓는 쓰거운 보리밭

종달새여, 나의 보리밭 위엔 뜨지를 말라.

 


26

능구렁이 허물 벗는 흥부네 집 탱자울

제비가 알 낳을 때 제비콩이 열렸다.

밥주걱만한 콩꼬투리, 애기 팔뚝만한 콩 꼬투리,

새끼제비 날을 때 제비콩이 익었다.

 


27

자운영 꽃밭을 뒹굴고 온 바람

궁뎅이에 꽃물이 들었다, 저녁때.

보리밭에 엎드렸다 오는 바람

젖가슴에 풀물이 들었다, 저녁때.

 


28

못자리판 물낯 위에 조각 하늘

바람도 없는데 왜 흔들릴까?

물꼬 가에 살포 짚고 섰는 해오라기

제비 나래 스쳐설까? 까치 울음 번져설까?

 


29

검정 통고무신 신고 맨발로

학교 갔다 오다가 산길에 섰는 아이

땀에 젖은 발가락 황토 묻은 발바닥

뻐꾸기 울음 소리 이 빠진 물소리가 밟힌다.

 


30

외갓집 추녀 끝 닭똥 구린내여,

수채 구녁 가득히 흘러가는 지렁이 울음 소리여,

달빛도 따라서 울고 있었지

오막살이도 따라서 흘러가고 있었지.

 


31

자수정 목걸이 줄줄이 늘인 등나무 아래

구름은 첫애기 어르는 젊은 어머닌 양 하고

바람은 혼기婚期 맞아 살가운 누인 양 하여

아, 살아 있는 목숨이 이토록 향기로울 줄이야…….

 


32

정이나 답답하면 술 먹고 논두렁 길에 나가

개구리 청중 삼아 노래 부른다.

내가 노래하다 지치면 개구리가 따라서 하고

개구리가 지치면 내가 따라서 하고.

 


33

뻐꾸기 울음은 보랏빛, 꾀꼬리 울음은 황금빛,

기인 날을 툇마루 끝에 생각도 없이.

뻐꾸기 울음은 오동꽃빛, 꾀꼬리 울음은 작약꽃빛,

박우물 가에 고이는 햇살을 바라보면서.

 


34

떡애기 때부터 송아지 울음 소리 들어며

잠들어 봤던 사람에게만 정말 소는 소이고

송아지 고삐를 끌고 풀밭을 신나게

달려 봤던 사람에게만 풀밭은 정말 풀밭이다.

 


35

오동꽃 보랏빛 떠는 꽃초롱 속에는 아침 일찍 달각달각 나막신 신고

물을 긷던 그대 신발 끄는 소리 들어 있구요.

잘람잘람 물동이로 빠져들던 뻐꾸기 소리 들어 있어요.

 

 

 

36

처녀야 너 죽걸랑 반딧불이나 되거라 여름밤.

나 죽걸랑 천하의 박색 호박꽃이나 되마.

들축나무 흙담 마을 맨발 벗은 아이들

꽃초롱 꽃초롱 호박꽃초롱 만들며 놀게.

 


37

기러기래도 소금물에 발가락을 씻은 기러기

배고파서 끼룩끼룩 식솔들 거느리고 이사 가는

벼슬만 새빨갛게 호품스런 수놈 기러기

가문 하늘 달빛도 불그스럼 녹물 들었다.

 


38

안개 속을 걸으니 속눈썹이 젖으오.

마악 선잠 깨어 눈 비비는 대숲은 새들의 저자요.

새소리는 시끄러울수록 고요함을 더하고

댓잎에 바람 소리 작을수록 마음을 꼬이니 거참 별스럽소.

 


39

언덕 위에 보리밭, 휘파람 불다.

언덕 위에 뾰족집, 구름 멈춰 섰다.

구름에 그려보는 네 눈, 코, 귀, 입.

귀가 작아서 앙증스럽던 얼굴

 


40

초벌매기 논배미에 어스름이 깔리면

사위가 왔다고 뜸부기 과수댁 수제비 뜬다.

뜸, 뜸, 수제비는 무슨 수제비 칼뚝데비

매운 보리짚불 연기 눈물 흘리며 수제비 뜬다.

 


41

할머니가 뒷물 밖에 심으신 호박순 자라

수꽃만 내리 피워대 쓸모없다 구박했더니

소나기 호박잎에 말 달리는 소리 듣기 좋구나.

여치란 놈이 거기 살며 베를 짜니 더욱 좋구나.

 


42

땡볕에 사위고 소낙비에 찢겨서

하지쯤이면 잡풀이 되어가는 팬지,

한때 내 가슴 울렁이게 하였던 사람의 이름.

나도 네 옆에서 빛 잃어가는 떨기별 된다.

 


43

그 처녀 어여쁘다 마을 어귀샘터에 나와

허벅지까지 걷어붙이고 빨래를 하네.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찬물 한 바가지

떠서 주오, 내사 매양 목이 타는 사람.

 


44

동무 찾아다니며 팔던 일년치의 살더위

내 더위 네 더위 대답하면 안된다 오늘만은 안된다.

마당 가에 두엄 자리 맨드라미 닭벼슬.

장광 옆에 봉숭아꽃 붉게 타던 누나 얼굴.

 


45

저 처자 모시적삼 안섶 안에 딸기빛 꽃물

저 처자 무명약지 반달손톱에 노을빛  꽃물

이슬이 스밀라 바람이 넘볼라

저 처자 모시적삼 안섶 안에 반달손톱에.

