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1 ~ 400 - 목록과 시
제301편 - 청포도 - 이육사
제302편 - 박태일 - 들개 신공
제303편 - 이홍섭 - 절
제304편 - 박두진 - 하늘
제305편 - 이봉환 - 김 기사 그 놈
제306편 - 백 석 - 고향
제307편 - 황규관 - 우체국을 가며
제308편 - 윤덕남 - 도서관
제309편 - 정철훈 - 유리창 아이
제310편 - 주하림 - 작별
제311편 - 이준규 - 있다
제312편 - 신미나 - 연
제313편 - 김은경 - 얼룩무늬나비 떼
제314편 - 김용원 - 노래방에서
제315편 - 허 연 - 나의 마다가스카르 1 ―세월 하나 지나갔다
제316편 - 안성덕 - 소문난 가정식 백반
제317편 - 천수호 - 나리꽃---------------317편이 두 편
제317편 - 강웅순 - 대서(大暑)
제318편 - 김 륭 - 쌀 씻는 남자
제319편 - 이경희 - 가을 프리즘
제320편 - 없음
제321편 - 문태준 -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제322편 - 한경용 - 세련과 난감 사이 겨울나무 사이로
제323편 - 윤재철 - 정전
제324편 - 이승하 - 기도원의 아침 풍경
제325편 - 김경미 - 맨드라미와 나
제326편 - 전영관 - 얼큰한 시월
제327편 - 이우성 - 이우성
제328편 - 서효인 - CITY100 다이어리
제329편 - 황명자 - 먼 풍경
제330편 - 박인환 - 목마와 숙녀
제331편 - 신현수 - 봄바람이 달려와 내 눈물을 말려주니
제332편 - 김종길 - 황락(黃落)
제333편 - 문정희 - 결혼한 독신녀
제334편 - 임성용 - 11월
제335편 - 고 은 - 겨울 햇빛에 대하여
제336편 - 이근화 -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
제337편 - 최해돈 - 물방울
제338편 - 이제하 - 숲
제339편 - 이광석 - 말소된 주민등록 ‘아버지’
제340편 - 김왕노 -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제341편 - 최금진 - 나의 손
제342편 - 박승자 - 잠시
제343편 - 이제니 - 가지와 앵무
제344편 - 김희업 - 통증의 형식
제345편 - 서정주 - 화사(花蛇)
제346편 - 전남용 - 찬밥
제347편 - 허혜정 - 앨범 속의 방
제348편 - 이강하 - 노을
제349편 - 유자효 - 아직
제350편 - 이향지 - 풀눈꽃눈 뜨니
제351편 - 김 현 - ㅅ
제352편 - 김윤한 - 비키니 옷장
제353편 - 정재학 - 반도네온이 쏟아낸 블루
제354편 - 최승철 - 공중전화 박스를 나오며
제355편 - 윤동주 - 사랑스런 추억
제356편 - 해를 보는 기쁨
제357편 - 강기원 - 죽
제358편 - 문태준 - 맨발
제359편 - 함석헌 - 그 사람을 가졌는가
제360편 - 정충화 - 발베개
제361편 - 편덕환 - 대물림
제362편 - 임영석 - 만원을 바라보며
제363편 - 메리 올리버 - 이끼
제364편 - 박덕규 - 수술 전야
제365편- 박진형 - 소릿길
제366편 - 김철식 - 몰핑
제367편 - 공광규 - 시래기 한 움큼
제368편 - 주원익 - 꽃 핀 나무 아래
제369편 - 권갑하 - 우포 여자
제370편 - 정끝별 - 은는이가
제371편 - 이능표 - 옛날 생각
제372편 - 최정례 -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제373편 - 최영미 - 새들은 아직도
제374편 - 이정주 - 물리치료
제375편 - 조은 - 동질(同質)
제376편 - 김지하 - 바람에게
제377편 - 이재무 - 송가(送歌)
제378편 - 김혜순 - 잘 익은 사과
제379편 - 김광규 - 생각의 사이
제380편 - 이준관 - 꽃 보자기
제381편 - 신현림 -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제382편 - 유치환- 춘신(春信)
제383편 - 정다혜 - 선물
제384편 - 장석남 -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제385편 - 고이케 마사요 - 산양
제386편- 임경섭 - 반짝반짝
제387편 - 김연희 - 그 이 얼굴
제388편 - 송일순 - 은혜와 원수 맺음을 경계하였건만
제389편 - 전영미 - 혼선
제390편 - 샘 레벤슨 - 세월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제291편- 김완 - 봄, 소주
제392편 -임형신 - 힁망촌 1길
제393편 - 여태천 - 월요시장
제394편 - 고영 - 달걀
제395편 - 강영은 - 묵매(墨梅)
제396편 - 허형만 - 황홀
제397편 - 이흔복 - 강남춘(江南春)
제398편 - 데이비드 예지 - 전화
제399편 - 오하룡 - 김경윤
제400편 - 정재학 - Edges of illusion (part 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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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청포도
―이육사(1904∼1944)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99』 (동아일보. 2014년 08월 25일)
(『문장』. 1939. 8: 『육사 시집』. 열린책들.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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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들개 신공
―박태일(1954∼ )
벅뜨항 산 꼭대기 눈
어제 비가 위에서는 눈으로 왔다
팔월 눈 내릴 땐 멀리 나가는 일은 삼간다
게르 판자촌 가까이 머물며 사람들
반기는 기색 없으면 금방 물러날 줄도 안다
허물어진 절집 담장 아래도 거닐고
갓 만든 어워 둘레도 돈다
혹 돌더미에서 생고기 뼈를 찾을 제면
다 씹을 때까진 떠나지 않는다
누가 보면 어워를 지키는 갸륵함이라 하리라
공동묘지를 돌면 소풍 나섰다 생각하라
울타리 아래 아이 똥 닦아 먹고
비 온 뒤 흙탕물로 목을 축이며
물끄러미 발등을 핥는다
우리는 대개 검다 속살은 붉지만
시루떡처럼 부푼 석탄광 잡석 빛깔이다
때로 양떼 가까이 갔다 집개에게 쫓겨난다
그래도 사람 가까이 머물러야 한다
야성은 숨기고 꼬리는 내려야 한다
집 없고 가족 없는 개라 말하지 마라
들개는 본디 가족을 두지 않는다
사람 가운데도 더러 개를 닮은 이가 있으나
우린 마냥 들개다 잉걸불 이빨을 밝히고
짖는다 두려워 마라 물기 위한 일이 아니다
다만 사람과 거리를 둘 따름
어금니 빠지고 벽돌을 삼킨 양 속이 무겁지만
고픈 일이 배뿐이겠는가 길가 장작더미 지날 땐
피어오를 저녁 불꽃을 떠올릴 줄도 아는
나는 들개다 그런데 사실을 밝히자면
목줄이 문제다 걷기도 힘들다
어려서 주인을 떠날 때부터 두른 목줄
풀지 못한 목줄이 몇 해 나를 졸라왔다
지나는 일족을 보며 나는 주로 앉아 지낸다
동정하지 마라 이렇듯 숨가쁜 슬픔도
