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밥 -장석주/ 설태수/박복영/나태주/김나영/채명석/임명석/신지혜/나문석...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7. 1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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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귀 떨어진 개다리 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먹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발을 들여 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 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시집『어둠에 바친다』(청하,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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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태수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밥.
몸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밥.
뜨신 밥 앞에서는
흉악한 도적도 몽둥이를 내려놓는다.
대처에서 떠돌다 온 아들에게
노모는 밥을 수북이 담아 준다.
‘밥’이란 말만 들어도
뇌세포는 벌써 들썩거린다.
밥을 능가하는 언어는 없다.
밥 차려주는 사람만큼
숭고한 성자도 없다.
저승길 떠나는 망자 입엔
물 적신 쌀 한 숟가락.
그 한 숟가락 다 녹을 때까진
천사도 악마도 범접하지 못한다.
이승 저승 다 합해도
밥보다 힘 센 것은 없다.

 


 

―『유심』(2013. 5)
―시집『말씀은 목마르다』(시와세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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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영

 


저 유모차는 밥그릇이다

기역자로 꺾인 할멈의 허리가 미는 밥그릇에

삐뚤삐뚤 쌓인 종이박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출렁이는 생계

흔들리는 밥알이 흘러내릴까

느린 걸음은 조심스럽다

더딘 발자국을 따라 쏟아지는 햇살이

밥그릇에 담긴 채 출렁거린다

햇살에 말아놓은 종이밥이 차오르는 동안

환해지는 새벽이 아직 차가운 듯

밥그릇을 꽉, 쥔 닭발손마저 시럽다

찬바람이

굵은 주름뿐인 얼굴을 헹궈내며 안쓰러운 듯

고봉밥을 밀어준다

행여 흘릴까 밥그릇을 따라

검은 개가 그림자 속으로 숨어든다

한 끼가 멀어져간다

 

 


ㅡ시집『눈물의 멀미』(문학의전당,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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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집에 있을 때 밥을 많이 먹지 않는 사람도
집을 나서기만 하면 밥을 많이 먹는 버릇이 있다
어쩌면 외로움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밥을
많이 먹게 하는지도 모르는 일


밥은 또 하나의 집이다.

 

 

 

―월간『좋은 생각』(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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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결혼하고 살면서 밥 먹듯이 듣고 사는 말,
밥!
아이 하나 둘 생기면서
엄마 다음으로 자주 듣고 사는 말,
한 번쯤 건너뛰어도 될 만한 때도 어김없이
내 뒤통수에다 대고
밥!
때로는 엄마는 거두절미하고
''엄마=밥' 으로 통하는 동의이의어
나를 옭아매는 지긋지긋한 쇠힘줄 같은
나만 보면, 밥! 밥! 밥! 밥!
그래, 알고 보면 나는 너희들 밥줄이지
탯줄 끝에 붙어있던 너희들 밥이었지
친정 엄마 만나면 밥 생각부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버릇
나도 부인 못하지
누대에 걸친 아슴아슴한 탯줄의 기억이
입안 깊숙이 숟가락 바통 물려주는
뜨끈뜨끈한 계보
밥!

 

 


―시집『수작』(애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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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바―압하고 말해보라

톱니처럼 어금니가 꽉 물릴 것이다

어금니 사이로

'밥'하고 말할 때마다 물이 고인다

고인 물은 밥알이 으깨져 나오는 것처럼 끈적하다

밥은,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으깨져

허기진 배를 채워준다

'밥'하고 말하는 순간, 입 안에 차려지는 소박한 밥상

어미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듯

먹고 먹어도 젖꼭지를 내미는, 그 한없는 모성애

'밥'하고 말할 때마다 제 몸을 으깨는 밥알

소리 없이 자신을 으깨는 것

가슴에 눈물이 고이는 것은

수 없는 그리움이 밥알처럼 으깨지기 때문이다

 

 

 

―시집『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문학의전당,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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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석

 

 