 


46

꾀꼬리는 살아서도 이쁜 시악시

꾀꼬리는 죽어서도 이쁜 시악시

<고추밭에 조도령 머리 곱게 빗은 조도령>

도령을 못 잊어 한나절 길게 운다 그럽디다.

 


47

볼 일 다 마쳤느냐고 서울 사람이 묻는 걸

보리 타작 다 했느냔고 묻는 줄 잘못 알고

그런 건 이미 오래 전에 해치웠노라 대답했다.

나는 귀까지 촌놈인가, 혼자 웃고 말았다.

 


48

수밀도水蜜桃, 그대를 벗기려다 그만

두 손이 함빡 젖었습네다.

열일곱 계집애 속살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입술이 함초롬 가슴이 함초롬.

 


49

비는 눈이 향맑은 가시내.

비는 숨결이 향그런 가시내.

덤불난초 어지럽게 어우러진 밤,

내 팔에 안겨 흐드흐득 잠결에도 울던 사람아.

 


50

누이야, 마른 하늘 번개에도 파르르 입술 떠는.

누이야, 마른 하늘 천둥에도 지징징 귀가 우는.

일년초가 아니랴, 여름 한철 달개비꽃.

우리 또한 샘발치길에 눈물 머금은.

 


51

장마철을 처마밑 제비와 함께

오순도순 새끼 친 제비 내외 옥조록 박조록

흥부네 집 박씨 얘기 놀부네 집 박씨 얘기

연한 호박잎새 뜯어넣은 손수제비로 끼니를 때우고.

 


52

남품이 불어 석류꽃 피니

석류꽃 속에 애기 부처님

발가벗고 노시는 애기 부처님

울음인 듯 울음인 듯 웃고 계시네, 실눈을 뜨고.

 


53

늦비 와 어제 깐 것들까지

쟁배기 피 말려 가지고 나와 영배덕배

모를 심는 천수답天水沓 삿갓배미 진흙가랑.

제비도 거드네, 흙 물어다 집을 짓는 암수 제비.

 


54

외진 숲길을 가다가 도회지 여자

엉뎅이 까뭉개고 급한 일 보는 거 숨어서 본다.

수세식 변소만 타고 있었을 저 허연 살덩이

싸리꽃 내음 스민 물소리에 씻기니 시원하겠다.

 


55

내 실수를 곱게 보아 주던 눈길은 물러가고

내가 대신 남의 실수를 눈감아 보아 줄 나이가 되었으니

내 여린 어깨살을 파고드는 아픈 신록의 무게여.

타박하여 함부로 물릴 수도 없는 목숨의 집이여.

 


56

땅거미 지는 나무 아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일각 일각 달겨들어 글자를 가리우는 어둠의 손길,

한 페이지를 나믹고 책을 덮어야 하는 이 안타까움,

아뿔싸! 우리의 죽음 또한 이 같을 것을.

 


57

선녀님이 옷을 벗고 목물을 한다. 쏴아쏴아

소나기 그친 하늘에 선녀님의 날개옷이 걸렸다.

나무꾼이 옷을 훔친 선녀님만 지상에 남아

알몸으로 울고 있다, 오오 채송화 아씨.

 


58

아들 하나 바라고 내리 딸만 다섯 뽑은 이모님,

두렁콩 심으러 재메꾸리 이어 두 놈, 연장 들려 두 놈에

콩 바가지 들려 갈 놈 없어 막내 딸년 찾으니

저것 없었으면 어쨌을꼬? 농담 끝에 눈물지시다.

 


59

여름날 이른 아침 거닐어 보는 숲길에는

후덥지근한 나무들의 몸비린내 쓰거운 풀비린내.

아, 저들도 지난 밤 잠을 설쳤나 보구나.

힘겨운 오늘 하루 등짐 장수 떠나나 보구나.

 


60

가랑비 가랑비 섶울타리 밑에 가랑비

가랑비 가랑비 모시적삼 위에 가랑비

각시풀 고운 머리올이 젖을동 말동.

누나 둥근 어깨짬이 보일동 말동.

 


61

향내난다 향내난다 선녀님의 옷에서는

하늘 나라 사슴 내음 하늘 나라 복사 내음.

땀내난다 땀내난다 나무꾼의 몸에서는

금강산의 송진 내음 금강산의 짐승 내음.

 


62

베잠뱅이 베잠뱅이 우리 아제 베잠뱅이

오뉴월에 쇠궁뎅이 진흙 묻은 쇠궁뎅이.

베잠뱅이 베잠뱅이 우리 성아 베잠뱅이

육칠월에 말궁뎅이 비에 젖은 말궁뎅이.

 


63

빗방울 후둑이는 너른 파초 잎을 보노라면

나는 너무 욕심 사납게 살았구나.

아무래도 나는 진짜 나의 껍데기가 아닐까?

비에 젖어 오히려 싱싱한 파초 잎새가 부럽다.

 


64

비에 젖은 풀잎을 밟고 오시는 당신의 맨발

빗소리와 빗소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당신의 나신裸身

종아리에 핏빛 여린 생채기 진다.

가슴팍에 예쁜 핏빛 무늬가 선다.

 


65

말복이 내일 모레 황소 잔등을 식히려고

오는 비 소발짝비, 성큼성큼 마당을 질러간다.

오동나무 너른 잎을 흔들고.

옥수수 붉은 수염을 적시고.

