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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의 횡설수설] '정도전'은 어떻게 사극의 '좋은 예'가 됐을까 본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5. 30.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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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의 횡설수설] '정도전'은 어떻게 사극의 '좋은 예'가 됐을까

출처 enews24 | 작성 이동현 기자 | 입력 2014.05.30 08:04 | 수정 2014.05.3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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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24 이동현 기자]

웰메이드(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항상 재미있는 드라마와 일치하진 않는다. 만듦새는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지만 흥미 요소가 부족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흥미진진하지만 완성도는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웰메이드에 재미까지 모두 갖추면 '좋은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오래 남는다.

사극은 좀 더 까다롭다. 웰메이드와 재미 요소가 병행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두 가지를 모두 갖추더라도 반드시 '좋은 사극'으로 평가되는 건 아니다. 사극은 이야기의 근본적인 기반이 '역사적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충실한 역사 고증 여부 또한 '좋은 사극'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가 된다.

아무리 잘 만들어지고 재미있더라도 역사를 외면하면 좋은 사극으로 평가되지 못한다. 비근한 사례가 MBC '기황후'다. 하지원 지창욱 전국환 등의 호연과 흥미진진한 전개로 인기를 모았지만, 역사를 완전히 도외시해 끊임없이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재미있는 드라마였지만, 웰메이드에는 다소 미흡했고, 좋은 사극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역사 고증에만 지나치게 몰입하면 드라마틱한 요소를 잃은 채 다큐멘터리가 돼버린다. 역시 좋은 사극으로 평가되기 힘들다. MBC '대장금' '허준' 등을 연출해 사극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이병훈 PD는 "사극은 기본적으로 철저한 역사 고증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전개에 어울리게 조합하고 재해석해 극적인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좋은 사극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들려줬다.

그런 의미에서 KBS1 '정도전'은 좋은 사극으로 분류될 만한 작품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 극적인 재미도 풍성하다. '신계(神界)'에 진입한 듯한 배우들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내고 만듦새 또한 흠잡을 데 없다. 이 정도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풀어가는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점에서 좋은 사극으로 가치를 높인다.

'정도전'은 고려말기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다루는 사극이다. 공민왕이 암살당해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뒤 서서히 고려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인임(박영규) 최영(서인석) 이색(박지일) 정몽주(임호) 정도전(조재현) 등 정치 고수들이 사직을 쥐고 흔드는 모습과 유명무실한 국왕들을 대비시키며 저물어가는 고려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

사실 고려말기와 조선초기는 사극에서 무수히 다뤄졌던 시기다. 다만 대부분 조선 건국에 집중했다. 태조 이성계가 더 이상 가능성 없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 포커스가 모아지곤 했다. 이성계는 난세의 영웅으로 묘사됐다. 영웅이 되기까지 성장기는 가장 무난한 사극의 성공 공식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희망을 부각시키기 위해 구시대 인물은 반동으로 치부됐다.

만일 '정도전' 역시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초점을 맞췄다면 그저 그런 작품이 됐을 수도 있다. 요즘 전개처럼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며 이성계에 집중했다면 자칫 웰메이드 역사 다큐멘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정도전'은 정반대의 모습, 건국이 아닌 멸망을 조명하며 역사를 새롭게 보여줬다. 고려 멸망의 과정은 살아있는 역사 속 인물의 활약 속에 더욱 극적으로 펼쳐졌다. 역발상의 성공이었다.

'멸망'이라 하면 '패배주의'를 떠올리게 된다. 세기말의 음울함과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할 것으로 여겨진다. 사극이 주로 건국을 조명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정도전'이 보여주는 고려 멸망의 과정은 치열하고 역동적이다. 조선 건국 세력과 고려 수호 세력이 엎치락뒤치락 활기차게 정치력을 펼쳐보이며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패배주의적 정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도전'이 좋은 사극으로 평가될 만한 또 한가지는 현실 정치와 절묘하게 맞닿아 있는 점이다. 극중 정치인들의 철학과 행태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상과 고스란히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인임에서 최영을 거쳐 이색 그리고 정몽주가 득세하고 몰락하는 과정은 오늘날의 정치사에서도 충분히 개연성 있게 다가온다.

특히 작품 초반부를 주도했던 '정치 10단' 이인임의 한마디 한마디는 정치의 본질을 꿰뚫었다. "정치하는 사람의 허리와 무릎은 유연할수록 좋은 것이오", "의혹은 궁금할 때가 아니라 감당할 능력이 있을 때 제기하는 것이오" 등의 대사는 현시대 정치인들에게 금과옥조가 될 만했다. 최영의 우직한 추진력, 이색의 고지식한 정도 정치, 정몽주의 충정, 정도전의 현실 감각 등 극중 인물들이 보여준 정치는 오늘날에도 거울이 되기에 충분했다.

근래 들어 인문학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역사학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발전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학문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사극의 의미에도 이 같은 역사학의 가치가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정도전'은 좋은 사극이다. 역사적 사실에서 극적인 재미를 만들어내는 것 이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의 행간에 숨겨진 가치를 재해석해 21세기 대한민국에 투영하도록 하고 있다. 재미와 완성도 이상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다.

'정도전'은 재미있다. '사극 어벤져스'라 불릴 정도로 극중 캐릭터들의 개성과 매력도 살아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역대 최고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사극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려 보이는 방식에서 이미 훌륭한 사극이다. '정도전'이 인정 받아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동현 기자 kulkuri7@enews24.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