밥이란 말처럼 단호한 말은 없다

한번 말을 뱉으면 입을 꼭 다물어야 한다

입을 벌려 말을 하면 밥이란 말은 밖으로 다 새어나간다

입에서 새어나간 것은 밥이 되지 않으므로

공손히 입술을 다물어야 밥이란 뜻이 완성된다

 

밥을 먹을 때는 밥이란 말을 하듯 공손히 먹어야 한다

고기처럼 이빨로 뜯어 먹어서도 안 되고

물을 마시듯 꿀꺽꿀꺽 삼켜서도 안 된다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밥을 잘 먹는 일이다

밥 속에 삶의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이다

 

 

 

―시집 『고래발자국』(2009, 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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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밥은 먹었느냐
사람에게 이처럼 따뜻한 말 또 있는가


밥에도 온기와 냉기가 있다는 것
밥은 먹었느냐 라는 말에 얼음장 풀리는 소리
팍팍한 영혼에 끓어 넘치는 흰 밥물처럼 퍼지는 훈기


배곯아 굶어죽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느 죽음보다도 가장 서럽고 처절하다는 거
나 어릴 때 밥 굶어 하늘 노랗게 가물거릴 때 알았다
오만한 권력과 완장 같은 명예도 아니고 오직
누군가의 단 한 끼 따뜻한 밥 같은 사람 되어야 한다는 거


무엇보다 이 지상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것은
인두겁 쓴 강자가 약자의 밥그릇 무참히 빼앗아 먹는 것이다


먹기 위해 사는 것과 살기 위해 먹는 것은 둘 다 옳다
목숨들에게 가장 신성한 의식인
밥 먹기에 대해 누가 이렇다 할 운을 뗄 것인가


공원 한 귀퉁이, 우두커니 앉아있는 이에게도
연못가 거닐다 생각난 듯 솟구치는 청둥오리에게도
문득 새까만 눈 마주친 다람쥐에게도 나는 묻는다


오늘
밥들은 먹었느냐

 


―계간『다층』(2008.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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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문석

 

 

정신이 혼탁해지면 나는
밥을 굶는다


한때는 배 터져 죽는 게 소원인 적도 있지만


사람의 혼을 맑게 해주는 방법 중에
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진
밥에 대한 생각이 깊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벼운 몸으로
시집을 읽는다


알알이 영근 시어들 속에
내게는 술이 되어버린 밥이 있었다

 

 


ㅡ시집 「정삼각형 가족」(시와에세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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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밥

 

함민복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1996년>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8』(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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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지밥


이병률


 

봉지밥을 싸던 시절이 있었지요
담을 데가 없던 시절이지요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넣고
가슴팍에도 품었지만
어떻게든 식는 밥이었지요


남몰래 먹느라 까실했으나
잘 뭉쳐 당당히 먹으면 힘도 되는 밥이었지요


고파서 손이 가는 것이 있지요
사랑이지요
담을 데가 없어 봉지에 담지요
담아도 종일 불안을 들고 다니는 것 같지요


눌리면 터지고
비우지 않으면 시금시금 변해버리는
이래저래 안쓰러운 형편이지요


밥풀을 떼어먹느라 뒤집은 봉지
그 안쪽을 받치고 있는 손바닥은
사랑을 다 발라낸 뼈처럼
도무지 알 길 없다는 표정이지요


더 비우거나 채워야 할 부피룰
폭설이 닥치더라도 고프게 받으라는 이 요구를
마지막까지 봉지는 담고 있는지요


바람이 봉지를 채 간다고
사랑 하나 치웠다 할 수 있는지요


밥을 채운 듯 부풀어
봉지를 들고 가는
저 바람은 누군지요


  


―천양희|장석남 외 지음『시, 사랑에 빠지다』(현대문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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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밥
 

유홍준

 


공사장 모래더미에

삽 한 자루가

푹,

 

꽂혀있다 제삿밥에 꽂아놓은 숟가락처럼 푹,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느라 지친 귀신처럼