들개의 신공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2』 (동아일보. 2014년 0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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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절
―이홍섭(1965∼)
일평생 농사만 지으시다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절을 잘하셨다
제삿날이 다가오면
나는 무엇보다 작은할아버지께서 절하시는 모습이
기다려지곤 했는데
그 작은 몸을 다소곳하게 오그리고
온몸에 빈틈없이 정성을 다하는 자세란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세상사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가만히 그 모습을 떠올리며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끝을 모아보지만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자세라
제풀에 꺾여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먼 훗날 내 자식이 또한 영글어
제삿날 내 절하는 모습을 뒤에서 훔쳐볼 때
그 모습 그대로 그리워지길
그리워져서
천하의 귀신들도 감동하지 않고는 못 배길 모습이라
생각해주길 내처 기대하며
나는 또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가만히 발끝을 모아보는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3』 (동아일보. 2014년 08월 29일)
―격월간『유심』(2011. 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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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하늘
―박두진(1916∼1998)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4』 (동아일보. 2014년 09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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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김 기사 그놈
―이봉환(1961∼ )
여보씨요잉 나 세동 부녀 회장인디라잉 이번 구월 열이튿날 우리 부락 부녀 회원들이 관광을 갈라고 그란디요잉 야? 야, 야, 아 그라제라잉 긍께, 긍께, 그랑께 젤 존 놈으로 날짜에 맞춰서 좀 보내주씨요잉 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좋다고라? 앗따, 그래도 우리가 볼 때는 이놈하고 저놈이 솔찬히 다르등마 그라네 야, 야, 그랑께 하는 말이지라 아니, 아니, 그놈 말고, 아따, 그때 그 머시냐 작년에 갔든… 글제라 잉 맞어 그놈, 김 기사 그놈으로 해서 쫌 보내주랑께 잉, 잉, 그놈이 영 싹싹하고 인사성도 밝고 노래도 잘 하고 어른들 비우도 잘 맞추고 글등마 낯바닥도 훤하고 말이요 아, 늙은 할망구들도 젊고 이삐고 거시기한 놈이 좋제라잉 차차차, 관광차 타고 놀러갈 것인디 안 그요? 야, 야, 그렇게 알고 이만 전화 끊으요, 잉?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5』 (동아일보. 2014년 09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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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고향
―백석(1912∼1995)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느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
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집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집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6』 (동아일보. 2014년 09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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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
우체국을 가며
―황규관(1968∼)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소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철공고 졸업 1991년 육군 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7』 (동아일보. 2014년 09 10일)
―시집『패배는 나의 힘』(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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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도서관
―윤덕남(1969∼ )
고이 잠든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곳인지라
이곳에 들어찬 것은 침묵과 그림자들뿐이다.
잠든 책을 깨우기 위해서는 열과 행을 지나
고유번호에 얽힌 내력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있어야 한다.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책들도 꽂혀 있는 곳이라
잠든 책을 끄집어낼 때는 신중한 손길이 필요하다.
겉장을 넘기는 순간 알게 되지만
잠든 책을 잉태하고 출산한 산모의 증명사진이
박혀 있다. (때로는 박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갠지스 강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벵골호랑이 한 마리가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을 핥을 때도 있고
불시착한 우주선 안에서 끄집어내 달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릴 때도 있고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을 타고 달팽이가
기어 나올 때도 있다.
그리고 가끔씩 흰 눈이 펑펑 내릴 때도 있다.
어느새 다정한 친구가 되어버린 침묵
어느새 저 멀리 구석진 자리에서
다른 그림자와 밀회를 벌이고 있는 그림자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망각할 때도 있다.
깨어난 책을 다시 꽂아놓는 일은
아주 특별한 규칙과 행동이 요구되기에
침묵에 잘 길들여진 손길에 맡겨놓아야 한다.
