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시에게 쓰는 시 모음 - (목록과 시) 김종삼/김상옥/천양희/조정권/서정주 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7. 2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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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게 쓰는 시

 

 

김종삼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상옥 - 제기(祭器)

천양희 - 시인이 되려면

조정권 - 은둔지

서정주 - 詩論

두  보 - 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강물가의 단상)

홍해리 - 망망(茫茫) ― 나의 詩

윤  호 - 시를 위하여 8

이상화 - 시인에게

서정춘 - 시와 퇴고 ㅡ미당 풍으로

정현종 - 시창작 교실

김종해 - 시인 선서

김남조 - 나의 시에게 5

김후란 - 시(詩)의 집

정희성 - 곰삭은 젓갈 같은

문효치 - 시

오탁번 - 시인 1

정진규 - 심봉사의 외동딸

이재무 - 펜에 대하여

송수권 -  허공에 거적을 펴다

이상국 - 남루에 대하여

이창기 - 시의 시대

이성복 - 시에 대한 각서

나태주 - 시에게 부탁함 - 시에게 쓰는 시

이건청 - 쇠똥구리 시인 - 시에게 쓰는 시

이우걸 - 시작(詩作)- 시에게 쓰는 시

구  상 - 시법(詩法 - 시에게 쓰는 시
허윤정 - 꽃이여 작은 꽃이여 

공광규 - 도굴꾼 - 시에게 쓰는 시

김윤희 - 밀회

최영철 - 시인

박희진 - 시의 행간에는

이  경 - 멀고 푸른 길

이시영 - 내가 언제 

변종태 - 시집으로 모기를 잡다

김명리 - 시라는 극약

배한봉 -  세상은 시에 밥 먹여줄 의무가 있다

이창기 - 시의 시대

박현수 - 시작법을 위한 기도

오봉옥 -

정현종 - , 부질없는 시

함기석 - 어떤 시집

심보선 - 첫 줄

김형영 -

최금녀 - 접신接神한다

김형영 -시를 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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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월간『유심』(201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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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祭器)

 

김상옥 
 

 

굽 높은
祭器.


神前에
제물을 받들어
올리는―


굽 높은
祭器.


詩도 받들면
문자에
매이지 않는다.


굽 높은
祭器!
 

 

 

―월간『유심』(201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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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되려면
 

천양희  
  


시인이 되려면
새벽하늘의 견명성(見明星)같이
밤에도 자지 않는 새같이
잘 때에도 눈뜨고 자는 물고기같이
몸 안에 얼음세포를 가진 나무같이
첫 꽃을 피우려고 25년 기다리는 사막만년청풀같이
1킬로그램의 꿀을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가는 벌같이
성충이 되려고 25번 허물 벗는 하루살이같이
얼음구멍을 찾는 돌고래같이
하루에도 70만번씩 철썩이는 파도같이


제 스스로를 부르며 울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
시인이 되는 것이다

 


*백석의 시〈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월간『유심』(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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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지


조정권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ㅡ월간『유심』(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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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論

 

서정주 
 
 
바다 속에서 전복 따파는 濟州海女도
제일 좋은 건 님 오시는 날 따다 주려고
물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 둔단다.
詩의 전복도 제일 좋은 건 거기 두어라.
다 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
바다에 두고 바다바래여 詩人인 것을…….

 

 


ㅡ월간『유심』(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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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강물가의 단상)


두보  


 
爲人性僻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
老去詩篇渾漫興   春來花鳥莫深愁
新添水檻供垂釣   故著浮?替入舟
焉得思如陶謝手   令渠述作與同遊


내 사람됨이 아름다운 시구를 탐하는 성벽이라
다른 이 놀랠 시 못 지으면 죽어도 쉴 수 없도다
늙어갈수록 시문의 흥겨움만 질펀하게 늘어지니
봄 되어 꽃과 새 보아도 깊이 슬퍼하지 않는도다
물가에 난간까지 새로 덧대 낚싯대 드리우고
일부러 뗏목 띄워 배 삼아 타려 하는도다
어찌해야 솜씨가 도연명이나 사영운 같아
그들과 더불어 글 지으며 노닐 수 있으랴

 

 


ㅡ월간『유심』(201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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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茫茫)

― 나의 詩

 

홍해리 
 

 

 

관통하는

 

총알이 아니라

 

네 가슴 한복판에 꽂혀

 

한평생 푸르르르 떠는

 

금빛 화살이고 싶다

 

나의 詩는.
 