늙은 인부가 그 앞에 앉아 쉬고 있다

 

아무도 저 저승밥 앞에 절할 사람 없고

아무도 저 씨멘트라는 독한 양념 비벼 먹어줄 사람없다

 

모래밥도 먹어야 할 사람이 먹는다

모래밥도 먹어본 사람만이 먹는다

 

늙은 인부 홀로 저 모래밥 다 비벼먹고 저승길 간다

 

 

―시집『저녁의 슬하』(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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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이 쓰다


  정끝별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밥이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버린 선배의 안
  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꼭 꼭 씹어 삼키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피어라 석유!』(현대문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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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속에 생生과 사死가 있다


박무웅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온몸이 날카롭게 진화한다

눈빛이 칼날이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달려간다

한 끼의 밥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득한

낭떠러지로 밀린다


양계장의 닭들이 달려든다

모이 앞에 사력을 다한다

후려치는 막대기에 모가지가 두 번 세 번 감겼다 풀려도

다시 달려드는 식욕


한 끼의 밥에 머리를 굽힌다
부끄러운 손을 잡는다


체증을 줄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밥의 의미를 다시 적는다

 

밥이 내 인생을 먹는다

 

 


―계간『예술가』(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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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자본주의
밥을 나누는 노래


고정희

 


함께 밥을 나누세 다정하게 나누세
함께 밥을 나누세 즐겁게 나누세
함께 밥을 나누세 마주보며 나누세

 

나누는 밥 나누는 기쁨
이 밥으로 힘을 내고 평등세상 건설하세
이 밥으로 다리삼아 해방세상 이룩하세


 

 

―고정희 유고시집遺稿詩集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비평사, 1992)
―고정희 지음『고정희 시전집 세트 2』(또하나의문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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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법

 

 정호승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때때로

 바람 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어떻게 밥을 먹을 것인가. 어떻게 길을 걸을 것인가.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편지를 쓰고, 어떻게 웃고, 어떻게 먼 들판

 까지 걸어갈 것인가.

 햇살 맑고 투명한 아침세상의 모든 지붕들 위에 쏟아지는 햇살을

 보면 난해 하기만 한 생의 순간들이 따스해진다.

 좋은 아침. 이 길 어디에선가 가난하지만 따뜻하고 꿈 많은 밥을 먹는 생각을 하자.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지언정 남의 쌀독을 기웃거리거나 남의 밥

 을 빼앗을 생각일랑 말자. 조금씩 지닌 것도 서로 나누며 많이 고생

 한 이웃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바다 건너온 어려운 살붙이 형제

 들의 밥상 위에도 희고 눈부신 밥 한 그릇을 놓자.

 

 

 

―곽재구 엮음『우리가 별들 사이를 여행할 때』(이가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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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밥


임영조

 

 

외딴 섬에 홀로 앉아 밥을 먹는다
동태찌개 백반 일인분에 삼천오백 원
호박나물 도라지무침 김치 몇 조각
깻잎장아찌 몇 장을 곁들인 오찬이다


먹기 위해 사는가, 묻지 마라
누구나 때가 되면 먹는다
살기 위해 먹는가, 어쨌거나
밥은 산 자의 몫이므로 먹는다
빈둥빈둥 한나절을 보내도
나는 또 욕먹듯 밥을 먹는다


은행에서 명퇴한 동창생은 말한다
(위로인지 조롱인지 부럽다는 듯)
시 쓰는 너는 밥값한다고
생산적인 일을 해서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이 세상 누구를 위해
뜨끈한 밥이 돼본 적 없다
누구의 가슴을 덥혀줄 숟갈은커녕
밥도 안 되고 돈도 안 되는
시 한 줄도 못 쓰고 밥을 먹다니!