 


66

까닭 없이 심통나 아버지한테 매 맞고

훌쩍이며 얼굴 묻던 어머니의 따스한 등이여.

오늘 내 아이놈 난생 처음 종아리 치고

저의 모母 등에 업혀 훌쩍이는 것을 보고.

 


67

연못에 비 온다 토란밭에 비 온다.

연잎을 따서 우산을 쓰고 아가야,

토란잎을 따서 일산日傘을 받고 아가야,

이모집에 가자 고모집에 가자.

 


68

개울을 건너는데 달이 따라 왔다.

징검다리 하나에 달이 하나.

징검다리 둘에 달이 또 하나,

근심스런 네 얼굴이 억지론 듯 웃고 있었다.

 


69

바람에 쓸리는 버들과 떡갈잎을 본다.

버들과 떡갈잎은 사실 까딱도 않는 건데

내 마음만 바람 따라 쓸리고 있다면 어쩌리오……

마음만 안달복달 나부끼고 있다면 어쩌리오……

 


70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 편에서 먼저

마음을 열지 않으면 저들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소중한 것을 저들에게 주었을 때에만 비로소

저들도 나에게 소중한 것을 조금씩 나누어 준다.

 


71

바람 한 줌 모래 한 줌 만으로도 하루를

아이들은 심심치 않게 놀며 보낸다.

하느님이 주신 대로 저 벌거숭이 나무와 바람과 흰구름,

생각키 따라서는 이 세상이 그대로 천국인 것을……

 


72

뚫린 길이면 세상 끝까지 가자는 아이놈

저무는 산책길에서 돌아갈 줄 모르는 세 살배기

녀석은 모든 길이 끝없이 이어진 줄로만 아는 모양이지?

그래, 길은 끊긴 듯 이어진다는 걸 내 잠시 잊었구나.

 


73

아무리 못생기고 미련퉁이인 아이들이라도

저희 부모네에겐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사실,

우리네 인생은 덤으로 에누리로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

그런 하찮은 것들이 때로 나를 머리 숙이게 한다.

 


74

길 가다 대숲에 쏟아지는  햇살 소나기를 보고서도

문득 멈춰 눈물 글썽여지는 아, 그 어리석음.

헌칠한 해바라기나 목련이 되지 못하고

겨우 땅기운에 꽃을 피운 봉숭아여. 봉숭아여.

 


75

가난한 자에게는 끝없는 해방과 평안을.

넉넉한 자에게는 담을 쌓고서도 잠 못 드는 불면을.

일인에게 이인분의 행복을 주시지 않는 하느님,

공평하신지고 만세 만세 하느님.

 


76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으면

비가 오고 꽃이 피고 잎은 푸를 거라고

산사의 종이 울면 막힌 길은 트일 거라고

밤이 이슥한데도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77

배암이 허물 벗듯 천천히 물러가는 여름의 꼬리에

익은 봉숭아씨를 터치며 다가붙는 가을 저녁,

누구에게든 반말지꺼리보다 경어를 쓰고 싶다.

마음이 외로울 때, 파스텔의 색감으로 흐려 있을 때.

 


78

수줍어하는 누이야, 얼굴을 가리지 마라.

수줍음 또한 여자의 값비싼 장식이러니.

얼굴을 붉히는 누이야, 고개를 돌리지 마라.

네 얼굴 또한 세상의 고귀한 꽃이러니.

 


79

이 깻잎을 따서는 된장에 박았다가

시집간 딸네 주고 객지 나가 사는 아들네 주고

하루 종일 들깻잎 따다가 허리 아프신 어머니,

누가 알아주니? 허옇게 나부끼는 삐비꽃 머리.

 


80

한 아름 후회만을 안고 가리라,

한 광주리 매미 껍질만 주워 갖고 돌아가리라,

빛나는 무지개도 없이 여름을 보낸 소아마비 내 누이야

한 아름 피곤만을 안고 우리 다시 네게로 돌아가리라.

 


81

등성이에 손짓하는 억새꽃들 허연 가을날은

술집 여자들 눈화장하며 담너머 부르는 소리조차 그윽해라.

이웃집 울안에 꽃다이 익어 휘늘어진 감알만 보아도

한 상 잘 차려 대접 받은 심사여라.

 


82

겁먹은 물뱀이 숨어 살고 있는 그 둠벙,

소금쟁이 물방개 나무새우 숨어 살고 있는 그 둠벙,

긴긴 날을 개수련 혼자 놀다 심심해서

물매미 돌며 물매미 돌며 한숨짓는다.

 


83

기우는 저녁답 성호聖號를 긋는 제비, 햇제비.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나?

되물어도 번번이 시원찮은 대답

잃어버린 생각, 잃어버린 사랑을 찾으려고.

 


84

새 양복 지어 입으니 친구 생각난다.

친구와 마주 앉은 좋은 술자리 생각난다.

꽃 한 송이 사들고 잊혀진 여자나 만나러 갈까?

새 양복 지어 입어도 갈 곳 없으니 그 섭한 마음.

 


85

이 좋은 날씨를 쌀뜨물처럼 물웅덩이처럼 멀겋게

기껏 뒷동산 상수리나무 밑에 찾아가 앉아

건너 마을의 우거진 그대 눈썹, 솔숲이나 건너다보며

오늘도 나는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빈 낚시꾼.

