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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시] 시적 사유와 그 절차들 / 신진숙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3. 1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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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 2014년 03월 01일 (토)                                                                     
신진숙 kkamsse@hanmail.net

   

신진숙
문학평론가

시는 무엇인가 시작한다. 모호하고 잠재적인 것들이 도래한다, 시를 통해.

 

그러나 과연 무엇을 시작하는가. 알 수 없다. 그것은 이름이 없다. 이름도 없이 당도하는 그것은, 감각할 수는 있지만 명명될 수는 없다. 시는 자신이 무엇을 시작하는지 모르는 채, 시작한다.
이처럼 시가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에게 무엇이 요구되는가. 시의 시작은 그 자체로 재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감각을 필요로 한다. 현존하는 언어로는 재현할 수 없는. 그러나 미지의 이것을 느낄 수 없다면, 시는 그 무엇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보이지 않고 명명할 수 없는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사유하는가. 그것은 맥락들과의 단절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아직 명명되지 않은 감각들을 일상적 언술 체계 속에 ‘더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명명할 수 없는 감각, 감각의 불가능성에 대한 추구는, 시의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가 명명 가능한 사물들과 언어로만 짜진다면 그것은 사유의 진정한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재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어떤 절차를 통해 ‘시작’되는가. 그것은 단어에 대한 엄밀한 사유로부터 시작되곤 한다. 실제로 우리는 가장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일지라도 엄밀하게 그 뜻을 되묻는다면, 일순간 막연함을 느낀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빈 공백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기표들 속에 마치 도사리고 있던 어둡고 텅 의미의 빈 구멍과 마주하게 된다.

 

   

가령 오탁번의 시 〈적막〉이 그러하지 않은가. ‘적막’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적막이 과연 무엇인가를 엄밀하게 사유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금세 혼란에 빠진다. 적막은 적막으로 표현될 수 없는 공백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명명할 수 없는 어떤 실재가 드러난다. 어떤 의미에서 시가 적막이라는 단어에 명징한 설명을 부여하는 순간, 풍경은 더 이상 적막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적막이란 그야말로 언어로도, 형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미결정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단어를 낯설게 하는 이 기본적인 과정은 시라는 사유과정의 중요한 절차라고 말할 수 있다.

 

뒷집 할머니가
외꽃이 핀 얼굴로
보행기를 밀며
느티나무 아래 지나간다
담배 한 개비를 건네자
합죽하니 웃는 얼굴
볼우물이 깊다

서녘 하늘


노을빛 왜가리가
느리다

 

— 오탁번 〈적막〉(《유심》 2월호)

 

아마도 “적막”의 실체를 명확하게 설명할 방도란 인간에게는 없을 것이다. 적막은 명명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분명하게 재현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적막은 언어로 쓰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오탁번 시인은 적막에 대한 설명을 포기함으로써 적막에 다가설 수 있는가를 실험하려 한다. 위 시에서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인과성이 없는 풍경의 연쇄에 불과하다. 뒷집 할머니를 만난다. 담배를 권한다. 할머니가 웃는다. 그녀의 볼우물이 깊이 팬다. 노을이 진다. 왜가리가 날아간다. 이 모든 문장들 사이에는 뚜렷한 인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시인이 이 모든 것을 인과적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했다면, 이 우연성들은 임시로만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사물과 풍경 사이의 무연함은 필연성보다 중요하다. 물론 늙음과 노을, 죽음과 느림 사이에 어떤 흐릿한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분명한 인과성으로는 축소되지 않는다. 기실 인과의 관점은 적막한 우주의 질서에서 본다면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사물들은 언제나 이미 그것 자체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적막은 어떤 의미로 해석되지 않은 채 보류된다. 이는 오탁번 시인이 지닌 기본적인 태도, 즉 사물에 관조적인 자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단어에 대한 이 같은 실험은 조금 다른 절차들이 존재할 수 있다. 가령 일상적으로 분명해 보이는 단어에 명명하기 어려운 어떤 의미를 더함으로써 사물의 투명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흔히 일상적으로 우리는 하나의 단어를 제시하면 그것에 대한 분명한 이미지와 의미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시인들은 이 흔하게 제시되는 표상 과정 속에 묘한 시선의 차이를 기입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곤 한다. 가령 이원규 시인이 〈단지 그 물맛이 아니었으므로〉라는 시에서 ‘물맛’이 아니라 ‘단지 물맛’이라고 말할 때에 일어나는 의미의 변화가 그러하다. 단지라는 수사는 일상적 물맛의 의미에 다른 어떤 의미가 보탬으로써 새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원규 시인은 이 두 단어의 차이, 즉 ‘물맛’과 ‘단지 물맛’과의 차이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인식하고 시작한 것일까.