깨어난 책을 다시 꽂아놓는 일은
장의사보다 엄숙한 것은 아니지만
깨어난 책을 다시 잠들게 하는 일이기에
아주 신중한 판단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곳에 들어와
단 한 번도 잠든 책을 깨우지 못한 자들도 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분이다)
늘 언제나 침묵이 도사리고 있는 곳
그림자들의 은밀한 생이 펼쳐지는 곳
나는 오늘도 이곳에 앉아 침묵과 친분을 쌓으며
몸에 달라붙은 그림자를 잃어버린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8』 (동아일보. 2014년 09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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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유리창 아이
―정철훈(1959∼)
어느 해 가을 어머니는 고향집에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집이 낡았을 테니 가봤자 마음만 상하실 거라고 대꾸했지만
구정 연휴에 슬며시 찾아간 외가는
스러진 흙담에 담쟁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안채로 들어서다 말고 멈춰 선 것은
사랑채 먼지 낀 유리창에
내 어린 시절이 비쳐서였다
토방 그득한 아이들 가운데 내가 끼여 있고
한 계집아이가 유별나게 입술을 내밀고 있다
숯검댕이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달랑 간장 종지에 맨밥을 밀어 넣던 아이
주장집 외손이던 내가 방학이면 내려와 독상을 받을 때
그 아이는 막내를 포대기에 들쳐업은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부엌 심부름을 하며 아궁이불을 지피던 아이
언 손등이 터져 핏물이 짓무르던
그 아이의 뺨을 갈긴 사연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사는 곳이 어디냐고 외삼촌에게 묻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그 유리창 아이
그날 때린 뺨을 오늘에야 되돌려 받듯 얻어맞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9』 (동아일보. 2014년 09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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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작별
―주하림(1986∼ )
나는 그것들과 작별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향해 가요
―배수아 ‘북쪽 거실’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0』 (동아일보. 2014년 09 17일)
―시집『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창비, 2013)
―계간『시와 미학』(2013.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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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있다
―이준규(1970∼ )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나무에 앉아 있다. 그것은 파란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그럴듯하게 가고 있다. 그것은 책상 앞에 앉아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물을 빼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물건을 옮기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지하철 안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것은 개수대 앞에 서서 커피가 담긴 잔을 작은 숟가락으로 그럴듯하게 젓고 있다. 그것은 젓가락으로 참치 회를 집어 입으로 그럴듯하게 가져가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절 앞에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무덤 앞에서 오열한다. 그것은 북극에서 남극으로 그럴듯하게 이동하고 있다. 그것은 머리를 긁으며 그럴듯하게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것은 진심이 담긴 호소하는 눈빛으로 그럴듯하게 낙지를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꼬았던 다리를 몇 번 바꾸며 그럴듯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병상에 누워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관 속에 들어가 있다. 그것은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런 의심 없는 책장을 그럴듯하게 넘기고 있다. 그것은 묵묵히 그럴듯하게 수증기를 내뿜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성기를 성기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그것은 그럴듯하게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1』 (동아일보. 2014년 09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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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연
―신미나(1978∼ )
아버지는 고드름 칼이었다
찌르기도 전에 너무 쉽게 부러졌다
나는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
머리를 감고 논길로 나가면
볏짚 탄내가 났다
흙 속에 검은 비닐 조각이 묻혀 있었다
어디 먼 데로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동생은 눈밭에 노란 오줌 구멍을 내고
젖은 발로 잠들었다
뒤꿈치가 홍시처럼 붉었다
자꾸만 잇몸에서 피가 났고
두 손을 모아 입 냄새를 맡곤 했다
왜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고
도시로 간 언니들은 오지 않을까
가끔 뺨을 맞기도 했지만 울지 않았다
몸속 어딘가 실핏줄이 당겨지면
뒤꿈치가 조금 들릴 것도 같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2』 (동아일보. 2014년 09 20일)
―시집『싱고, 라고 불렀다』(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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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얼룩무늬나비 떼
―김은경(1976∼ )
밤 빨래를 넌다
마당에서 백년을 산 플라타너스
검은 얼굴을 하고
바스락 바스락
수국 지는 소리
거기 희미한 그림자는 또 발에 차인 흐느낌
몸을 덮던 옷가지들
발가락엔 힘이 없고
목덜미에서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진다
일주일 치 삶이
견딘 중력의 힘은 투명하다
치명의 중심부로 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몸부림을 쳤나
땀내 나는 시간이
이렇게 구김으로 남더라고
빨랫줄을 잡아당긴
모과나무는 향기롭다
지퍼도 단추도 잠그지 않은
빨래들이 펄럭인다
묵은 그대,
손금이 닳아갈수록
바싹바싹 새로워지는 것들,
지금은 속까지 다 비치는 날개들
한 줄에 매달려 펄럭인다
얼룩이 곧 이름이 된
얼룩무늬나비처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3』 (동아일보. 2014년 09 24일)
―시집『불량 젤리』(삶창,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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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노래방에서
―김용원(1962∼ )
일상이 지뢰밭처럼 느껴지는 날이면
아픈 상처로 절뚝거리며 노래방으로 간다
어느 노래인들 추억이 서려 있지 않을까
생의 모든 명제와 숙제들을 불러내어
네 박자에 모든 처분을 일임해 본다
남자라는 이유로, 어쩌다 마주친 그대, 사랑했어요
해후, 부산갈매기, 그 겨울의 찻집…
십팔번을 연이어 부르며 막춤을 출 때
나는 출세한 사람처럼 신명이 난다
누가 이처럼 심신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흐느끼고 아쉬워하며 목청 높여 결단한다
노래방, 닫힌 문이 열리고 맺힌 것이 풀어지는
이곳은 탕자들의 예배당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4』 (동아일보. 2014년 09 26일)
―잠언시집『당신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세움과비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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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나의 마다가스카르 1
―세월 하나 지나갔다
―허연(1966∼ )
별자리가 천천히 회전을 하는 동안
우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안
마다가스카르 항구에선
이해하지 못했던 노래가 가슴을 치고
사랑 하나, 서서히 별똥으로 떨어진다
나는 투항했던가
감당 안 되는 빗물이 길을 막아버린 오늘
나는 마다가스카르에 투항했는가
젖은 그물에 엉켜 죽어가는 펠리컨을 보며
비틀스의 해산을 떠올렸다
항구에서의 세월
나의 마다가스카르에선 세월과 친해질 수 없다
오늘 또
뼈만 남은 노인이 폐지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들짐승처럼 소리 없이 등 뒤를 지나갔다
마다가스카르의 어느 날
세월 같은 게 하나 지나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5』 (동아일보. 2014년 09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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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다가스카르 3
―세월 하나 지나갔다
허연
별자리가 천천히 회전을 하는 동안
우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동안
마다가스카르 항구에선
이해하지 못했던 노래가 가슴을 치고
사랑 하나, 서서히 별똥으로 떨어진다
나는 투항했던가
감당 안 되는 빗물이 길을 막아버린 오늘
나는 마다가스카르에 투항했는가
젖은 그물에 엉켜 죽어가는 펠리컨을 보며
비틀즈의 해산을 떠올렸다.