 

86

바람 되어 나를 만나러 머언 길 찾아왔다가

차마 잠든 나 깨우지 못해 창밖에서 서성이던 사람,

아침이면 발부리 붉힌 단풍나무 되어 우뚝 섰어라.

담장 밑을 구르는 낙엽 되어 발길에 채여라.

 


87

매미는 한여름에 우는 것이 아니라

여름이 시작될 때 울고 여름이 끝날 때 우는 겔까?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의 추석 달을 배불려 놓고

끝물 참외 달고 부드러운 속살이 된 참매미 소리.

 


88

쪽진 머리 가리맛길 초록의 눈썹 아래

촛불 접시에 받쳐든 작은 가슴의 도라지꽃

이냥 살래 너랑. 너 하나만 믿고 바라고.

안심해도 좋은 니 요염을 보며.

 


89

막소주라도 한 잔 처억 걸치고 나면

한오백년이나 어랑타령 같은 노래 듣고 싶어진다.

젊고 이쁜 여자가 아니라 얼금뱅이 중년 여자

조금은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듣고 싶어진다.

 


90

바작바작 밤나무 잎새 쌓인 언덕을 넘어

동글납작 보름달님 근친覲親을 온다.

웃으며 어색하게 웃으며 시집간 둘째 누이

연분홍 한복 치마꼬리 사리트려 입고서 온다.

 


91

심어 가꾼 사람도 없이 자라 꽃을 피운

흙담 밑에 접시꽃, 일명 서울 국화꽃.

공장데기 되어 식순이 되어 고향을 떠난

부칠례, 복딱새, 놈새, 섭섭이, 딸구만이.

 

92

다듬이질 소리도 다듬이질 소리 나름이어서

부잣집 다듬이질 소리는 <다다곱게 다다곱게>로 들리고

우리같이 가난한 집 빨래는 기운 곳이 많아서

시큰동한 <봉덕수께 봉덕수께>로 들린다던가!

 


93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아,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괴로운 사람들아,

나무가 꽃잎을 버리듯 잎새와 열매를 버리듯

부려라. 조금씩 그대 가진 짐을 부려라.

 


94

세상 일에 적당히 귀 먹고 눈 멀어

구름이나 보며 낙엽 갈리는 소리나 들으며

마루 끝에서 조을다가 퍼뜩 눈을 떠 보니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뜰앞의 칸나, 치정癡情의 입술

 


95

해 지고 발부리에 어둠 밀물 되어 찰랑댈 때까지

내 마음 앉힐 곳 몰라 하늘가를 서성인다.

스러져가는 흰구름 위에 내 마음 눕힐까?

이름 모를 산길 무덤의 찬 빗돌에 이마 부빈다.

 


96

한 시간을 저자거리에 나가서 눈에 선 핏발,

바람 소리 물소리에 씻으려면 하루가 걸리고

하루를 저자거리에 나가서 거칠어진 숨결,

산의 숨소리에 맞춰 고르려면 한 달이 걸린다.

 


97

말을 아껴야지, 눈물을 아껴야지,

참고 참으면 사람의 말에서도 향내가 나고

아끼고 아끼면 사람의 눈물도 포도알이 될 것이다.

혼자 속삭이는 말, 돌아서서 지우는 눈물.

 


98

너를 무어라고 이름 지으면 좋을까?

꽃이라고 부르면 너는 벌써 꽃이 아니고

시라고 이름 지으면 너는 벌써 시가 아니어서

나는 끝끝내 네 이름을 짓지 못하고 산다.

 


99

말하고 보면 벌써 변하고 마는 사람의 마음

말하지 않아도 네가 내 마음 알아 줄 때까지

내 마음이 저 나무 저 흰구름에 스밀 때까지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서 있을 수밖엔 없다.

 


100

멀리서 보니 푸른 산 그냥 숲이더니

가까이 가 보니 삽작문 열고 내 집이어라.

된서리 생강밭에 생강을 캐던 막내 누이

몸살 나서 앓아 누운 초가삼간 내 집이어라.

 


101

<바르게 살리라> 옷깃을 여미는 나의 손을

바람이 붙잡는다, 도라지꽃도 진 언덕에.

<참하게 살리라> 머리칼 쓸어넘기는 나의 손을

바람이 스쳐간다, 나뭇잎 붉게 물든 산길에.

 


102

뜨거운 말씀은 가슴에 묻어라, 가을 풀씨.

그립은 얘길랑 두었다 하자, 가을 풀열매.

마음에 새긴 말이라고 어찌 다 드릴까 보냐.

마음에 새긴 말이라고 어찌 다 드릴까 보냐.

 


103

가난도 잘만 갈고 닦으면 보석이 된다.

하늘나라의 풀이파리, 기와집, 하늘나라의 솟을대문,

으리으리 얼비치는 보석이 된다.

누가 감히 우리의 빛나는 보석을 부끄럽다 이르겠는가!

 


104

서리 아침 우물가 늙은 홰나무 가지 끝에

세라복의 까치가 와서 울 때

생각나는 사람 하나 있었다, 마드모아젤 리.

눈보라에 망가진 산천, 눈물에 흐려진 이마.

 


105

내 집이 있는 곳은 불빛 흐린 곳,

어두운 밤길 더듬더듬 걸어서 시오 리.

그렇지만 별빛 더욱 환히 내려와 길을 비추고

너의 생각 더욱 차갑게 나의 가슴을 밝힌다.

 


106

죽을 주면 죽을 먹고 밥을 주면 밥을 먹는다.

