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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성 - 제주바다 1 / 손금 / 묘비 / 새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8. 1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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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제주바다 1


문충성

 

 

누이야, 원래 싸움터였다.
바다가 어둠을 여는 줄로 너는 알았지?
바다가 빛을 켜는 줄로 알고 있었지?
아니다, 처음 어둠이 바다를 열었다 빛이
바다를 열었지, 싸움이었다
어둠이 자그만 빛들을 몰아내면 저 하늘 끝에서 힘찬 빛들이 휘몰아와 어둠을 밀어내는
괴로워 울었다. 바다는
괴로움을 삭이면서 끝남이 없는 싸움을 울부짖어왔다


누이야 어머니가 한 방울 눈물 속에 바다를 키우는 뜻을 아느냐 바늘귀에 실을 꿰시는
한반도의 슬픔을. 바늘 구멍으로
내다보면 땀 냄새로 열리는 세상
어머니 눈동자를 찬찬히 올려다보라
그곳에도 바다가 있어 바다를 키우는 뜻이 있어
어둠과 빛이 있어 바다 속
그 뜻의 언저리에 다가갔을 때 밀려갔다
밀려오는 일상의 모습이며 어머니가 짜고 있는 하늘을


제주 사람이 아니고는 진짜 제주 바다를 알 수 없다.
누이야 바람 부는 날 바다로 나가서 5월 보리 이랑
일렁이는 바다를 보라 텀벙텀벙
너와 나의 알몸뚱이 유년이 헤엄치는
바다를 보라 겨울 날
초가 지붕을 넘어 하늬바람 속 까옥까옥
까마귀 등을 타고 제주의
겨울을 빚는 파도 소리를 보라
파도 소리가 열어 놓는 하늘 밖의 하늘을 보라 누이야

 

 

 

 

(『제주바다』. 문학과지성사. 197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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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금


문충성

 


내 손금에서 눈부시게 자라나던 무지개여
이제는 눅눅한 찬 땀만 배어나누나
이 겨울 침침하게 눈은 내리고 얘들아
우리들 서러움 죄 풀어 우리들아
어린 왕자의 무덤을 불 밝혀내자
새파랗게 사금파리로 도깨비불을 빚어내자
길이야 많지만 언제나 도깨비불로 열리던 길
그러나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마법의 나라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존재의 아이들을
언 손 비비며 티없는 슬픔 속에서
잠깨어나게 하자 얘들아
얘들아 어디에 있니
내 음성에도 풀풀
눈은 내리고 눈은 내려
누구의 손금 속에 갇혀 있느냐 시방
얘들아 얘들아 다시 만날 수 없겠느냐
지금 나는 혼자서
어디로 가는 것이냐
내가 없구나 동서남북
찬땀이 강물을 이룬 길
동서남북 길이 보이지 않는구나
얘들아 나를 찾아내다오 얘들아 얘들아

 

 


(『내 손금에서 자라는 무지개』. 문학과지성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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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문충성

 


가을날 누이야 가고 보아라
보랏빛 햇살 사각사각 쌓이는
별도봉(別刀峰)
그 어디쯤
어린 날부터
파묻어 온 새하얀 물결 소리
만취해 싸구려
눈물 세상 이리저리
건너다니던
어지러운 발걸음들
거기엔 형제들 잠자는 무덤들도 있으니
제주바다가 천 만년 시달려온 이승의 악몽들
몸부림치며 어둠에 걸린
산기슭에 와 목놓아 부서지는
그 자리에
내 묘비 하나 세우리
묘비엔 저주스런
아무 글도 적어놓지 않으리
결코 열려오지 않을 새벽을 꿈구며 깨어나며
무정 세월에 깎여
어둠 속에 홀로 푸르르 떨며 빛나다
어느 날 바닷물결로
무심무심 사라질
그런 묘비 하나 세우리

 

 

 

(『내 손금에서 자라는 무지개』. 문학과지성사. 198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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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성

 


푸르름 푸르름 속으로 숱한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숱한 새들이 푸르름의 빙하 속을 날고 있었다


새들은 차가운 바람 그
가없는 넓이에 밀리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새들을 날려보내고


푸르름 속을 떠도는 새들이여 이제껏 맨발
붙일 한 뼘 땅도 마련하지 못했느냐 돌아오너라 차라리
지친 날갯죽지 접고 나의 새들이여
그러나 내 품을 빈 가죽뿐


너희들 울믈 울음 속 난청(難聽)의 땅 그 속으로
내 그림자는 사위어들고 푸르름 속으로
푸르름을 날아오르던 새들이
자꾸만 떨어지고 있었다 한입씩 내 울음을 베어물고

 

 


(『제주바다』. 문학과지성사. 197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