항구에서의 세월
나의 마다가스카르에선 세월과 친해질 수 없다
뼈만 남은 노인이 폐지를 실은 자전거를 끌고
들짐승처럼 빠르게 등 뒤를 지나갔다
마다가스카르의 어느 날
세월 같은 게 하나 지나갔다
―월간『현대시학』(20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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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소문난 가정식 백반
―안성덕(1955∼ )
식탁마다 두서넛씩 둘러앉고
외따로이 외톨박이 하나,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내와 나를
반 어거지로 짝 맞춰 앉힌다
놓친 끼니때라 더러 빈자리가 보이는데도
참, 상술 한 번 기차다
소문난 게 야박한 인심인가 싶다가
의지가지없는 타관에서
제 식구 아닌 낯선 아낙이 퍼주는 밥을
꾸역꾸역 우겨넣으며
울컥 목이 멜지도 모를 심사를
헤아린 성싶다고 자위해본다
정읍 시외버스터미널 뒷골목 소문난 밥집
어머니뻘 늙은 안주인의 속내가
집밥 같다
잘 띄운 청국장 뚝배기처럼 깊고
고등어조림의 무 조각처럼 달다
달그락달그락,
겸상한 두 사내의 뻘쭘한 밥숟가락 소리
삼 년 묵은 갓김치가 코끝을 문득
톡, 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6』 (동아일보. 2014년 10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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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나리꽃
―천수호(1964∼ )
여덟 살 때 나리꽃 화신을 본 적 있다
바위 뒤에 숨어서
긴 머리카락으로 맨몸을 가리고 있던 나리꽃
내려다보이는 사거리 바보식당을 가리키며
옷가방을 갖다달라던
암술이 긴 속눈썹
손에 꼭 쥐여 주던 쪽지도 나는 계곡으로 던져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박질쳤는데
그 쪽지는 급물살 타고 아득히 멀어져갔는데
사십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옷을 달라고 속눈썹 깜빡이는 여자
그 바위 뒤에서 벌거벗은 채
마흔 번의 겨울을 어찌 다 견뎠는지
늙지도, 죽지도 않고
그 붉은 루즈도 닦지 않고
주근깨 몇 개 가만히
붉은 입술에 섬처럼 떠올라 초조한
내가 처음 본 여자의 몸, 나리꽃 화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7』 (동아일보. 2014년 10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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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중복
대서(大暑)
―강웅순(1962∼ )
염소뿔도 녹는다는
소서와 입추 사이의 대서
황경(黃經)이 120에 이르면
물은 흙이 되고
흙은 물이 되며
풀은 삭아서 반딧불이 된다
장마에 돌도 자란다는
애호박과 햇보리 사이의 대오리
토용(土用)이 중복(中伏)에 이르면
씨앗은 꽃이 되고
꽃은 씨앗이 되며
태반은 삭아서 거름이 된다
붉은 배롱나무가
원추형 태양으로 타오르고
벼가 익는 하늘이
파랗게 맨발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7』 (동아일보. 2014년 10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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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쌀 씻는 남자
―김륭(1961∼ )
쌀을 씻다가 달이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밤을 밥으로 잘못 읽은 모양입니다 달은, 아무래도 몰락한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변기통 같습니다
아내가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습니다 속이 시커멓게 탄 사내에게 고독이란 밥으로 더럽힐 수 없는 쌀의 언어입니다 문득 살이 운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밤을 밥이라 썼다 지우고, 쌀을 살이라고 썼다가 지우는 사내의 입이 문밖 나뭇가지에 걸립니다
사락사락 밤을 함께 지새울 여자가 있다면 처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불보다 물이 부족한 밥입니다 고물 전기밥통 가득 살이 타는 밤입니다
달이 생쌀 씹는 소리가 들립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8』 (동아일보. 2014년 10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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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가을 프리즘
―이경희(1935∼)
댓돌에 내려서는 상긋한 가을
아침볕을 따라 돌아서는 해맑은 풀꽃의 얼굴
뽀얗게 건조한
마당의 씨멘트 색깔에서
풀 먹인 치마폭이
파릇이 살아나는 탄력에서
어머님의 손매디가
성큼하게 돋아나는 아픔에서
다홍고추를 다듬는
재채기 소리에서
깡마른 호박넝쿨 위에
길게 늘어진 추녀 그림자에서
머리 빗으니
무심히 날리는 한 가닥의 새치에서
가슴 속
살비듬이 돋아나는 서걱임에서
장지문에 비껴드는
아침 빛줄기를 타고 오는 가을
이 아침
님의 손은 한결 가슬거린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9』 (동아일보. 201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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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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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문태준(1970∼ )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1』 (동아일보. 2014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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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세련과 난감 사이 겨울나무 사이로
―한경용(1956∼ )
오늘도 영등포역 버스 정류소에서 심야 버스를 기다린다.
자정이 되도록 세상과 싸우는
나를 태우기 위해
어둠을 밀치며 다가올 것이다.
버스가 먼저 숨이 막혀 떠나고
취객들에게 삶을 호소하는 여인들은 나뭇잎으로 떨어져 나갔다.
택시들이 집으로 가자고 대신 호객하고
불빛을 받는 여자들도
나를 불러 세웠다.
중년의 주름을 감추지도 않고 나온
세련과 난감 사이
너무도 평범한 여인들에게
지극히 할 수 없는 이야기
어쩌다를 여쭈어본다.
“남편이 다치갖고
종일 옆에 있어야 해예, 나올 시간은 이 시간밖에 없어예.”