시래기국에 콩자반도 분에 넘치는 성찬이라,

주는 대로 받고 달라는 대로 주겠다.

가난이란 잘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사치.

 


107

찬바람 부니 칼날이 선다, 가슴속에.

찬비 맞으니 두 주먹 쥐어진다. 불끈.

힘 있게 살리라고 꼿꼿하게 살리라고

작년 이맘 때도 그랬다, 부질없는 다짐을.

 


108

해 지자 더욱 시끄럽게 우짖는 대숲에 새소리.

가을 가자 태산목 너른 잎에 후둑이는 굵은 빗소리.

그 누굴 위해 나는 작은 작은 별빛을 지킬 것인가,

묻지 말라 묻지 말라 빗소리가 내게 이르는 말.

 


109

알면서도 모른 척, 보고서도 못 본 척,

토끼를 노리는 여우의 저 눈. 살쾡이의 저 눈빛.

꼭꼭 숨어라 토끼 꼬리는 너무나 작고

꼭꼭 숨어라 토끼 귀는 너무나 커서

 


110

시집 가 애 둘을 낳더니만 몹시 추워하는 옛날 여자

그녀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밤 꿈에 본 등나무

이왕 꼬이고 배틀릴 양이면 우리에게도 참말

소담스런 등꽃 타래미 열려 줄 날은 없는가.

 


111

대숲에 비바람 설치나 보오,

누군가 대숲의 깊은 곳을 만지고 가는 기척.

뒷동산 솔숲에 휘파람 소리 나오,

누군가 찾아와 나 나오기를 기다리다 가는 기척.

 


112

찬비 뿌린 들길에 혼자 오래 남겠네.

시든 풀잎 바람볕에 혼자 오래 서 있겠네.

두 눈에 눈물 고여 올 때까지, 들국화 함께.

눈물 속에 너의 얼굴 비칠 때까지, 별과 함께.

 


113

선녀야 게 섰거라 말 물어보자.

흰구름의 가슴팍은 만년설의 소산악小山岳,

흰구름의 가랑이는 휘늘어진 산란초 잎새,

사스미 향내 난다. 사스미 향내 난다.

 


114

겨울 태산목은 먼 남국에서 시집온 규수.

드러난 허벅지와 목덜미를 어쩌지 못해 한다.

찬비에 젖어 휘감기는 치맛자락을 어쩌지 못해 한다.

차라리 겨울 태산목은 안아 주고픈 아낙.

 


115

세상을 너무 모른다 핀잔치 마오.

사람 한평생의 경영經營이 검불 한 바지게

허리 휘게 어깨 아프게 지고 있던 짐

부리고 말면 그뿐, 부리고 말면 그뿐.

 


116

겨울 초입에 마늘촉을 텃밭에 심듯

내 가슴 흙을 후비고 너의 생각을 깊이 묻었다.

봄 되면 마늘촉 트듯 너의 생각에 새싹이 틀??

추운 겨울을 그것만으로도 춥지 않게 살았다.

 


117

솔바람 소리 듣고 싶거든 막동리로 오시오,

대숲바람 소리 듣고 싶거든 막동리로 오시오,

솔바람 소리 그 비릿한 목숨의 살향기.

대숲바람 소리 그 나긋나긋 뜨거워 오는 또 하나의 사랑.

 


118

얘들아 눈이 왔다 어서 나와 보아라,

까막까치 얼어 죽었다 어서 나와 주워라,

눈이 오긴 웬걸 까막까치 얼어 죽긴 웬걸

늦잠꾸러기 아이들 깨우시는 어머니의 거짓말이지.

 


119

잠투정 할라치면 <복일랑은 석순이 복을

명일랑은 삼천갑자 동방석이 명을>

나를 업고 외할머니는 자장가 불러 주셨는데

오늘은 내가 아들을 업고 그 노래를 외운다.

 


120

강태공 샘에 무지개 뿌리 내린 걸

누군가 나무지게 지고 오던 길에 보았다는데

무지개 뿌리 내린 걸 정작 본 사람은 없어

우리도 뿌리 없는 꽃이나 피우다 가는지 몰라.

 


121

꿩꿩 꿩서방 무얼 먹고 사아나?

아들 낳고 딸 낳고 무얼 먹고 사아나?

눈 온 날은 눈 먹고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마시고

배꼽이나 만지며 그럭저럭 사알지.

 


122

눈도 소나무 위에 내리면 꽃이 되고

고샅길에 내리면 쓰레기가 된다.

꽃과 쓰레기를 함께 주시는 하느님,

우리에게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함께 주실 것이다.

 


123

땜쟁이 땜쟁이 으덩박지 땜쟁이

애비가 땜쟁이면 자식도 땜쟁인가,

뉘엿뉘엿 저물녘에 바가지 들고 나왔다.

바가지가 깨져서 죽을 어찌 담아 주나?

 


124

세상에서 숨길 거두었어도 어디엔가

다람쥐 마을에라도 살아 있으려니 믿어지는 사람,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욱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

나도 죽어 더욱 향기론 이름이 되고 싶다.

 


125

눈 내린 날 나무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의 가족이다.

나뭇가지 끝에서 가물가물 사라지는 하늘

나무 뿌리 끝에서 뿌듯이 안기는 흙의 속살

눈 내린 날 나무들은 모두 천사님의 옆모습이다.

