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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절벽 / 김길나 - 꽃 또는 절벽 / 박시교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6. 1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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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절벽

 
김길나

 

 

계단은 언제나 지층 넘어 지하로 내려간다

 

어둠이 생산해 낸 뿌리가 어둠을 파고드는 곳 거기,

녹은 살이 술처럼 익어 생체로 흘러가는 곳 거기,

생과 사의 사랑 법을 구근이 자동 기술 중인 그곳에서
 
푸른 길이 올라왔다

거친 경계를 통과한 물이 뇌성으로 치솟았다

당신은 이 곧추서는 줄기를 생의 척추라 했다

기둥이라 했다

그날 이후, 내 척추 뼈에서 이파리가 돋아났다

고층으로 올라온 식물언어학자가 초록 어원을 캐낸

이파리를 들고 잇몸을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탐미를 수호하는 식물언어학자는 초록을 넘지 못한 나를

넘어 네게로 갔다 그리고

초록에서 붉고 노란 글자를 꺼내어 너를 읽어버렸다 꽃이라고,

꽃의 높이에서 너는 실재로 꽃이 되어 피어났다


식물언어학자가 꽃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내부를 외경화해 꽃이 된 꽃의 고백을 받아 적고 있다

절정에서 추락이 완성되는 비장한 절벽을,

황홀한 꽃의 살의를 꽃의 언어로 써 내려가고 있다

 

꽃이라 불린 네가 고층에서 투신하던 날

식물언어학자는 시집을 들고 절벽 위로 올라갔다

자결을 숙명으로 태어난 꽃의 투신!

이제, 꽃의 절정과 꽃의 자결은 꽃이 지닌 양 칼날이다

 

 

 

―『현대시학』(201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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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또는 절벽

 

박시교 

 


누군들 바라잖으리,

그 삶이

꽃이기를

더러는 눈부시게

활짝 핀

감탄사기를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이기를

 

 

  

-이경철 엮음『시가 있는 아침』(책만드는집,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