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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 청노루 / 나그네 /난(蘭) / 가정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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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청노루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목월 시전집』.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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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박목월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지훈(芝薰)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은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목월 시전집』.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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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蘭)


박목월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난 기타』. 신구문화사, 1959; 『박목월 시전집』.민음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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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간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어.
내 신발은 십구문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청담』. 일조각. 1964 : 『박목월 시선집』. 믿음사. 200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