 


126

새끼 밴 염소가 추워서 우는 밤엔

알전등을 밝히고 성경책을 읽는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꿈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싸락싸락 싸락눈 내리는 소리에 귀를 모은다.

 


127

풍설風雪 사나운 날 외할머니 같은 노친네 한 분

검정색 털모자에 헌 두루마기 차림

다리를 절며 조촘조촘 어디론지 가고 있다.

외갓집 추녀 밑에도 이 눈밭은 설치리.

 


128

겨울 햇볕은 떨어져 새로 움나는 참게 발가락

불그레한 게 옴질옴질 눈물겹다.

겨울 햇볕은 구덩이에서 갓 파낸 무우 새순

노리끼리한 게 고물고물 눈물겹다.

 


129

달 떠올라 잠잠, 먹물 뿌린 대숲 그늘

대숲 그늘 속에 머리 곱게 빗은 초집

그 초집 안방에 수놓는 처녀 길슴한 눈썹 그늘

달빛은 마루 끝만큼 추녀 끝만큼만 왔다가 간다.

 


130

나무 없는 마을에 참새들 추워서

해 설핏해지기만 하면 시나대 숲에 모여 햇빛을 쪼은다.

인적 드문 마을에 까치들 심심해

감나무 꼭대기 따다 만 홍시감을 쪼은다.

 


131

대숲이 지키는 작은 마을 나 사는 마을

까치 내리는 저녁때 당신한테로

가기만 가면 된다, 새가 되든 돌멩이가 되든.

지는 햇빛에 쫓겨서 대숲의 새소리에 쫓겨서라도.

 


132

어둠 깃든 대숲 위 떠오른 초저녁 별님,

따다가 나의 방 추녀 끝에 매달았으면.

바람 잔 솔숲 위에 뜨는 초저녁 달님,

모셔다 불 꺼진 누이 방문에 걸어 줬으면.

 


133

키 큰 소나무 숲을 지나 시나대 숲을 지나

툇마루까지 찾아온 겨울 햇볕.

가만히 손목을 잡아보면 파아란 실핏줄.

손가락이 가늘다. 많이 울어서 붉어진 눈두덩.

 


134

안개는 오막살이를 지우고 나무를 지우고

숲을 지우고 마지막 남은 산까지 지웠다.

새소리며 물소리도 지울 수 있을까? 안개는.

없는드키 내 마음까지 지울 수는 없을까?

 


135

많은 걸 알지 않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여러 곳을 돌아보지 않아도 목마름이 없다면

얼마든지 고운 세상을 살 수 있는 일이다.

아무한테도 상처 받지 않고 비웃음 당하지 않고.

 


136

친구 친상의 호상으로 상여를 따라 갔다가

야산 야트막한 소나무 밑에서 춘란 한 촉을 만났다.

옷 벗은 계집의 지체인 양 늘씬한 이파리, 겨울 푸새.

나어린 첩실妾室을 보는 사내런 듯 후끈 달아올랐다.

 


137

처마 밑에 호박고지 마루 밑에 나막신

눈을 맞고 있네, 소리 없이 울고 있네,

행랑채에 버려둔 꽃가마 한 틀.

시렁 위에 외할머님 이야기책 김만중의 구운몽.

 


138

부흥부흥 음흉한 저승사자 부엉이가 울던 밤,

부엉이 울음 소리 세다가 부엉이 따라 가신 외할아버지.

부엉이 우는 밤마다 이승으로 돌아오시곤 했던가,

외할머니네 꼬작집 생나무 울에 잠 못 들던 바람 소리.

 


139

땅바닥에 알몸뚱이로 엎드려 떨고 떠느라고

입술도 떨어져 나가고 머리칼도 눈썹도 죄 뽑혀나간

냉이, 겨우 앙가슴만 앙상히 남은 냉이,

그건 또 하나 슬프디슬픈 우리 누이들의 분신.

 


140

가을에는 산이 부자로 보이더니

겨울 들어 먹장구름의 하늘이 부자로 보인다.

산이여, 베잠뱅이 단벌로 겨울을 나는 산이여,

무릎 시린 우리의 형제가 되어다오.

 


141

별을 헤다 지치면 낙엽을 덮고서 잔다.

배고프면 흰구름 보고 배부르면 찬 물소리 듣는다.

누가 훔쳐가리오? 가슴속 서말 서되 서홉의 소금.

아무에게도 나는 싸구려 에누리론 팔지 않겠다.

 


142

난蘭, 보면 볼수록 좋아지는 사람.

난, 안으로 뜨겁고 겉으로는 서느러운 사람.

난, 너를 기르기엔 내가 너무 봉두난발이구나.

네 옆에서 나는 춥고 기인 겨울 강물을 건넌다.

 


143

장독대 옆 살구나무, 동치미 항아리,

겨우내 눈에 묻힌 용구새 마루.

아들이 오면 주마고 어머니가 담그셨지만

아들은 끝내 오질 않아 시어터진 동치미.

 


144

씨받이 후처로 들어와 비럭질로 일가를 이루고

평생을 마늘밭만 매다 가신 할머니.

마늘쪽같이 야무딱스럽고 맵던 할머니.

지금도 우리집 마늘밭엔 할머님의 마늘들이 자라고 있다.

 


145

부잣집 온실 다 놔두고 우리집

바람 불면 덜컹대는 창문 옆에 와서 사는 난초.

춥긴 해도 돈냄새 덜 나서 좋을라.

쓸쓸하긴 해도 비린내 덜 역겨워 속 편할라.

