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내가 훔치고 싶은 ♠ 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김선우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10.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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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2011년을 기억함


김선우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의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 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옥수수밭을 지나온 바람이 크레인 위에서 함께 속삭였다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지 너무 오래 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로 던져 올릴 때
하나씩의 그물코,
기약 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동안
수 만 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 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 녘에서 하나의 그물고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월간『문학사상』(2012년 1월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2 올해의 좋은 시 100選』(아인북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