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뉘가 오면 뉘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해』. 청만사. 1949 :『박두진 전집 1』. 범조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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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송(墓地頌)
박두진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읫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두진 전집』.범조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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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靑山道)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 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 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두진 전집 1』.범조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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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맥을 가다
박두진
얼룽진 산맥들은 짐승들의 등뼈다
피를 뿜듯 피달리어 산등선을 가자.
흐트러진 머리칼은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빛 이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
포효는 절규, 포효로는 불을 뿜어,
죽어 잠든 골짝마다 불을 지르자..
가슴에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독을 바른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가슴에는 자라나는 애기해가 하나
나긋나긋 새로 크는 애기해가 한 덩이.
미친듯 밀려오는 먼 바다의
울부짖는 파도들에 귀를 씻으며,
떨어지는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다시 솟을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
(『거미의 성좌』. 대한기독교서회, 1961; 『박두진 전집 2』.범조사. 198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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