 


146

봄이 멀지 않았다고 숨을 쉬라고

미루나무 삭정이 위에 까치 울음.

누가 누가 보았니? 쪽제비 봄비.

마늘밭 두엄 속으로 숨었다, 쪽제비 봄비.

 


147

서울 가 식순이 갈보였던 계집들

살구꽃 되어 깝신깝신 복사꽃 되어 해족해족

봄이 되면 하늘한테 동정童貞을 바칠 것이다.

한번도 손 타보지 않은 엉뎅이며 젖통을 보여줄 것이다.

 


148

점점이 눈송이에 흐려지고서도 남는 산

휘휘 찬바람에 쓸리고서도 남는 잡목림

저녁상의 시래기 된장국이 구수해서 좋았다.

흥부네 마을의 밥짓는 연기. 누룽지 긁는 소리.

 


149

눈이 내린 다음 연일 두고 때 없는 비가 내려

세상은 돌아앉은 부처님 한恨 먹은 아낙

한 잔 소주면 풀려 피가 돌을까.

뜨건 입맞춤이면 가슴 뛰놀아 입술 붉힐까.

 


150

보리밭 매다 싫증 나면 허리도 쉴 겸

뽑아가지고 뿌리 쓰다듬으며 놀던 쇠비름풀.

<신랑방에 불 켜라 각시방에 불 켜라>

외우며 쓰다듬으면 조금씩 뿌리가 빨개지곤 했었지.

 


151

똥구린내 두엄내로부터 봄은 오느니

똥구린내 두엄내도 하여 풀과 나무는 눈을 뜨느니

새로이 속살 차오르는 사춘기의 아이들아,

똥구린내 두엄내 모르거든 이 나라 백성이라 말하지 말라.

 


152

이끼 슬은 종가宗家, 묵은 감나무 삭은다리.

노는 아이들 없고, 기왓골을 울리는 오작烏鵲떼,

봉황을 보지 못해 끝내

지네발이 달린 햇볕, 귀가 달린 능구렁이.

 


153

상수리나무 숲에 차가운 봄비

까치 발가락이 젖고 삭정가지가 젖겠다.

봄이 왔다고는 하나 여전히

바람받이 까치둥지, 까치네 일가는 춥겠다.

 


154

손이 시려 발끝 시려 실버들 눈 트려나,

실실이 풀어내리는 하늘 푸르름.

가늘은 회초리 사이로 어른거리는 눈물.

실버들 찬 봄비에 살이 떨려 새잎 나려나.

 


155

지나는 사람들 발길에 밟히며 밟히며

나도 몰래 민들레꽃 피어났을라……

아이들 손톱에 뜯기며 뜯기면서도.

주막집 흙담 밑, 찬 봄비가 선잠을 깨워.

 


156

마을 노인들 토시 끼고 허리 꾸부정히

삼삼오오 찾아드는 사랑방.

쇠죽솥에 쇠죽은 익고 방바닥은 설설 끓고

구수한 쇠죽냄새 쇠똥냄새를 따라 오는 봄, 까치봄.

 


157

구름 사이 터져 나온 겨울 햇볕이 따스한 줄

장독대 돌무데기 아래 제비꽃들만 옹기종기 알았으니.

홑겹옷의 소꿉놀이 아이들만 올망졸망 알았느니.

오들오들 떨면서, 복이라면 그것도 하나의 복이다.

 


158

잘 사는 집 뜨락에 지난 겨울 죽은 태산목을 본다.

태산목이 귀한 나문지 모르거든 차라리

사다가 심지나 말 일이지 괜히 나무만 죽였군.

귀한 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는 걸 몰랐던 모양.

 


159

햇빛은 보리밭에 내려 초록의 햇빛이 되고

목련꽃 위에선 순백의 햇빛이 되고

개나리 위에 내려선 샛노란 햇빛이 된다.

내 마음에 내린 햇빛은 무슨 빛깔일까?

 


160

모처럼 난을 알아보는 사람 만났기에

오래 기르던 난을 분째 내어 주었다.

나이도 지긋한 그 사람 나보다 잘 기를 거야.

예쁜 딸 시집보낸 부모 마음이 이럴까 몰라.

 


161

개나리 꽃대에 노랑불이 붙었다, 활활.

개나리 가늘은 꽃대를 타고 올라가면

아슬아슬 하늘 나라까지라도 올라가 볼 듯……

심청이와 흥부네가 사는 동네까지 올라가 볼 듯……

 


162

봄이라고 보리 수탱이 같은 계집들도

사내보고 꼬리치고 암내를 풍긴다.

아무렴 그렇지, 못난 것이라고 바람조차 못 피우랴,

호박꽃도 꽃일 바엔 벌나비를 홀리는데…….

 


163

햇빛이 모이는 흙담 모퉁이, 제비꽃 열매를 따면서

<익은 것은 보리밥 설은 것은 싸알밥.>

누룽지 들고 나와 먹는 칙간 모퉁이, 기러기를 보면서
<앞에 가는 건 도둑놈 뒤에 가는 건 수운경.>

 


164

산이 보내오는 건 푸른 웃음 푸른 눈짓

팔할은 바람 소리 물소리요 이할은 침묵이다.

술잔 위에 떠오는 꽃잎, 꽃잎, 야윈 얼굴.

친구의 불운이 나를 산목련 되어 울게 한다.

 


165

하루종일 누군가 물감 칠을 하고 있다.

