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벼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밝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우리들의 양식』. 믿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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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이성부
몸은 제 눈으로 울고
제 입으로 웃는다
몸은 나뒹굴어져서도
제 몸으로 저를 할딱거리게 한다.
몸이 쓰러지며 던지는 한마디 말
아스팔트 위에 피투성이가 된 말
거짓으로 살아 있을 줄을 모르는 말
불타는 말
몸은 언제나 밖에 있다.
총칼과 문자와 화려함의 문 밖에
서울의 글줄 밖에
우리들 사랑 밖에
정신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 것은 몸이다.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몸뿐이다.
(『빈 산 뒤에 두고』. 풀빛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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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벽*
이성부
내 젊은 방황들 추슬러 시를 만들던
때와는 달리
키를 낮추고 옷자락 숨겨
스스로 외로움을 만든다
내 그림자 도려내어 인수봉 기슭에 주고
내 발자국 소리 따로 모아 먼 데 바위 뿌리로 심으려니
사람이 그리워지면
눈부신 슬픔 이마로 번뜩여서
그대 부르리라
오직 그대 한몸을 손짓하리라
*숨은 벽 서울 삼각산에 있는 바위산의 하나.
(『야간산행』. 창장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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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때문에
―내가 걷는 백두대간 ·5
이성부
초가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몸이 젖어서 안으로 불붙는 외로움을 만드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후두두둑 나무 기둥 스쳐 빗물 쏟아지거나
고인 물웅덩이에 안개 깔린 하늘 비치거나
풀이파리들 더 꼿꼿하게 자라나거나
달아나기를 잊은 다람쥐 한 마리
나를 빼꼼이 쳐다보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자유라는 것을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감기에 걸릴 뻔한 자유
그 좋은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안다
(『지리산』. 창장과비평사. 200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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