 


ㅡ월간『유심』(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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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위하여·8

 

윤효 

 

 

접시 위에
등뼈와
가시만 
추려내시던
 

잇몸으로도
등뼈와
가시만
용케도
발라내시던


어머니같이
 

 


ㅡ월간『유심』(201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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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이상화 
 


한 편의 시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
시인아 너의 존재가
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질 것이다.
가뭄 든 논에는 청개구리의 울음이 있어야 하듯─


새 세계란 속에서도
마음과 몸이 갈려 사는 줄풍류만 나와 보아라.
시인아 너의 목숨은
진저리나는 절름발이 노릇을 아직도 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일식된 해가 돋으면 뭣하며 진들 어떠랴.


시인아 너의 영광은
미친 개꼬리도 밟는 어린애의 짬 없는 그 마음이 되어
밤이라도 낮이라도
새 세계를 낳으려 손댄 자국이 시가 될 때에─ 있다.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를 보아라.
 

 

 

ㅡ월간『유심』(201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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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퇴고
ㅡ미당 풍으로


서정춘
 

 
시여, 가을날 기러기는 높고 푸른 하늘만 보면

 

거기 반드시 시 한 줄을 쓰면서 앞줄 고쳐 묻고

 

뒷줄 따라 묻고 여러 번씩 읽어가는 글공부 소리를 잘도나 들려준 적 있었나니
 

 

 

ㅡ월간『유심』(201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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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 교실


정현종 


 

내 소리도 가끔은 쓸 만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거야
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
냅다 한번 뛰어보는 게 나을걸
뛰다가 넘어져 보고
넘어져서 피가 나 보는 게 훨씬 낫지
가령 ‘전망’이라는 말, 언뜻
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보다는
나무 위엘 올라가 보란 말야, 올라가서
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
내 머뭇거리는 소리보다는
어디 냇물에 가서 산 고기 한 마리를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
확실히 손에 쥐어보란 말야
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
야음을 틈타 참외서리를 하든지
자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어
팔딱이는 심장 따뜻한 체온을
손바닥에 느껴보란 말이지
그게 세계의 깊이이니
선생 얼굴보다는
애인과 입을 맞추며
푸른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행동 속에 녹아 버리든지
그래 굴신자재(屈伸自在)의 공기가 되어 푸르름이 되어
교실 창문을 흔들거나 장천(長天)에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든지,
하여간 사람의 몰골이되
쓸데없는 사람이 되어라
장자(莊子)에 막지무용지용(莫知無用之用)이라
쓸데없는 것의 쓸데 있음
적어도 쓸데없는 투신(投身)과도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가거라
너 자신이되
내가 모든 사람이니
불가피한 사랑의 시작
불가피한 슬픔의 시작
두루 곤두박질하는 웃음의 시작
그리하여 네가 만져본
꽃과 피와 나무와 물고기와 참외와 애인과 푸른 하늘이
네 살에서 피어나고 피에서 헤엄치며
몸은 멍들고 숨결은 날아올라
살아 있는 거와 한몸으로 낳은 푸른 하늘로
세상 위에 밤낮 퍼져 있거라.
 


 

―월간『유심』(201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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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선서


김종해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시詩이며, 거짓말 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 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ㅡ월간『유심』(2013. 12)
―시집『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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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에게·5

 

김남조 
 
 
출타한 네가
백 년 이백 년에도 귀가하지 않아
내 순정의 기다림은
기다림의 혼령 되어
세월의 분말을 가르며 날아갔다


달이 한참거리의
흙을 굽어보듯 하는 눈짓,
시여 이제 돌아왔는가
그 사이 실을 꿴 바늘자국을 남기며
어떤 심각한 공부로
동서남북을 떠돌았기에
이리 초췌한 모습인가


하여 이번에도
나는 용서할 입장 그 아니고
용서받을 처지라고
기죽어 머리 끄득이느니
시여 한평생 나를
이기기만 하는 시여
 

 

