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쓰긴 했지만.. 이런 책, 왜 사는지 궁금해요"

-어느 윤문 작가의 고백
한두 달이면 책 한 권 뚝딱, 서문·보도자료까지 직접 써… 우린 이를 '協業'이라 부른다
조선일보 | 박돈규 기자 | 입력 2013.08.23 03:33 | 수정 2013.08.23 10:01

 

"강연 녹취록이나 개요만 받을 때도 많아요. 녹취록을 다 풀면 3000매쯤 되는데 1000매로 줄이고 재구성하며 목차를 만듭니다. 저자가 처음부터 '작가를 붙여달라'고 요구하거나 출판사가 부추기는 경우도 많아요. 강연은 잘하는데 글 솜씨가 없거나 시간이 부족한 분들일 겁니다. 책은 두 달 만에 나옵니다. 뚝딱."

이자인(가명·여·45)씨는 그것을 '협업(協業)'이라고 칭했다. 직업은 '윤문 작가'.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2007년부터 윤문 작가가 된 그는 "아이디어는 괜찮은데 글이 엉성할 때 내게 의뢰가 온다"면서 "누구나 쉽게 '저자'가 될 수 있는 시대"라고 했다.

↑ [조선일보]

출판계에는 윤문 작가나 고스트 라이터 수백 명이 활동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접촉한 이들은 대부분 "거론되길 바라지 않는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씨는 "글쓰기 소양은 부족하지만 콘텐츠 생산 능력이 탁월한 아이디어형 저자가 늘면서 윤문 수요도 커지고 있다"며 "발주자의 주문에 부응하면서 나름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프리랜서(외주 편집자)로 독립하고 만든 책은 100~200종. 그중 절반은 교정·교열을 넘어 구성 자체에 개입했다. 국내 저자는 물론 번역서 의뢰도 많은데 대체로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서였다. 문학이나 학술, 전문 분야는 손대지 않는다고 했다.

"아무 원고나 던지면서 자기계발서처럼 써달라는 요구를 받아요. 사실 모든 책의 자기계발서화가 진행 중입니다. 대중이 이런 책을 선호하니까."

이씨는 서문과 보도자료를 직접 쓰는 경우도 잦다고 했다. 콘셉트 잡고, 구성하고, 1차 원고 쓰고, 교정에 보도자료 '납품'하는 것까지 300만~350만원. 200자 원고지 1매당 1300~1500원을 받는다. 그는 "많게는 한 달에 2~3종을 만든다"면서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이 명함처럼 뿌릴 책 의뢰가 쇄도한다"고 했다.

그는 1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여러 권에도 다양한 형태로 관여했다고 말했다. "다작(多作)으로 유명한 저자 A씨 책은 대부분 저 같은 사람이 쓴 겁니다. 그 사람은 기획안이나 강연 녹취록만 줄 뿐이죠. 인문학 유명 저자 B가 보내온 원고는 글발이 없고 진부했어요. 여성 애독자가 많은 저자 C는 거칠지만 그쪽에서 초고를 써왔어요…."

저자와 직접 만난 적은 없다고 했다. "얼굴 보면 불편하고 원고에 손대기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출판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토로했다. "글에 대한 엄정함과 외경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편집자가 자기가 기획한 책의 보도자료도 못 쓰는 것을 볼 때마다 한심해요."

그는 "누가 돈을 대주면 소설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이 윤문한 책을 서점에서 만날 때 심정은 어떨까. "자식 같지는 않아요. 독자가 저런 책을 왜 살까, 되레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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