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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김화성 전문기자의&joy]인왕산을 어슬렁거리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9. 8.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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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김화성 전문기자의&joy]인왕산을 어슬렁거리다

기사입력 2013-02-22 03:00:00 기사수정 2013-02-22 08:00:04

 

근육질 바위 꿈틀꿈틀··· 대궐 내려다보는 호랑이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인왕산. 조선시대 경복궁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산(西山)’으로 불렸다. 산잔등에 오르면 어느 곳에서든 서울 장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경복궁, 청와대가 손에 잡힐 듯하고, 저만치 남북으로 남산과 북한산 백운대가 호위하듯 서 있다. 인왕산은 거대한 통짜 돌산이다. 기기묘묘한 바위가 많다. 이 중 조선 중종의 폐위 왕비 신 씨와 관련된 치마바위 사연은 애틋하다. 궐 밖으로 쫓겨난 신 씨가 임금이 볼 수 있도록 이 바위에 날마다 분홍 치마를 내걸었다는 것이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서울 인왕산은 근육질이다. 우두둑! 손마디 꺾는 소리가 들린다. 금방이라도 근육을 풀면서 “끄∼응” 하고 일어설 듯하다. 아무리 봐도 힘깨나 쓸 것 같은 통뼈다. 오죽하면 실학자 유득공(1749∼1807)은 “(인왕산은) 사람이 팔짱 끼었던 양팔을 풀어놓은 듯, 양어깨에 날개가 돋친 듯하다”라고 말했을까. 한마디로 어깨가 레슬링선수처럼 떡 벌어졌다는 말이다.》
산잔등을 가르마 타듯 동서로 가로지르는 서울 성곽. 무악, 홍제동은 한 뼘 차로 도성 밖이다.

인왕산은 거대한 통짜 화강암 덩어리다. 이마까지 훤하다. 하얀 넙적 바위가 봉우리 쪽에 떡하니 박혀 있다. 그뿐인가. 크고 작은 돌들이 우당탕탕 솟아 있다. 기차바위 치마바위 삿갓바위 부처바위 매바위 범바위 맷돌바위 이슬바위 모자바위 선바위 지렁이바위….

멀리서 보면 달마대사 얼굴 같다. 억센 매부리코에 부리부리한 눈, 숯검정 눈썹, 한 일자로 꾹 다문 입, 거칠고 성긴 구레나룻. 몸은 울퉁불퉁 뼈마디가 굵다. 억센 호랑이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은 북악산 자락(현 청운중고교)에서 태어나 인왕산을 마주보며 살았다. 그의 평생 친구는 천재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소꿉친구 이병연(1671∼1751)이었다. 이병연의 집은 칠궁 동쪽 부근으로 정선의 집과 가까웠다. 칠궁(七宮)은 ‘육상궁’(영조 생모) 등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그들은 같은 스승 김창흡 밑에서 배웠다. 이병연이 시를 써서 보내면 정선은 그림으로 답했다. 그림이 가면 곧바로 시가 왔다.

정선의 나이 일흔다섯(1751년)이던 여름날, 여든 노인 이병연은 앓아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선 한 달 내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정선은 가슴이 아팠다. 어느 날 문득 비가 그치더니 하늘이 맑게 개기 시작했다. 물먹은 인왕산이 말갛게 다가왔다.

정선은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 그 광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 덩어리, 막 피어오르는 물안개, 물에 흠뻑 젖은 소나무들. 바위를 타고 콸콸 쏟아져 내리는 물. 그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는 ‘꿈틀거리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마지막 가는 친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그림. 하지만 이병연은 그 나흘 뒤에 죽었고 정선은 그 뒤로 8년을 더 살았다.

겨울 인왕산은 한 폭의 수묵화다. 꿈틀꿈틀 힘이 넘치면서도 고졸한 추사체다. 곳곳에 푸른 소나무가 희멀건 바위틈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다. 바위틈 곳곳에선 물이 솟아난다. 인왕산약수터, 무악약수터, 인왕천약수터, 석굴암약수터, 버드나무약수터, 부암약수터, 돌산약수터…. 달고 시원하다.

윤동주문학관.

한양 도성의 성곽은 인왕산 정상을 동서로 가른다. 무악동 홍제동은 한 뼘 차로 도성 밖이다. 성곽은 북악산(북·342m)∼인왕산(서·338m)∼남산(남·262m)∼낙산(동·125m)으로 이어지는 약 18.2km 길이다.

무학대사의 주장처럼 만약 인왕산이 한양의 주산이 되었다면 필운대 일대가 궁터가 되었을 것이다. 좌청룡은 북악산, 우백호는 남산. 하지만 정도전은 “제왕이 남쪽을 바라봐야지, 어찌 동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느냐”며 반대했고 역시 태조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북악산이 주산, 인왕산은 우백호가 된 것이다.

인왕산은 헌걸차다. 좌청룡 낙산보다 힘이 몇 배나 세다. 그래서 조선왕조 500년 동안 맏아들 상속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는 속설이 있다. 무학대사는 ‘1000년 갈 왕조가 그 반 토막으로 줄어들것’이라고 말했다던가.

인왕산에 오르면 서울 장안이 발아래 보인다. 북악산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청와대도 손에 잡힐 듯하다. 저잣거리 사람들은 너도나도 인왕산에 올라 ‘나라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손금 보듯 환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다. 이젠 한양 도성 밖에 있는 사람들이 인왕산 호랑이가 된 것이다.