 

전라선 밤기차를 타기 직전이었다
단지 물맛이 그 물맛이 아니었으므로
서울역파출소 앞 지하도에서 세상의 가장 얇은 이불
98년 5월 8일자 신문 한 장을 덮어쓰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생수병에 담긴 맑고 찬 소주를 마셨다
사표를 던지고는 빙하기의 바퀴벌레 더듬이를 세운 채
서소문 빌딩 8층 의자에서 아주 잘 보이는
서울역의 노숙자로 스며든 지 열흘째 밤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시인 박봉우 식의 서울 하야식!
환멸의 도시를 떠나는 게 아니라 나도 나를 못 믿겠으니
제발이지 불귀불귀불귀 주문을 외며
하나 남은 더듬이마저 담뱃불로 지져버리고는
구례구행 막차에 올랐다 바로 어젯밤 같은 16년 전의 일
나이 들수록 단지 물빛은 그 눈빛이 아니었으므로
겨우 맑은 물 한 모금 마시러 지리산까지 왔다
어릴 적 날마다 밤마실 나가던 청상과부 어머니
고향 하내리의 참샘에서 맨 먼저 길어와
장독대 위에 올리던 하얀 사발 속의 정화수
바이칼 호수의 만년설이 녹은 물
그 차고 맑은 물 한 모금의 눈빛은 아니더라도
고운 선생의 세이암 아래 두 귀를 씻고
달빛 어른거리는 당골샘의 천년고리 감로수
생니 시리도록 마시고픈 해발 1320미터의 임걸령 옹달샘
빗점골 폭포수와 칠불사 찻물 한 바가지
첫 햇살 받으며 똑똑 떨어지는 서출동류 석간수
그 물 한 방울의 목소리를 들으러 섬진강까지 왔다
큰 산 푸른 숲의 배꼽에 얼굴을 묻고
입술 부르튼 고라니가 마시고
혓바닥이 마른 산새들이 먼저 와서 마시는
맑은 물 한 모금이 되려고 전라선 밤기차에 올랐다

 

— 이원규 〈단지 그 물맛이 아니었으므로〉(《유심》 2월호)

 

이런 맥락에서 다시 묻자. 물맛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시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아도, 물맛에 대한 명확한 정체를 찾을 수 없다. “단지 물맛”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물맛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 속에는 어떤 특별한, 조금은 고상한 의미가 투영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이칼 호수의 만년설이 녹은 물” “고운 선생의 세이암 아래 두 귀를 씻고/ 달빛 어른거리는 당골샘의 천년고리 감로수” “생니 시리도록 마시고픈 해발 1320미터의 임걸령 옹달샘” “빗점골 폭포수와 칠불사 찻물 한 바가지” “첫 햇살 받으며 똑똑 떨어지는 서출동류 석간수” 등 물맛은 현실적인 너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물은 누군가의 마른 목을 적셔준다.

 

즉, 시인이 말하는 물맛은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 생명의 맛이다. 시인은 목마름을 달래주었던 수많은 물맛을 통해 인간의 삶이 다시 원초적인 물맛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무미하고 수사도 없는 그저 단순한 물 한 모금의 위로. 이 물맛은 시인이 신산한 삶으로부터 연민이나 원망 없이 세상을 건널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다. 시도, 사람도 누군가에 이 담백한 물맛이 될 수 있겠는지. 시인이 묻고 있다. 시는 가장 평범한 단어에도 미지의 의미를 보탬으로써 새로운 시적 사유의 과정을 시작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시적 사유가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것은, 사유 속에서 ‘너’를 만날 때이다. 가령 여자와 남자와 같이 비대칭적 성차의 은유가 존재할 수 없다면, 시는 영원히 자기 자신의 독백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바디우가 말했듯 나와 너라는 관계의 대면을 의미하는 숫자 ‘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인은 동일성의 함정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동일성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새로운 사유도 시작되지 않는다.

 

당신과 재회했다. 이별은 헤어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 살게 되는 병에 걸리게 한다. 내 기억은 당신에게 헤프다.//
어쩌면 이리도 다정한 독신을 견딜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틀린 말이 한 마디도 없다.

 

당신의 기억이 퇴적된 검은 지층이 내 안에 암처럼 도사리고 있다. 어떤 망각에 이르러서는 침묵이 극진하다. 당신은 늘 녹슨 동전을 빨고 우는 것 같았다. 손이 잘린 수화를 안다. 우리는 악수를 손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추상의 무덤에서 파낸 당신의 심장을
냇가에 가져가 씻는다.

