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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 한 움큼 / 공광규 - 시래기 / 양문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2. 6.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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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 한 움큼


공광규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 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를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면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 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 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 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 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살골 출신인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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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깃국

 

양문규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 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ㅡ계간『시와 시』(2010.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