 

 ㅡ월간『유심』(201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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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의 집

 

김후란 

 

 

어느 때부터인가 연필이
좋아졌다
백지에 언어의 집을 짓는다
짓다가 잘못 세운 기둥을 빼내어
다시 받쳐놓고
저엉 성에 안 차면
서가래도 바꾼다
그렇게 연필로 세운 집
고치고 다듬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잠들지 못하게 눈 비비게 하는
연필로 집 짓는 일이 좋았다
작은 기와집 한 채
섬돌 반듯하게 자리 잡아주고
흙 묻은 고무신 깨끗이 씻어놓고.


 

 

―월간『유심』(20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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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삭은 젓갈 같은


정희성
 


아리고 쓰린 상처

소금에 절여두고

슬픔 몰래

곰삭은 젓갈 같은

시나 한수 지었으면

짭짤하고 쌉싸름한

황석어나 멸치 젓갈

노여움 몰래

가시도 삭아내린

시나 한수 지었으면

 

 

 
―월간『유심』(2014. 4)
―시집『그리운 나무』(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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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치

 


생각지도 못했던
먼 먼 아리랑이 너머
상상의 세계에서
날아와 가슴속에 내려앉고
이내 하얀 뿌리를 내려


가슴의 진액을 빨아들이며
잎과 꽃을 피우고
아를 허무로 앓게 하고
몸져 눕게 하는
저것


이름도 형체도
분명치 않는
미지수의 문제아.

 

 


―월간『유심』(201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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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1


오탁번

 


시인아
넌 사랑하는 것도 배울까?
다 쓴 치약 짜듯
영혼은 그렇게 쥐어짜는 게 아냐
넌 숨 쉬는 것도 배울까?
달이 질 때
그냥 지듯
억새가 제 몸을 하얗게 버리는 것처럼
소멸하는 소리를 들을 때
한 편의 시는
저 혼자 오롯하다
따로 할 말 없는
눈썹의 말 한 마디
잘 가라
흔드는 흰 손 안에서
한 편의 시는
저 혼자 잠든다

 

 


―월간『유심』(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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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봉사의 외동딸


  정진규

 


  젖동냥을 다니는 나는 봉사가 되어야 한다 더욱 심봉사가 되어야 한다 내 시는 심봉사의 외동딸이다 봉사의 눈으로 보아야만 보인다 뜬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 아니다 봉사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갇힌 어두움의 풍요다 그걸 열어내는 일이다 별들의 바탕이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나는 시에게 젖을 멕인다 별들에게 젖을 멕여야 한다 어두움을 멕여야 한다 어두움이 젖이다 젖동냥을 다니고 있다 심봉사가 되어 있다 내 시는 심봉사의 외동딸이다 어두움의 외동딸이다 시여, 빛의 공양미 삼백석을 빚진 나의 외동딸이여, 연꽃 만나러 가는** 심봉사의 외동딸이여, 별빛 만나러 가는 나의 외동딸이여

 

 

*정진규 <별>
**미당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월간『유심』(201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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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에 대하여


이재무

 

 

마른 땅 파 들어가는 삽이여,


묵은 논 갈아엎는 쟁기여,


고랑 타고 앉아 풀 매는 호미여,


돌멩이에 날(刀) 찍혀 우는 쇠스랑이여,


이마에 한 톨 두 톨 돋는 땀이여,


경작의 노고보다 헐한 소출이여,

 

 

 

―월간『유심』(2014년 9월호)
―시집『경쾌한 유랑』(문학과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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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거적을 펴다


송수권

 

 

허공에 거적을 펴고


시를 써온 것이 몇 년인가


햇빛 오고 바람 불어 좋은 날


새로 핀 벚꽃


꽃눈보라 왁자히 내리는데


내 눈에선 자꼬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이는 지상에 발을 대고


걸어가는 때문


죽는 날까지도 그러리라

 

 


―월간『유심』(201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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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루에 대하여


이상국

 


지난 해 봄 시집을 묶으며


몸을 전부 비웠는데


아직 시가 남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한때 그가 찾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에게 속을 다 내보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거나