쉬지 않고 지치지도 않는 그 사람, 어깨가 넓다.

복숭아 가지엔 분홍빛, 살구나무엔 초록빛,

봄은 하느님이 그림을 그리는 한 장의 도화지.

 


166

새로 피는 꽃내음과 아기 비내음과

나무내음과 바람내음이 살을 섞은 이 봄공기는

무한히 충만해 있으면서 비어 있는 유마힐維摩詰의 공기.

해마다 네게 드리고픈 선물은 오직 이것뿐.

 


167

어떤 아이가 복숭아를 사서 먹고 씨를 버렸나?

죽지 않고 용케 자라 꽃을 피운 개울가의 개복사꽃.

세상의 어떤 복숭아나무보다 더 예쁘고 당당하게

제 몸매를 물거울에 비춰 보며 뽐내고 있다.

 


168

까치, 새집 짓고 알을 품는 어제 오늘

봄비, 밤새워 두루마리 연서를 쓰고

아침마다 대숲은 푸르름이 더했다.

입덧하는 새댁은 밥맛을 잃었다.

 


169

너는 낯선 풀밭이 되어 내게로 왔다.

너는 골짜기 풀숲이 되어 수줍게 앉아 있었다.

네가 앉았다 간 자리에서는 풀꽃 냄새 두어 송이

한참 동안 흔들리다가 너를 따라 갔다.

 


170

가만히 방안에 들어앉아 있어도

나는 안다. 네가 지금쯤 수틀을 잡거나

물동이 이고 우물터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내 생각하느라 숲길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

 


171

흘러가는 개울이기보다는

멍청히 앉아 있을 뿐인 한 채의 샘물이기를.

아무도 길어가 주지 않는다면 나는 어쩌나?

그렇다면 더더욱 가만히 고여 있을 뿐인 샘물이기를

 


172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173

우리는 얼굴도 모르면서 만나긴 만나리라.

나무 속이라든가 바위 속이라든가 물 속이라든가

차라리 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고 물이 되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곳에서 만나긴 만나리라.

 


174

작년 봄엔 개나리가 근경이요 버들이 원경이더니

올 봄엔 개나리가 원경이요 버들이 근경이다.

바람이 그네 타는 개나리꽃 가지도 좋더니

바람이 빗질하는 버들가지도 싫지는 않아라.

 


175

언제 봐도 불아궁지만 입 벌리고 있는

빈 대장간이 한 채 거짓말처럼 거기 있었지.

우산도 우비도 없이 맨몸으로 맞아 주던 비,

대장간 추녀 밑에선 보리밭이 더 푸르게 보였지.

 


176

우렁이 숨쉬고 미꾸라지 헤엄치는 둠벙배미 안동네.

뉘집에서 콩을 볶는가, 보릴 볶는가.

비에 갇힌 연사흘 입이 궁금한 아이들 위해.

봄물 철렁 두엄 썩는 둠벙배미 안동네.

 


177

꽃들이 시집가고 나무들이 장가간다.

초록 저고리 분홍 치마 더러는 노랑 저고리,

대님은 옥색 대님 모본단模本緞 조끼 받쳐 입고

건들건들 조랑말 위에 초립 쓴 실버들 도령님.

 


178

물 긷던 돌 틈새기 마늘 다듬던 토방귀

향내 스쳤다, 웃음 벙글던 바람 끝.

어느 해 문둥병 걸려 사내 문둥이 따라간 처녀,

뒤뜨락 함박꽃같이 피어오르던 그 나이에.

 


179

폭풍의 눈을 피해 적당히 비껴앉은 사람아,

진흙탕물 넘쳐나는 개울에 옛제비 돌아와 뜨고

어제까지만 해도 여기쯤 있었댔는데

바람 뒤에 숨었구나, 외눈박이 감밥나물꽃.

 


180

늙은 굴참나무 무딘 껍질의 되창문 열고

삐뚜룸, 밖을 내다보고 있는 울아기 조막손.

펼까 말까, 그 손 안에 감춰진 햇살.

쥘까 말까, 그 손 안에 황금빛 빗살무늬.

 


181

돌이나 닦으며 닦으며 한평생 살다 갔으면.

네 뜨거움과 슬픔이 남긴 돌.

지금도 속으로 여전히 뜨겁고 슬픈 돌.

돌이나 품으며 품으며 한세상 숨져 갔으면.

 


182

봄 되면 산과 들과 골짜기는

꽃과 신록으로 호사를 하고

개구리 울음 소리로 귀까지 호사를 하고

가진 것 별로 없는 나도 봄 따라 호강을 한다.

 


183

개울가에 난 풀도 임자가 있지요.

개울가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 물소리 한 소절,

하늘 나는 까치 울음 소리도 실은 임자가 있지요.

그러나, 꼭 가지시겠담 가지셔야지요.

 


184

맑은 샘물 한 모금 마시러 십 리를 돌아서 가고

맑은 개울물에 손 씻으러 이십 리를 돌아서 가고

네 목소리 들으러 삼십 리를 돌아갔더니

보리밭 위에 황소만 여물을 씹고 있습데.

 


185

오르막길을 걸어 굴참나무 숲길을 지나

까치집 아래 가던 발길 멈추어라.

버려진 소마 바가지 하나 눈에 띄어서.

새우젓 도가지 엎어 만든 굴뚝이 하나 거기 있어서.

 

 

 

 

<가져 온 곳 : 다음 카페 - 화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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