내일 아침 새를 날리기 위하여 저 나무가 서 있는데,
이 밤은 좁히지 못하고 바람조차 불지 않는데
꼼짝도 않는 이 나무는 대체 어쩌란 말이냐,
서둘러 막차에 오르니
제 몸에 전깃줄을 칭칭 감아놓고
겨울밤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같이 달려가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2』 (동아일보. 2014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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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정전
―윤재철(1953∼ )
교무실이 갑자기 정전이 되고
컴퓨터가 모두 꺼지니
금방 전기가 다시 들어오려나
얼마쯤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선생님들이
하나둘 일어서더니
서로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더러는 손발 움직이며 맨손체조도 하고
그러고는 미안한 듯이
컴퓨터 때문에 대화가 많이 없어졌다는 말을 합니다
칸막이 된 책상에 앉아
불 나간 컴퓨터 회색 화면을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문득 가슴이 밀물지듯 먹먹해져 옵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이십오 년 만에 만난 제자는
만나자마자 제게 맞은 따귀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따귀를 때리고
선생님이 오히려 울먹거렸다던 그 따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은 그 따귀 때문에
자신 살아났다던 얘기를 했습니다
깡패 양아치로 결국은 퇴학을 맞았던 그 녀석이
철학박사가 되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사람이 그립습니다
따귀도 그립고
주전자로 넘치게 따라 붓던 막걸리도 그립습니다
몸으로 부딪치며 울던 일이 그립습니다
그렇게 정전은 길어지고
침묵 또한 길어지면서
이상하게 창밖은 더욱 밝아집니다
화단 키 작은 벚나무 붉은 낙엽 떨어지는 것이
슬로우 비디오로 길게 눈에 걸립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3』 (동아일보. 2014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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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기도원의 아침 풍경
―이승하(1960∼ )
절벽에 세워진 집이다
먼동이 터 오는 시각
저 아래 저잣거리 아직 조용하기만 한데
이 방 저 마루 깨어 일어난 사람들이
목소리 높여 기도하기 시작한다
제각각의 기도 내용과 손짓
갓난아기를 먼 나라로 보내고 온 미혼모
돈 벌러 나갔다가 노모를 굶겨 죽인 남자
남편 몰래 바람피웠다 아기를 지운 여인
병명도 알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려 왔다
온전한 육신은 죄 뒤틀려 있다
멀쩡한 정신은 죄 뒤집혀 있다
모두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 사람들
활처럼 휘어진 몸으로 기도하고 있다
격렬하게 경련하며 기도하고 있다
뛰어내릴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이곳
인생의 절벽 아득한 끄트머리
아침밥도 먹지 않고 울면서
모두들 울면서 기도하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4』 (동아일보. 2014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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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맨드라미와 나
―김경미(1959∼ )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다 흐린 날씨는 내가
좋아하는 날씨
좋아하면 두통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화단의 맨드라미는 더 심하다
온통 붉다 못해 검다
곧 서리 내리고 실내엔 생선 굽는 냄새
길에는 양말 장수 가득할 텐데
달력을 태우고 달걀을 깨고 커튼에 커튼을 덧대고
혀의 온도를 올리고
모든 화단들이 조용히 동굴을 닫을 텐데
어머니에게 전화한다
대개는 체한 탓이니 손톱 밑을 바늘로 따거나
그냥 울거라
성급한 체기나 화기에는 눈물이 약이다
바늘을 들고 맨드라미 곁에 간다
가을은 떠나고
오늘 밤 우리는 함께 울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5』 (동아일보. 2014년 10월 22일)
―계간『한국동서문학』 (201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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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얼큰한 시월
―전영관(1961∼)
작년에 나, 뺨 맞았잖아
장성댐이 깊기는 깊더구만 가을이 통째로 빠졌는데 흔적 없고
조각구름만 떠다니더군 백양사 뒷산 정도야 그 남색 스란치마에 감기면
깜박 넘어가지 않겠어 뛰어들까 싶기도 한데
집사람 얼굴이 덜컥 뒷덜미를 채더군
피라미 갈겨니 메기까지 푹푹 고아
수제비도 구름같이 떠오르는 어죽(魚粥) 한 사발 했지
반주로 농탁(農濁) 몇 대접 걸쳤다가 휘청
단풍에 취한 낭만파처럼 평상에 누웠던 거 아닌가
목침 베고 한 잠 늘어진 뒤 화장실에 가보니 아 글쎄
벌건 뺨에 손자국 선명한 거라 애기과부 손바닥 같은 단풍잎 대고 누워
잠시 딴살림 차렸던 거라 뭣에 쫓기기는 한 듯
뒷골 얼얼하니 내려오는 내내 흙길도 출렁거리더군
오늘 나, 거기로 뺨 맞으러 간다
혼자 쓸 한나절쯤 배낭에 챙겨 넣고 지팡이 들고
는실는실 웃는 고것들 후리러 간다 농탁(農濁)에 엎어진 핑계로
작년처럼 낮잠 한 숨 퍼지르고 올 참이야 한쪽 뺨 벌겋게 얻어터져야
후끈한 뒷맛으로 올 겨울 얼음고개 넘지 않겠나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6』 (동아일보. 201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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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7
이우성
―이우성(1980∼)
금요일 밤인데 외롭지가 않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집에 있는 게 부끄러울 때도 있다
줄넘기를 하러 갈까
바닥으로 떨어진 몸을 다시 띄우는 순간엔 왠지 더 잘생겨지는 것 같다
얼굴은 이만하면 됐지만 어제는 애인이 떠났다
나는 원래 애인이 별로 안 좋았는데 싫은 티는 안 냈다
애인이 없으면 잘못 사는 것 같다
야한 동영상을 다운 받는 동안 시를 쓴다
불경한 마음이 자꾸 앞선다 근데 내가 뭐
그래도 서른 한 살인데
머릿속에선 이렇게 되뇌지만 나는 인정 못하겠다
열 시도 안 됐는데 야동을 본다
금방 끈다
그래도 서른 한 살인데
침대에 눕는다
잔다 잔다 잔다
책을 읽다가 다시 모니터 앞으로 온다
그래도 시인인데
애인이랑 통화하느라 못 쓴 시는 써야지
애인이랑 모텔 가느라 못 쓴 시는 써야지
야동 보느라 회사 가느라 못 쓴 시는 써야지
만두 먹어라 어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다행히 오늘은 바지를 입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7』 (동아일보. 2014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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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CITY100 다이어리
―서효인(1981∼)
등에 뜨거운 바람이 분다 번지가 여러 개인 골목이 길게 숨어서 휘파람을 분다 대실된 모텔에서처럼 길고 순한 알몸들이 끈끈하게 들러붙기 전에, 가야 한다 과속 방지 산맥을 넘고 넘어 달리는 오토바이의 다리는 볶은 양파의 깔깔한 교태에 있는 힘껏 취한다
한 때는 짬뽕을 시키는 궁상들의 허기를 달래 주는 단무지 색 머리칼의 혁명가가 되려 하였다 신장개업 취화루 놈과 눈을 흘기게 되면서 등에서 부는 뜨거운 바람이 게릴라의 노래가 아니요, 궁상들의 독촉 소리라는 걸 알았다 번지와 번지 사이 너른 허기의 끈을 당기며 녀석의 얄궂은 미소를 떠올린다 휘파람 소리 힘껏 뜨겁다
동네의 곳곳을 달리며 대륙의 식사를 반도(半島)식으로 들이미는 그간의 투쟁을 상기하며 모든 혁명은 허기로부터 시작된다는 회심의 정의를 깨닫는다 철가방 속 모든 정의가 지켜지도록 속도를 더할 때, 피자 배달 공수부대의 습격을 받고 넘어졌다 최후를 함께한 짬뽕 동지의 삐져나온 국물 속 남지나해산 조개가 쏘지 마오, 내가 ‘체’요, 참혹하게 힘껏 웃는다
역시 혁명은 매운 붉은색이 틀림없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8』 (동아일보. 2014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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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먼 풍경
―황명자(1962∼)
간월산 오르는 길,
입동 오기도 전에
마른 억새풀 서걱이더니
새싹 하나 불쑥 솟았다
길 잃은 어린 초록뱀이다
좁은 등산길 따라
꿈틀꿈틀 몸 옮기는 뱀은
차디찬 골짜기 돌무덤을 찾아들 터,
그조차도 여의치 못하면 얼어 죽을 수도 있으니
얘야, 겁먹지 마라
원래 이 길은 뱀의 길이 아니란다
겨울이 두려운 뱀을 위해
먼저 놀라지 말고
갈 길 내주어야 한단다
불안한 눈빛으로 떨고 있잖니?