어쩌다 저 맘에 드는 생각을 해내고는


길 가다 혼자 웃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생은


날마다 상처를 밀치고 올라오는 새살 같은데


나의 시는 남루와 같아서


어느 날 깊은 산속에 데리고 가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오고 싶다

 

 


―계간『계간문예』(2013. 여름)
―월간『유심』(2014. 11. -시에게 쓰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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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지


조정권

 

 

시는 무신론자가 만든 종교.
신 없는 성당,
외로움의 성전,
언어는
시름시름 자란
외로움과 사귀다가 무성히 큰 허무를 만든다.
외로움은 시인들의 은둔지,
외로움은 신성한 성당,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다.
시인은 1인 교주이자
그 자신이 1인 신도,
시는 신이 없는 종교,
그 속에서 독생獨生하는 언어.
시은市隱*하는 언어
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

 


 *세속 속에서의 운둔.

 

 


-시집『고요로의 초대』(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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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 대한 각서


  이성복
 

 

  고독은 명절 다음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재와 삭은 탱자나무 가시, 고독은 녹슬어 헛도는 나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아파트 담장 아래 천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 공, 고독은 깊이와 넓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 지닌 것들 바로 곁에 있다 종이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연필로 그리면 남는 공간, 손은 팔과 이어져 있기에, 그림은 닫히지 않는다 고독이 흘러드는 것도 그런 곳이다

 

 

 

-시집『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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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게 부탁함

 

나태주

 

 

그 시절 힘들었을 때

살며시 이마 위 꽃잎으로 얹히고

어깨 위에 부드러운 손길로 왔던 누군가의 시

그로 하여 그래도 내가 숨 쉴 만했고

가던 걸음 이을 수 있었던 것처럼

 

가라! 이제는 나의 시에게 말한다

어디든 가서 내가 모르는 사람

그날의 나처럼 힘든 사람에게

부드러운 손길이 되고 가벼운 꽃잎이 되라

 

그리하여 뒷날

나의 시로 하여 그래도 견디기 힘든 날

숨 쉴 만했다고 견딜 만했다고

그래서 조금은 좋았다고 고백하게 하라.

 

 

 

월간유심(201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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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똥구리 시인

 

이건청

 

 

쇠똥구리가

소나 말들이 남기고 간

그것들의 똥을 둥글게 말아

뒷발로 굴리고 간다.

 

소나 말들은 풀을 먹고

똥을 버리고 가지만

쇠똥구리는

소나 말들이 버리고 간

그것에다가

길을 만들고 꿈을 묻는다.

 

 

 

월간유심(2015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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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詩作)- 시에게 쓰는 시

 

이우걸

 

 

아직도 못 다 새긴

자화상이 있어

 

 

잦아가는 육신에 기름을

붓고

 

 

밤마다 나를 태워서

 

 

더듬더듬 너를 그린다

 

 

 

월간유심(201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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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법(詩法) - 시에게 쓰는 시

 

구상

 

 

사과를 그리다 보면

배가 되고

배를 그리다 보면

사과가 된다

 

짓궂은 생각에서

사과를 그리려고

배를 그렸더니

모과가 되었다

 

외양도 이렇듯

어긋나는데

사과와 배의 속살이나

그 맛은 어림도 없다

 

그 언제나 사과가

사과로 그려지고

배가 배로 그려지고

그 사과와 배의 속살과 맛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까

 

 

 

월간유심(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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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여 작은 꽃이여 (시에게 쓰는 시)

 

허윤정

 

 

아무래도

시라는 것은

키를 낮추는 일이다

 

몸도 낮추고

울음도 낮추고

바람 앞에 서보는 일이다

 

너도 가고

세월도

보내고

 

별빛 아래 앉은

꽃이여

작은 꽃이여

 

 

 

월간유심(2015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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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꾼 - 시에게 쓰는 시

 

공광규

 

 

상해박물관이 소장한 전국시대 초나라 죽간을 해제한

공자시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떠오른 소감

도굴꾼님, 감사합니다

 

도굴꾼이 없었다면

진흙이 덕지덕지한 초나라 귀족의 무덤 속에서

이 죽간이 나와 햇빛을 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

 

그러면서 시인도 도굴꾼이라는 생각

당국의 허가 없이 합법적 절차 없이

당신의 허락도 없이 마음을 훔쳐 햇살을 보게 하는

 

당신은 마음을 도굴당한 적이 있나요?