▼합장한 두 스님 닮아··· 기도발 세다고 발길 붐벼▼


고깔과 장삼 차림의 두 스님이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의 선바위


● 선바위 이야기

인왕산 ‘선바위’는 기도터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만큼 ‘기도발이 세다’는 것. 아이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아이를 기원하는 바위’라는 뜻의 ‘기자암(祈子巖)’이라고 불릴 정도다. 작은 돌을 문질러서 신령스러운 선바위에 붙인 자국도 많다. 그렇게 해야 자식 생산에 효험이 크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붙임바위’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선바위의 ‘선’은 보통 한자의 ‘禪(선)’자로 해석한다. 바위가 ‘두 스님의 참선(參禪) 모습’을 닮았다. 그러고 보니 ‘고깔과 장삼 차림의 두 스님이 합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뒤쪽에서 보면 영락없는 ‘도포 입은 스님의 뒷모습’이다. 바위에 눈이 쌓이면 공력 높은 조실스님 같다.

‘서 있는 바위(立巖)’라는 뜻의 선바위라는 설도 있다. 마을 앞에 선돌을 세우거나 돌무더기를 쌓는 ‘바위 숭배사상’의 흔적이라는 주장이다. 일종의 돌미륵사상과 통한다. ‘돌미륵의 코를 문지르면 아이가 생긴다’는 속설도 선바위 ‘돌붙임’과 흡사하다.

선바위는 한양 도성 바로 밖에 자리한다. 코앞에 서울 성곽이 가로막고 지나간다. 그 너머는 임금이 살고 있는 궁궐이다. 전설에 따르면 애초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학자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를 설득해 성밖으로 밀어내 버렸다는 이야기다.

유교의 합리성이 불교나 민간신앙의 신비주의를 이긴 것이다. 무학대사는 “이제 승려들은 선비들의 책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결국 승려와 무당은 조선 500년 동안 성 안에 들어가 살 수 없었다. 조선이 ‘선비의 나라’가 된 것이다.

이성계는 꿈 이야기로 얼버무리며 무학의 체면을 살려줬다. ‘꿈속에 눈이 엄청 내렸는데 인왕산에 가보니 선바위 쪽은 그대로 쌓여 있고 그 너머 쪽은 고슬고슬 모두 녹았더라’는 것이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을 비롯해 무속신앙 받드는 집이 많다. 국사당은 전국 무당들의 으뜸 굿판 메카. 원래 남산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이곳으로 옮겨버렸다. 요즘도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등이 수시로 벌어진다.

▼막다른 골목 내달리던 시인 이상… 윤동주는 계곡 아무데서나 세수▼


● ‘시인의 마을’ 서촌
윤동주


윤동주 시인(1917∼1945)은 인왕산 자락 서촌에서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다. 1941년 문과 졸업반 땐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넉 달 동안 하숙생활도 했다. 2년 후배 정병욱(1922∼1982·국문학자)이 그의 룸메이트였다.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 출신, 정병욱은 경남 남해 섬이 고향이었다. 한반도의 남북 끄트머리에 사는 두 촌놈이 만난 것이다. 생전 정병욱의 회고에 따르면 윤동주는 걷기를 좋아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누상동 뒷산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부터 했다. 세수도 인왕산 골짜기 아무데서나 하면 그만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엔 소공동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나가 책방을 순례했다. 광화문 종로 인사동 거리를 거닐고 가끔 음악다방, 영화관에 들렀다. 현재 인왕산 아래엔 윤동주문학관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다.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 ‘쉽게 써진 시’에서)


이상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은 서촌에서 태어나 감수성 많은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당시 서촌 옥인동 47-3번지엔 친일 매국노 윤덕영(1873∼1940)의 별장(1973년 철거)이 있었다. 대지 9917m²(약 3000평), 연건평 3884m²(약 1175평)의 엄청난 규모. 당시 동아일보(1924년 7월 21일자)엔 ‘2층에 뾰족한 머리(옥탑)까지 얹어, 어린아이들조차 악마가 얼어붙은 것처럼 흉하게 보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마침 이 집 대문은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김민수 서울대 교수는 이상의 오감도 ‘시 제1호’ 내용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구절은 이상의 어릴 적 경험이 내재적 동기가 됐다는 것이다. 서촌의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리며 느꼈던 유년시절 공포의 기억이 녹아 있다는 말이다. “이 놈들, 냉큼 가지 못해! 뿔 달린 귀신이 잡아간다!” 윤덕영 하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마침 옥인동엔 이완용의 저택도 있었다. 이완용은 1910년 나라를 판 대가로 옥인동 19번지 전체(현 옥인파출소 앞∼자하문로)에 이르는 엄청난 땅을 받았다. 이곳도 아이들에겐 ‘무서운 골목’이었으리라.

현재 이완용 집은 옥인동사무소 앞 19-16에 ‘쪼그라진 폐가’로 방치돼 있다. 1937년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지은 2층집(옥인동 168-2)은 동양화가 박노수가옥(서울시문화재자료 제1호)으로 남아 있다. 내부 수리를 거쳐 곧 미술관으로 문을 열 예정이다.

김화성 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