 

누가 버린 목어를 주웠다. 살덩어리가 단단해서 더 비렸다. 속마음을 다 드러내면 저토록 비리게 굳어버린다던, 당신의 이야기. 이따금씩 부화하는 짐승의 말.

 

지금 쉬운 것은 훗날에는 아쉬운 것이다.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강기슭에서는 사람이 태어날 때 끊었던 탯줄을 간직해두었다가 죽을 때 함께 묻는 풍습이 있다. 서로 떨어지지 못한 채 남이 되어버린 슬픔. 지금은 내가 먹을 수 없는 타액을 떠올리며 나는 마르게 웃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받고 싶었던 거라고 자백했다. 살을 짚어 만나는 핏줄처럼 희미하게 그리워하는.

 

심장은 몸이 아니라 몸의 울림이다.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아파하고 있을 거라고 믿겠다.
그 아픔에 순교하는 심장이 사랑이다.

 

— 이이체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유심》 2월호)

 

   
이이체 시인의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라는 시는 잘 쓰인 한 편의 사랑-시(詩)로 읽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사랑을 모티브로 하기에 이 시는 동화와 공감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사랑하는 이의 심장은 단지 하나의 기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울림”이라는 시인의 말은, 사랑의 일반적인 느낌을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랑의 밀어(密語)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상상할 수는 시적 사유의 지점이다. 즉, 너를 감각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즉, 이 시의 “당신”은 사랑하지만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할 수 없는 너와 나의 사랑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느낌들에 의존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존재는 “추상”이 될 수 없으며 동시에 감각할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손이 잘린 수화”와 같다.

 

그 결과 평범해 보이는 사랑은 기괴한 사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제 사랑은 “서로 떨어지지 못한 채 남이 되어버린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상화할 수 없는 존재, 내 사랑의 도구가 되지 않는 타인을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은 “순교”와 같다.

 

그렇다면 이 시는 무엇을 시작하는가. 사랑에 관해 말하자면 아마도 시인은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서 파괴된 ‘둘’의 조우를 구원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사랑이 본질적으로 섹스로 치환되는 연애 과정에 사랑을 구출하는 것. 사랑은, 재현할 수 없는 ‘당신’을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이체 시인과는 반대로 김안 시인은 바로 이러한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둘’의 대면이 소멸된 세계의 비극을 보여준다. 그의 시 〈맹목(盲目)〉을 읽어보자.

 

어느 날,
나는 눈알이 파여져 있었고
하지만 모든 이에게 나쁜 권력은 없기에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룩한 증오였고
집은 순결이 부패하는 자리였고
거대해지는 생활의
공포들이 이 공화국을 부강하게 만들고 있었고
어느 날부터엔가 눈알이 파여져 있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더 잔인해질 수 있었고
굴종의 기억이 공화국의 질서를 이루었고
뚝, 뚝
나의 손가락이 가지런히 부러져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죽기 위한 공장들은 평안하게 돌아가고
완벽한 죄악과 비둘기와 개종자들로 가득 찬 공화국은 영영 부패하지 않고
하루에도 수차례 낮과 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어느 날,
그리고 다시 또 어느 날이 되어도 나는 눈알이 파여져 있을 것이기에
모든 시작들은 이미 끝나 버렸고
나는
얼마나 깊이 떨어져 있는지 알지 못하고

 

— 김안 〈盲目〉(《유심》 2월호)

 

이 시에서 “맹목”은 차이를 제거한 동일성의 주체를 상징한다. 같은 것만을 반복하고 복사하는 ‘맹목’의 삶은 모든 시작이 이미 끝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것도 보지 않는 맹목의 삶이야말로 자본주의 세계의 실체임을 폭로한다. 어떤 의미에서 맹목은 폐허만을 만들어내는 자본의 본질을 회피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맹목은 영원히 자기 자신만을 본다. 따라서 맹목을 벗어난다는 것은 타자와의 조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타자를 본다는 것은 진리에 이르는 시적 공정과정이자 진정한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사유의 절차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엄밀하게 철저하게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 점에서 김안 시인은 어떤 종류의 낙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낙관은 사유 없는 맹목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이 봄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보는 나’ 혹은 ‘생각하는 나’ 자신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진정한 의미의 사유란, 나와 전혀 다른 존재인 너의 가능성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당신’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사랑이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동일성의 폐허와 같다. 갇힌 동일성의 원환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시가 시작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시가 무엇을 시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과정’이다. 특별한 절차 속에서 세계를 새롭게 사유하고 또 만들어가는 과정. 과정적 사유의 흐름과 절차들은 시쓰기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진숙 kkamsse@hanmail.net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평론집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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