죽간처럼 햇볕에 나와 누구에겐가 한 줄이라도 읽힌 적이

그렇더라도 시인이 다녀간 것이니 안심하시길

 

 

 

월간유심(2015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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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 시에게 쓰는 시

 

김윤희

 

 

다 나가고 없는 집에

용케 그가 알고 온다

 

문밖 망보고 있던

샛서방같이, 열린 뒷문으로

엉큼하고 재바르게 문 걸어 잠그고

다가앉는다

은끈짜 돌쇠

밀어내지 못하도록 사나이같이

팔뚝으로 제압한다

이런 밀회 퍽

자극적이다 시 그가 오는

날이다

 

 

 

월간유심(2015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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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시에게 쓰는 시

 

최영철

 

 

여름이 채 가기도 전에 매미는

제 외로움을 온 천하에 외치고 다녔네

해 밝으면 곧 날아갈 슬픔

비는 너무 많은 눈물로 뿌리고 다녔네

아무데나 짖어대는 저 개

사랑이 궁하기로서니

그렇게 마구 꼬리를 흔들 일은 아니었네

그 바람에 새는

가지와 가지 사이를 너무 빨리 지나쳐 왔네

저녁이 오기도 전에 바위는

서둘러 제 몸을 닫아버렸네

잡았던 손길 뿌리치고 물은 아래로

저 아래로 한정 없이 흘러가고 있네

천둥의 잘못은 너무 큰 소리로

제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은 것

시인의 잘못은 제 가난을 밑천으로

너무 많은 노래를 부른 것

 

 

 

월간유심(2015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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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행간에는

 

김희진  

 

 

시의 행과 행 사이에는 침묵이 있어요

 

몽골의 초원보다 더 광활한 공간이 있어요

 

당신과 나 사이에는 침묵이 있어요

 

그래서 들려요 별보다 더 빛나는 말들이 

 

 

 

월간유심(201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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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푸른 길

 

이경(시에게 쓰는 시)

 

 

나는 아직도 네가 부끄럽다

네가 부끄러워 눈을 바로 볼 수 없다

그러니 시여

첫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눈썹 검은 남자처럼

너는 내게서 조금씩 더 멀리 뒷걸음치라

너에게 닿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더 오래 걸리는 길 둘러 가도록

너와 눈 맞추기 위해 더 깊이 무릎 굻도록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은

너를 만나러 가는 강물이 흐르고

너의 발등에 너의 어깨에 떨어지고 싶은 꽃들이 피고

꽃에게로 흐르는 도중에 수많은 꽃이 피고

너에게 가는 푸른 길은 멀어서 좋아

나의 뿌리가 너의 수맥에 닿아 있지 않았다면

벌써 다 타버렸을 것을

 

 

 

월간유심(2015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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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이시영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曠原광원을 거쳐 내게로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월간유심(2015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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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으로 모기를 잡다

 

   변종태
 

 

   뒤척이는 내 몸에 붙어 생피를 빨아대는 시詩란 놈, 아무리 두드려도 죽지를 않는다. 앵앵거리며 불면을 함께하는 이 놈이 언제부터 이리 내 정신의 피를 빨아먹는 것인지. 뱃속에 선홍색 피가 통통하다. 이놈을 무엇으로 죽여줘야 좋을 것인지. 키보드 위에 앉았다가 귓바퀴에서 엥엥거리다가 모니터 언저리에도 앉았다가, 손가락과 제일 멀리 있는 손등에도 앉았다가, 책꽂이 모서리에 앉아있는 저 시란 놈, 시집을 한권 빼어들고 살금살금 다가간다. 냅다 싸대기 때리듯 시집으로 놈을 후려갈겼다. 사방으로 터진 시詩의 흔적들, 책꽂이에 선연하다. 시집은 저렇게 책꽂이에 꽃피는 것인지. 퉁퉁 뿔은 시詩란 놈은 없고, 책꽂이에 빨간 꽃으로 피어난, 저 내 정신의 핏물