불쌍하지 않니?
나조차도 무서워서 돌아가는
거기,
잠시 인적 끊기고
저만치 사라질 동안
길은
먼 데 풍경처럼 까마득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89 (동아일보. 2014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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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목마와 숙녀
―박인환(1926∼1956)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부릅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0』 (동아일보. 2014년 11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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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봄바람이 달려와 내 눈물을 말려주니
―신현수(1959∼)
점심시간에
밥 빨리 먹으라고 성화를 부린 후
아이들 몇 명을 데리고 학교 앞 야산에 오른다.
핑계는 등산하면서 상담하기지만
실은 내가 더 가고 싶었다.
아이들은 계단 몇 개밖에 안 올랐으면서
힘들다고, 너무 가파르다고, 목마르다고
지랄발광을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하고는
나를 떼어놓고
지들끼리만
저만치 앞서서 뛰어 올라간다.
등산로 옆 개나리는 아이들과 함께 떠들고
솔숲 사이 진달래는
뭐가 부끄러운지
몰래 숨어 있다.
산꼭대기 전봇대 밑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노래를 하기로 했다.
가위 바위 보에서 진 놈이 뜬금없이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멋지게 부른다, 4월인데.
뜬금없이 눈물이 찔끔 흐른다.
아이들에게 그런 노래를 가르쳐 준 중학교 음악선생이 고맙다.
봄바람이 달려와 내 눈물을 말려 주니
조금, 행복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1』 (동아일보. 2014년 1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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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황락(黃落)
―김종길(1926∼)
추분(秋分)이 지나자,
아침 저녁은 한결
서늘해지고,
내 뜰 한 귀퉁이
자그마한 연못에서는
연밤이 두어 개 고개 숙이고,
널따란 연잎들이
누렇게 말라
쪼그라든다.
내 뜰의 황락을
눈여겨 살피면서,
나는 문득 쓸쓸해진다.
나 자신이 바로
황락의 처지에
놓여 있질 않은가!
내 뜰엔 눈 내리고
얼음이 얼어도, 다시
봄은 오련만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
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
봄도 없는 것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2』 (동아일보. 2014년 11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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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결혼한 독신녀
―문정희(1947∼)
쉬잇! 조용히 해 주세요
실수하는 재미도 없으면 무슨 인생인가요
상처와 고통이 혀를 태우는
매운 양념으로 비빔밥을 버무리어 땀 흘리며 먹는 것
이것이 결혼인지도 모르겠어요
우연과 우행으로 덜컹거리며
사막도 식민지도 아닌 땅을 걸어가며
어버버! 입술을 더듬거리며
모래바람 끝도 없는 질문 하나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
이것이 행복인지도 모르겠네요
황소 등에 올라탄 쥐처럼 살기 싫어
황소처럼 가다 보니
결혼한 독신녀가 주소입니다
무임승차 비슷하게 따라다니며 밥을 나눠 먹고
가끔 창밖을 함께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까요
무엇이건 예고도 없이 종점이 다가들고 말겠지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3』 (동아일보. 2014년 11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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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11월
―임성용(1965∼)
감나무 가지에 감 하나 달려 있다
오래도록 묵은 세월이 잔가지에 쌓여가는 동안
나도 어느새 손 매듭이 굵어졌다
감나무가 저만큼 자라도록
봄이면 꽃을 낳아 가을이면 하늘 흥건하게 기르도록
나는 감나무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깨가 빠지도록 망치질만 했다
짓무른 눈빛이 아주 어두워져
내가 헐벗은 나무의 그림자 아래 흔들릴 때
그제서야 나는 농익은 감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항시 일몰의 황혼이거나
달빛 그윽한 밤이었다
딱딱한 밥을 우물거리던 목구멍에서 눈시울까지
한 방울씩 붉게 번지는 노을을 적셔두고
저 혼자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부리 끝에 어둠을 물고 펄럭이는 잎사귀여
내 가뭇없는 기억 속으로 돌아오라
지금, 창밖에 찬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고
치부처럼 드러난 몸의 궁색함이
발등 끝에 마른 껍질로 굳어지는 11월
달이 월식을 하듯 그렇게
나도 내 얼굴을 지워가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4』 (동아일보. 2014년 11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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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겨울햇빛에 대하여
―고은(1933∼)
겨울햇빛 너는
흙 속의 씨앗들을 괜히 깨우지 않는다
가만가만
그 씨앗들이 잠든 지붕을 쓰다듬고 간다
이 세상에서 옳다는 것은
그것뿐
겨울햇빛 너는
지상의 허튼 나뭇가지들의 고귀한 인내를
밤새워 달랠 줄도 모르고
조금 어루만지고 간다
이 세상에서 충만이란 이런 섭섭함인가
겨울햇빛 너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간다
지식이 무식보다 얼마나 유죄인가
정녕 그렇겠다
겨울햇빛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얼간이들이
한동안 싸우지 않고
한동안 피 흘리지 않을 어느 날을 꿈꾸고 온
겨울햇빛 너는
나를 지우지 않고 우선 내 그림자를 지우고 간다
통곡인들
오열인들
내 절규인들 들어주는 곳 전혀 없다
겨울햇빛 내가 간 뒤
내 쇄골로 겨울밤을 샌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5』 (동아일보. 2014년 11월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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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
―이근화(1976∼)
나의 기분이 나를 밀어낸다
생각하는 기계처럼
