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잠자는 돌
박정만
이마를 짚어다오.
산허리에 걸린 꽃 같은 무지개의
술에 젖으며
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는
마을마다 떠다니는 슬픈 귀동냥.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데
반벙어리 가슴으로 하늘을 보면
밤눈도 눈에 들어 꽃처럼 지고
하늘 위의 하늘의 초록별도 이슥하여라.
내 손을 잡아다오.
눈부신 그대 살결도 정다운 목소리도
해와 함께 저물어서
머나먼 놀빛 숯이 되는 곳.
애오라지 내가 죽고
그대 옥비녀 끝머리에 잠이 물들어
밤이면 눈시울에 꿈이 선해도
빛나는 대리석 기둥 위에
한 눈물로 그대의 인(印)을 파더라도.
무덤에서 하늘까지 등불을 다는
눈감고 천 년을 깨어 있는 봉황(鳳凰)의 나라.
말이 죽고 한 침묵이 살아
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
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
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선(禪) 모양으로.
(『잠자는 돌』. 고려원. 1979 :『박정만 전집』. 외길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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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두 시
박정만
바람이 잠든 날의 오후 두 시.
어디선가 허공을 무너뜨리면서
마치 산악과 같은 조수가 밀려와서는
두 시의 내 영혼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급히급히 침몰당했다.
마음 한쪽 구석에서 살짝 꺾여진 여름날의
두 시의 빛의 매장.
당신도 그것을 보았으리라.
고요함이 고요함으로 무너지고
빈 소리가 빈 소리로 요란하던 것을.
그러나 세상은 세상.
반쯤은 병(病).
바람이 잠든 날의 오후 두 시.
병(病)을 일으키며 바람이 조용히 다가와서는
내 귀를 지하(地下)로 내리게 하는
그러나 폭풍(暴風)은 폭풍.
당신도 그것을 보았으리라.
칼이 칼로써 무너지고
반쯤은 죽음.
죽음을 일으키며 바람이 조용히 다가와서는.
(『잠자는 돌』. 고려원. 1979;『박정만 전집』. 외길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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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산수(山水) 2
박정만
오동꽃 피는 밤의 수틀 속으로 초롱의 불빛이 화사하게 피어오를 때 숙(淑)아, 다홍치마 붉은 네 살빛 속에 내 마음의 홍초꽃도 점점이 불을 켜 갔다. 밤이 저 홀로 녹아, 소쩍새 울믐 속에 밤이 찌르르 저 홀로 녹아 마당귀 고란초꽃잎만 건드려 놓고…… 그러면 나는 속으로 속으로 마냥 애가 터져서 문설주에 귀를 놓고 울음 울었다. 얼굴 하얀 숙(淑)이, 너의 박하분 냄새, 긴 모가지며 뽀오얀 버선발과 둘레둘레 사방을 살피는 모양이며 둬둬둬 돼지를 몰거나 쫓는 소리. 뒤란에 때없이 바람이 불고 바람이 끝난 뒤엔 으레 적막이 뒤덮여 꽃수풀을 이루고, 그 꽃수풀 위로는 어김없이 초록의 귀뚜라미가 기어갔다. 그런데도 너는 죽도록 말이 없어서 밤이 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꾸역꾸역 먹구름만 밀려왔다. 너로 인하여.
(『박정만 전집』.외길사.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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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언할 수 없는
박정만
어떻게 깨꽃으로도 말할 수 없는
어둠의 산천초목 있단 말이지.
들판에 한나절 마파람 지나가듯이
먹구름 속 마른번개 지나가듯이
어떻게도 그럴 수 없는 산이 있단 말이지.
그 어깨 좁은 산을 내가 가지고
거닐던 손목으로 잡고 있단 말이지.
말이 좋아 손목이지
그냥 바람 아니면 비 설치는 저녁 때
한두 마디 무지개면 족한 것이지.
참으로 별것이기나 한 듯이
돌맹이 하나도 줍지 못한 목벌리 근처,
마을 끼고 도는 산허리나 부둥켜 안고
이 허한 마음의 병을 다 주어야 하리.
정처가 한군데도 없어.
세상은 저무는 저녁잠의 작은 팔베개,
꽃피는 잠덧도 너에게 주고
어리석은 잠덧도 그대에게 바칠 일인데.
아, 아직은 눈썹 끝의 달이 서러워
냇가 물밑돌에 얼굴 붉히며
한나절 독새풀로 이지러진 마음을 풀며
단 한 마디 저녁 말도 하진 못해라.
저것이 근심의 하루해나 될 것인지.
(『박정만 전집』.외길사. 1990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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