 

 

―『미네르바』(2013.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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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극약


김명리

 


물 없이 삼킨다
이 땅엔 처방전이 없는 시라는 극약

 

내 마음, 단 한 번도
안으로부터 열린 적 없는 창문과도 같아


어둠이, 상처가
분노가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아니라고
스스로를 도리질하는 순간이 있다


오줌 누려고 일어났으리라


어린 아들의 나뭇잎 같은 손이
숯덩이 같은 내 잠 위로


가만가만 이불을 덮어주고 있으니


눈 부셔라 눈꺼풀 속까지
아마포처럼 감겨오는 저 새벽빛


아득히 물소리 내며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끝없이 흘러내리는 물방울… 물의 방울들

 

 

 

―계간『딩아돌하』 2(012.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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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시에 밥 먹여줄 의무가 있다

 

배한봉 

 
 
몇 날 며칠 밤을 새우고서야
겨우 시 한 편 완성했다.


일찍이 선인은 칠십 년 동안
열 개의 벼루에 구멍을 내고
천 자루 붓이 다 닳았는데도
편지 쓸 글자 익히지 못했다 했는데


겨우 며칠 밤새우고
시 한 편 완성했다면 대단한 수확이지.
가령 시가 매미라면,
꿈틀꿈틀 애벌레로 땅속을 기다가
7년 뒤에야 하루 낮밤 울겠지.
그러면, 그렇잖아도 돈 안 되는 시
당장 작파하겠다고 농반진반 던졌더니


물 공부 10년 산 공부 10년에도
시인 못 됐다는 내 아는 한 독자는
시인의 하루는
매미 7년보다 긴 시간이라 한다.
시는 마음의 밥이니 좋은 시 만나면
몇 끼 굶어도 배부르다 한다.
몸은 부잔데 마음이 가난해서
이웃도 친구도 줄어드는 시대라 한다.


그런가? 단 한 사람이라도 그렇다면
세상은 시에 밥을 먹여줄 의무가 있다.
책상을 치고 책을 덮으며 일어서니
아직도 여기 저기 시인들
땀 뻘뻘 흘리며 밥 안 되는 시를 쓰는지
캄캄한 하늘, 초롱초롱 별이 기우뚱하다.

 

 


―격월간『유심』(20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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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시대

 

  이창기

 

 

   라면이 끓는 사이 냉장고에서 달걀 하나를 꺼낸다. 무정란이다. 껍데기에는 붉은 핏자국과 함께 생산일자가 찍혀 있다. 누군가 그를 낳은 것이다. 비좁은 닭장에 갇혀, 애비도 없이. 그가 누굴 닮았건, 그가 누구이건 인 마이 마인드, 인 마이 하트, 인 마이 소울을 외치면 곧장 가격표가 붙고 유통된다. 소비는 그의 약속된 미래다. 그는 완전한 무엇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날아오르기를 꿈꾸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누군가를 애끓게 사랑했던 기억도 없다. 그런데 까보면 노른자도 있다. 진짜 같다.

 


시집 착한 애인은 없다네(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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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법을 위한 기도


박현수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중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시선집『詩가오셨다』(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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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옥


 

어느 날
피투성이로 누워
가쁜 숨
몰아쉬고 있을 때
 

이름도 모를
한 천사가
제 몸을 헐어주겠다고 사뿐,
 

사뿐,
 

사뿐, 그 벌건 입속으로
걸어 들어온 뒤
다시 하늘로
총총
사라져 간 것이다
 

그 뒤 난
길에 침을 뱉거나
무단횡단을 하다가도
우뚝우뚝
걸음을 멈추곤 하였는데
 

그건 순전히
내 안의 천사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격월간『유심』(2012,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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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질없는 시

 

정현종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 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 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 한다면

시로써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시집고통의 축제(민음사, 2002)

문정희 시배달 사이버문학광장 문장(2016년 01월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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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집

 

함기석

 

 

첫 장을 열면

광활한 초원이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검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하늘엔 무늬 잃은 기린의 눈빛으로

나를 보는 낮달

지상엔 무더운 눈보라

 

끝 장을 덮으면

끝없는 우주가 보이고

글자들은 모두 유성이 되어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월간유심(2015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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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줄

 

심보선

 

 

첫 줄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써진다면

첫눈처럼 기쁠 것이다.

