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 김달진(1907∼1989)
봄이 깊었구나
창밖에 밤비 소리 잦아지고
나는 언제부터선가
잠 못 자는 병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난밤 목련꽃 세 송이 중
한 송이 떨어졌다.
이 우주 한 모퉁이에
꽃 한 송이 줄었구나.
—김달진선시집『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민음사, 1990. 6 유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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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김광규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시집『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문학과시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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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조동범
석양을 향해 바람은 불어온다
적란운은 피어오르고
휘파람을 불면 먼 바다로부터 폭풍은 몰려왔다
해변의 연인들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마지막으로
어느새 파국을 맞이한다
헤어진 연인과 태어나지 않을 아들들이 영원히 잊히는
밤이었다
추억은 쉽게 잊혔고
더 이상의 기억은 소환되지 않는다
머나 먼 과거로부터
세이렌의 음역은 부풀어 오르고,
그것은 더러운 예감이었다고
늙은 동성애자는 중얼거린다
멸망한 고대문명에 대한 기사는 폐기되고
극지의 밤과 낮은 끝없는 설원 위에 유폐된다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된 유기견의 사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추락사한 태양은 바다 너머에서 음각되고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과거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만 존재한다
미래는 이제, 찾아오지 않는다
휴양지의 바다와 숲과 강물들은
거대한 소문을 향해 소멸에 이른다
아름다운 비행운을 앞에 두고도
바람은 불지 않는다
아름다운 묘혈 위로
지난 세기는
음각된 단 하나의 문장을 향해,
어느새
선명하게 경악하며
낮은 음계를 어루만진다
* 한용운 - 님의 침묵.
―계간『딩아돌하』(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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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오태환
내가 눈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희미한 노을 몇 잎뿐이었고
내가 귀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궂은 빗소리 몇 마디뿐이었고
내가 입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쓴 소주 몇 잔뿐이었고
내가 손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부질없는 시詩 몇 줄 뿐이었고
세상이 한번 나를 탕진하니 이렇듯 되고 말았다
―시집『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시로여는세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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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墓碑銘
박형준
유별나게 긴 다리를 타고난 사내는
돌아다니느라 인생을 허비했다
걷지 않고서는 사는 게 무의미했던
사내가 신었던 신발들은 추상적이 되어
길 가장자리에 버려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그 속에 흙이 채워지고 풀씨가 날아와
작은 무덤이 되어 가느다란 꽃을 피웠다
허공에 주인의 발바닥을 거꾸로 들어올려
이곳의 행적을 기록했다,
신발들은 그렇게 잊혀지곤 했다
기억이란 끔찍한 물질이다
망각되기 위해 버려진 신발들이
사실은 나를 신고 다녔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맨발은 금방 망각을 그리워한다
―『제24회 소월시 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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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묘비
정민호
이 세상 왔다 가는데
무슨 묘비가 필요한가,
봄에는 진달래 산천
그것이면 족하지 않나?
여름에는 흰 구름 산을 넘고
그 하늘만 바라보면 그것으로 족하지
가을에 단풍 들어 나뭇잎 지면
산들바람 불어 먼 산을 돌아 나가고,
겨울엔 흰 눈 내려 가지마다 꽃인데
그 꽃만 바라보면 되는 것을,
돌에 새겨 둔 몇 자의 글귀가
영원히 잠자는 시인에게 무슨 소용 있으랴
―제15시집『매듭을 풀면서』(동학사, 20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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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서상영
세상을 떠돌던 철새
가지런히 발을 모으다
―시집『눈과 오이디푸스』(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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