다리를 허리를 쭉쭉 늘려본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화초가 말라 죽는다
뼈 있는 말처럼 손가락처럼
일정한 방향을 가리킨다
죽으면 죽은 기분이 날 것이다
아직 우리는 웃고 말하고 기분을 낸다
먹다가 자다가 불쑥 일어나는 감정이
어둠 속에서 별 의미 없이 전달되어서
우리는 바쁘게 우리를 밀어낸다
나의 기분은 등 뒤에서 잔다
나의 기분은 머리카락에 감긴다
소리 내어 읽으면 정말 알 것 같다
청바지를 입는 것은 기분이 좋다
얼마간 뻑뻑하고 더러워도 모르겠고
마구 파래지는 것 같다
감정적으로 구겨지지만
나는 그것이 내 기분과 같아서
청바지를 입어야 할 것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6』 (동아일보. 2014년 11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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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물방울
-최해돈(1968~)
비 오는 날. 물방울. 물방울. 보도블록 위에 외출 나온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이 톡톡 튕긴다. 물방울이 걸어온다. 걸어오면서 울고 있다. 울고 있는 물방울 옆에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이 외출 나온 보도블록 위에 고요가 한 켤레 두 켤레 쌓인다. 그 고요 위에 물방울이 깨알처럼 쏟아진다. 이쪽에도 물방울. 저쪽에도 물방울.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고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난다. 물방울과 물방울이 서로 부딪힌다. 물방울이 웃는다. 물방울이 물방울의 길을 간다. 보도블록 위는 온통 물방울 나라. 여기도 물방울. 저기도 물방울. 여기저기에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을 바라보는 마음 한쪽에 물방울이 여러 개 생긴다. 무늬가 없다. 다만 깊어 간다. 물방울을 꺼내어 물방울 옆에 놓는다. 물방울이 굴러간다. 데굴데굴 굴러간다. 물방울이 물방울과 물방울의 틈을 지나간다. 틈을 지나가는 큰 물방울, 작은 물방울. 물방울이 아프다. 통, 통, 통, 물방울이 굴러간다. 물방울을 따라 나도 굴러간다. 시간을 깎으며 가는 저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위에 내려앉는 숨결들. 숨결들이 눈을 씻는다.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든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두 눈을 크게 뜬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7』 (동아일보. 2014년 11월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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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숲
―이제하(1937∼)
밤새 격렬하게 싸우다 달아난 애인을 뒤쫓아 숲까지 갔더니
웬 녀석이 사과궤짝까지 들고 와 새벽부터 웅변연습을 하고 있다.
구케의원이라도 돼 또 나라를 말아먹으려나 싶어 야리다 보니
한 옆에는 낯짝 우두바싸고 세상의 고뇌란 고뇌는 혼자 짊어진 듯이
신음소리를 내는 녀석까지 보인다.
하지만 고요한 바다와 푸른 나무로 에워싸인 숲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쫓던 애인도 잊고 나는 무슨 생각에 잠긴 말 곁으로 다가간다.
야채와 당근을 먹을 만큼 먹은 듯 말은
호주에 가 있는 짝이라도 생각하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받아들일 밖에 없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8』 (동아일보. 2014년 11월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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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소된 주민등록 ‘아버지’
―이광석(1935∼)
등 굽은 세상 더 탓하지 말게
살다 보면 굽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랴
아버지의 등 굽은 허리 너도 벌써 보았겠지
쇠주 한 잔 품고 돌아온 어느 겨울 저녁
축 처진 어깨 너머 꽁초처럼 찍어 밟던
단 한 줄의 일기…….
“외롭다 힘들다”
6.25 군번도 못 찾은 전사통지서 60년 껴안고 울음 운
내 아버지의 갓데미산*은 이미 전설이다
이제 더는 외롭고 힘든 세상 나무라지 말게
팔십 고개에도 편한 잠 어디 있으랴
불안 하나 못 잠그는 열쇠꾸러미, 나무껍질처럼
까칠한 지갑, 무슨 약인지도 모를 수북한 약봉지, 한낮에도
기웃거리는 치매 증후군, 잃어버린 첫사랑 같은
녹슨 기억들, 혹은 우울증
손주들 재롱도 너무 커버려 휴대전화 문자도 안 잡히는구나
가자 세상의 아버지들이여
마누라 잔소리 눈치 조금씩 여위어 가는
얼마 안 남은 착한 자유를 위해
아무도 호명해 주지 않는 말소된 주민등록 같은
이 시대의 미아 ‘우리 아버지’
당신의 마지막 아름다운 상처
오늘밤 동네 포장마차 빈 잔 가득 안아드리고 싶다
*갓데미산 - 경남 함안 여항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9』 (동아일보. 2014년 11월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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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김왕노(1957∼)
애초부터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이건 처녀에게 폭력적인 것일까, 언어폭력일까. 내가 알던 처녀는 모두 아줌마로 갔다. 처녀가 알던 남자도 다 아저씨로 갔다. 하이힐 위에서 곡예하듯 가는 처녀도 아줌마라는 당당한 미래를 가졌다. 퍼질러 앉아 밥을 먹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아저씨를 재산목록에 넣고 다니는 아줌마, 곰탕을 보신탕을 끓여주고 보채는 아줌마, 뭔가 아는 아줌마, 경제권을 손에 넣은 아줌마, 멀리서 봐도 겁이 나는 아줌마, 이제 아줌마는 권력의 상징, 그 안에서 사육되는 남자의 나날은 즐겁다고 비명을 질러야 한다. 비상금을 숨기다가 들켜야 한다. 피어싱을 했던 날을 접고 남자는 아줌마에게로 집결된다. 아줌마가 주는 얼차려를 받는다.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란 말은 지독히 아름답고 권위적이다. 어쨌거나 아줌마는 세상 모든 처녀들의 미래, 퍼스트레이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0』 (동아일보. 2014년 11월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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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나의 손
―최금진(1970∼)
과거는 토굴이었고, 손바닥엔 언제나 더러운 때가 끼어 있었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친구들의 당돌한 악수가 무서웠다
학교에선 숙제를 안 해온 벌로 손바닥을 맞고
아이들은 입을 가리고 웃는 나를 계집애라고 놀렸다
그 손이 늙은 것이다
쩌릿쩌릿 경련도 오고, 각질이 때처럼 일어난 손이