미래의 열광을 상상 임신한

둥근 침묵으로부터

첫 줄은 태어나리라.

연서의 첫줄과

선언문의 첫 줄.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의 첫 줄.

그것이 써진다면

첫아이처럼 기쁠 것이다.

그것이 써진다면

죽음의 반만 고심하리라.

나머지 반으로는

어떤 얼음으로도 식힐 수 없는

불의 화환을 엮으리라.  

 

 

 

 

문정희 시배달 사이버문학광장 문장(20161111)

시집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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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영

 

 

엄마 젖가슴에 안겨

옹알거리는 아기, 

 

눈을 감아도 수호천사를 만나

무슨 생각을 나누는지

연신 꽃피는 웃음,

 

거짓이라곤 눈곱만큼도 섞이지 않은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이제 막 태어나는 말,

 

좋은 시인의 시도

태어난 지 세이레쯤 된

아기 옹알이 같은

눈에 보이는 음악이어라 

 

 

 

월간현대문학(2016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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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벌기(懲罰記)

  진해령


  시는 죄의 부산물
  수상한 시절에 태어나 언감생심 시인을 꿈꾼 죄
  시 부근을 얼쩡거리며 문자를 넘본 죄
  시로 유명해지기를 감히 바란 죄
  그 울타리 안에 한번이라도 들어가려고
  밤마다 월담을 시도한 죄

  넘어지고 부러지고 전치 50주
  깁스에 용천이 따로 없다
  흘깃……이라도 좋으니 그 성총을 입기 위해
  닥치는 대로 베끼고 훔치고 발광했지만,

  생각의 정수리를 치면 뻗치는 광기
  꿈을 거꾸러뜨리고 얻은 절망의 선지
  상상의 막창 불면의 허연 사골
  거울을 부수고 기물파손 및 재물손괴에
  머리를 쥐어뜯다가 자해와 폭행에 연루되고
  무기력의 감옥에 수감되길 이십여 년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시 같은 불온한 문서를 읽고 쓰고 유포한 죄

  당신을 사문서 위조 과대망상 금지법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묵비권을 행사해선 안 되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는 당연히 없고 어쩌고저쩌고……



ㅡ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2017, 2월, VOL.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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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신接神한다


최금녀

 

 

이보耳報라는 말은
귀신이 사람 귀에다 대고
정보를 준다는 말인데
귀신의 소리라, 사전에도 없다


귀신 소리를 알아차리자면
접신해야 하고
접신하려면 아무래도
산의 심지 속을 파고 들어가
절벽 밑에 촛불을 밝히고
술도 치고
수백 번 수천 번 허리 굽혀야 하리라


물소리, 바람소리, 다 젖히고
쉿, 정보 들어올텐데
나무에 바위에 냇물에 스며 흐르던
유 불 선 천년의 향기
우주의 비밀이 들려올 것인데
그 신통한 정보
그게 바로 하늘이 내리는
이보耳報 필보筆報이겠다


시가 안 되는 날엔
지리산으로나 들어가
바위 아래 두 귀를 열어놓고
접십하고
이보耳報나 청해볼까

 


-시집『큐피드의 독화살』(종려나무,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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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다는 것

김형영


평생 영혼을 파먹고 살았다.
50년을 파먹었는데
아직도 허기가 진다.

삶의 흔적을 남기려고
영혼을 파먹는
그게 허영 때문인지
진실 때문인지 모르겠다.

번개 같은 목숨
보고 듣고 깨닫기도 전에
영혼 파먹기만 해온
욕망의 구더기여,

이제 그만 깨어 날아다오.
높이 날지 못하면 어떠랴.
멀리 가지 못하면 어떠랴.
천 날을 견뎌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라도 좋다.
날아다오 날아다오.

번데기에서 깨어난 날개들아
우리 함께 날아보자.
내가 너희 형제 아니더냐.
너희가 내 이웃 아니더냐.



ㅡ 시집 『화살시편』 (문학과지성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