유일한 친구 보세란(報歲蘭) 한 분이
유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서 먹는 밥은 왜
거저먹는 잿밥처럼 목이 메는가
먹어도 우울하고 배가 고픈가
반추하며 혼자 먹는 밥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5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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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밥

 

송수권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계간『현대문학』(2006,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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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밥


오인태

 

 
찬밥 한 덩어리도
뻘건 희망 한 조각씩
척척 걸쳐 뜨겁게
나눠먹던 때가 있었다


채 채워지기도 전에
짐짓 부른 체 서로 먼저
숟가락을 양보하며
남의 입에 들어가는 밥에
내 배가 불러지며
힘이 솟던 때가 있었다


밥을 같이 한다는 건
삶을 같이 한다는 것


이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누구도 삶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다


나눌 희망도, 서로
힘 돋워 함께 할 삶도 없이
단지 배만 채우기 위해
혼자 밥 먹는 세상


밥맛 없다
참, 살맛 없다

 

 


―시집『혼자 먹는 밥』(살림터,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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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 속에는

 
신혜경


 

밥 한 그릇 담는 일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엄숙한 기도의 한순간이다

 

김 오르는 밥 한 주먹씩 옮길 때마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대를 이어 속으로 외던

주술 같은 수많은 말들......

 

밥그릇엔 밥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부터

밥그릇 채울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사려 담는다

 

내일이면 떠날 너에게

갓 지은 밥 내미는 손 가늘게 떨리는 것은

밥 한 그릇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시집『달전을 부치다』(문학수첩, 20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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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대낮

          

나태주

 

 

잘 퍼진 쌀밥이 고봉으로 열렸다
이팝나무 가지, 가지 위
구수한 조밥이 대접으로 담겼다
조팝나무 가지, 가지 위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그쟈?
누나가 말했다
우리는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아직 못 먹었잖아!


한참 만에 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 새들은 저렇게 울어쌓고
지랄하고 그런다냐? 그것은
꾀꼬리 쌍으로 우는 환한 대낮이었다.

 

 

 
 ―시집『시인들의 나라』(서정시학,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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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 꽃 피었다

 

김진경

 

 

1
촛불 연기처럼 꺼져가던 어머니


"바―압?"
마지막 눈길을 주며
또 밥 차려주러
부스럭부스럭 윗몸을 일으키시다


마지막 밥 한 그릇
끝내 못 차려주고 떠나는 게
서운한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신다.

 

2
그 눈물
툭 떨어져 뿌리에 닿았는지
이팝나무 한 그루
먼 곳에서 몸 일으킨다.


먼 세상에서 이켠으로
가까스로 가지 뻗어

경계를 찢는지


밥알같이 하얀 꽃 가득 피었다.
 

 


―계간『창작과비평』(200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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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의 자서전


이성훈

 

 

전집의 표지처럼 꽂혀있는
비석의 글꼴 바랜 자서전을 빼들어
책장에 드리운 일주문을 연다
목차에 찍힌 발자취를 훑어
기억으로 풀리는 페이지를 넘긴다
음절 한 조각 문장의 뼈 한 마디
골격이 작은 체구로 맞춰지고
행간은 새살로 돋아난다
환생하신 어머니,
밭일에서 흘린 땀을 들일 새도 없이
불을 지펴 지은 밥상이 차려진다
별무리를 숟가락질하는 달빛이
안마당을 두루 비추는 배경 속에
단란한 식사 풍경이 펼쳐진다
식구들의 밥을 푸다보면
늘 모자람에 물을 말아 드시는
어머니의 숨긴 허기가 읽혀진다
남루한 살림살이에 살림의 세월
밥 한 사발 소복한 무덤에서
밥알 같은 글자를 꼭꼭 씹어 삼킨다
그리움으로 휑한 늑골 한쪽에
퍼즐을 맞추는 자서전의 종결어미,
눈시울에 알알이 차오르는
눈물방울의 포만감에 젖어
모서리 닳은 뒷장을 덮는다
한평생 갓 지은 밥이셨던
어머니의 사랑을 대출받아
청계시립공원묘지를 내려오는
몸속 닦인 길이 환하게 열린다


 

 

《제7회 수주문학상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