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선문(禪門)에 들 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노후(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분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반골(反骨)의 동지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는 배후가 없다』. 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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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송(白磁頌)
임영조
가진 것 다 내주고
정말 사심 없으면
늙어서도 저렇게 빛이 나는가
언제나 텅 빈 가슴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서
이승의 시름까지 하늘에 닿고
희다못해 푸르른 영혼을 본다
본래 두메에서 태어나
늘 당하고도 말없이 살아온
관심 밖 한줌 신분이기로
그래서 누구나 밟고 가는 흙이었기로
너의 눈부신 출세를 믿을 수가 없구나
어느 날 문득 임자를 잘 만나
하얀 속살로 환생한 너는
아직도 만삭의 몸을 풀지 못하고
온갖 그리움만 잉태한
차고 흰 만월로 떠 있었구나
살아생전 가진 것 다 내주고
퍼낼 것 다 퍼내고
가장 속깊은 사랑을 연옥에 던져
영원한 색깔로 다시 태어난
이조(李朝) 의 한 여인 그 슬픈 내생을
쟁쟁(錚錚) 울리는 속살을 본다.
(『그림자를 지우며』. 시와시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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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감에게
임영조
그래, 견딜만 하냐.
구름 섞어 바람부는 때
아스라이 먼 가지 끝에서
네가 내민 주먹은 가당치 않다.
지난 5월 어느 날
문득 화관(花冠) 쓴 제왕이 되어
정상에서 부시게 웃던 너를
그저 우러러보기만 했다.
이젠 볼품없는 민머리
스치는 바람에도 자주 숨는 너
떫떨한 말씀으로 가득 차
이따금 소쩍새로 울더니
또 누구를 겨냥하는 팔매질이냐.
그래, 두고 보리라.
서릿발 빛나는 상강(霜降)쯤
아차, 땅으로 떨어지는 찰나
비로소 새빨갛게 상기된
마지막 너를 보리라.
(『바람이 남긴 은어』. 고려원.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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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가는 길 5
임영조
가다 보면 길들은 자구 끊기네
끊어진 길은 때로 아련한 기억 속
메꽃빛 등불로 사운대거나
벼랑 끝에 이르면 언어로 집을 짓네
먼 마을 스치는 구름의 기척에도
마음 벽 쩍쩍 금이 가는 집
온 채가 제 무게로 기우뚱거려도
모든 길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네
가파른 삶은 때로 길을 비뚤게 하고
고행은 서역처럼 멀고도 쓸쓸하나
더러는 가슴 아린 열락을 덤으로 얻네
이녘은 조용한데 밤낮 치대는 파도
그 소리 좀 엿듣다가 오던 길 놓고
한결 순해진 귀로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도 위험한 불씨를 감춘
그대 뜨거운 언어의 중심으로 들어가
나 화려하게 자폭하리라, 그 후는
바다에 더 출렁이는 그리움 되리
오래된 시집처럼 헤어진, 그래서
눈길보다 추억이 먼저 닿는 섬
허나 제부도는 늘
물때를 알고 가야 길을 내주네.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민음사. 2000)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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