남에게 싹싹 빌던,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기 위해 입을 가리던
내 손이 곁에 누워 나를 쓰다듬는다
사랑 얘기, 때려치운 직장 얘기, 성경책을 찢어버린 얘기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나는 토닥토닥 내 손을 두드린다
이 손으로 남은 생애 동안 밥이나 퍼먹다 갈 것이다
손 위에 바지랑대처럼 근심을 괴어놓고
바람좋은 날엔 어머니의 헐렁한 속옷이라도 널어야 한다
남은 게 고작 손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
손은 슬며시 반대편 손을 잡아 가슴팍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처음부터 이런 순간을 알고 있었다는 듯
심장이 뛰는 소리, 보일러 도는 소리, 창밖엔 눈이 내리고
눈을 감으면 어둠이 사분사분 속삭이는 소리, 나야, 나, 나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1』 (동아일보. 2014년 11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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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잠시
―박승자(1958∼)
저녁을 짜게 먹었다 싶어 슬리퍼 끌고 슈퍼 가는 길
환하게 불 밝힌 슈퍼 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주인 백
팻말이 손잡이에 걸려 있다
잠시라는 문구에 등 돌리지 못하고 발자국으로 보도블록 위에 꽃판을 만들고 있는데 잠시 만에 돌아올 수 있는 무언가를 많이도 버려 둔 것만 같기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시절에 저 팻말을 잠시 빌려 걸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데 시린 발끝으로 꼭, 꼭, 꽃판을 수 겹으로 만들어도 주인은 오지 않고 잠시만으로 턱없이 부족한,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발걸음을 한없이 머물게 하고
고개를 드니 슈퍼 안이 환했다가 어두워지는 것을 다 지켜봤을 회화나무, 쉬지 않고 물을 퍼 날랐을 물관도 어느 나무 속의 아늑한 습기를 잠시라도 방문하고 싶었을 터
야윈 가지 사이 별들이 환한 밤
마음도 잠시 마실 갔다 온 것처럼 말개져 있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2』 (동아일보. 2014년 12월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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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
통증의 형식
―김희업(1961∼)
생각하지 않으면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세상에 존재하듯
아프고 안 아프고의 차이는 아픈 차이
통증은 쪼그리고 앉아 오래오래 버티다가도 정들 만하면 어느 새 날아가는 바람둥이 새
순간을 제치고 몸속 한 획을 긋는 통증
먼 길 돌고 돌아 까마득한 새벽 어디서 왔을까
종종 통성명 없이 불쑥 나타나
평소에 없던 수많은 감정을 들춰내 죽이고 살리길 거듭
이대로라면 자멸에 평안히 도달할 것인가
내가 아니었으면, 해서 몸을 떠나고 싶은 떳떳한 출가
어떤 통증은 병명 없이 발견되기도 했다는데,
높은 가지의 이파리 하나가 공중의 하루를 잠깐 날다 떨어졌다
그 위로
무지개를 새긴 문신의 통증에 대해, 고통의 화려함에 대해 하늘이 속삭이듯 고백한다
어둠을 몰아낸 형광등 빛, 바라본 동공엔 눈부신 통증이 깜박거렸다
오늘도 추운 곳에서 빙하가 녹는다 진리처럼 모순처럼
따뜻한 통증을 동반한 채
그러니
멀리 근처에도 통증은 있어
언젠가 상쾌할 거라는 가설은 미완성으로 남겨놓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4』 (동아일보. 2014년 12월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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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화사(花蛇)
―서정주(1915∼2000)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잃은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무러뜯어.
다라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 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麝香 芳草ㅅ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석유(石油) 먹은 듯……石油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눌에 꼬여 두를까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투라의 피먹은양 붉게 타오르는 고흔 입설이다…… 슴여라! 배암.
우리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흔 입설…… 슴여라! 배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5』 (동아일보. 2014년 12월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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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
찬밥
―전남용(1966∼)
즐거움을
함께하지 못한
― 찬밥이 있다
즐거움이
끝나고
더는 즐거움이 없을 때
찾는
― 찬밥이 있다
뜨거운 시간을
홀로 식혀온
― 찬밥이 있다 <!--[endif]-->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6』 (동아일보. 2014년 12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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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앨범 속의 방
―허혜정(1966∼)
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하나의 방처럼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모여든 얼굴들이 기억의 영사기에 비춰오듯 흐릿하다. 딱히 언제 사진인지 짚어낼 순 없어도 앨범 속에 죽어 있던 풍경이 스며드는 방. 산 자와 죽은 자의 장소는 다르다고 믿어왔지만 사진 속의 일몰은 나의 창에 물들고 있다. 푸르게 젖어가는 옥양목 마당 너머에는 바라볼수록 여백이 넓어지는 하늘. 늦가을 바람에 창살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낸다. 녹이 먹어버린 문고리와 발바닥에 닳아 얇게 패인 문턱들. 몇 세대가 머물다 간 낡은 집으로 그들은 바람처럼 돌아와 바스락댄다. 슬픈 아이가 잠결에 따스한 체온을 느끼듯이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세대의 눈빛 안에 고여 있는 나의 눈이 어떤 슬픔을 꺼내놓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비워낸 시공간을 옮겨 적는 것. 잊었던 말들이 밀려온다. 스쳐가는 그림자의 방에서.
‘검은 마분지로 만들어진 갈피마다 하얀 습자지로 덮여 있는 빛바랜 사진들’, 사진 한 장 한 장을 소중히 갈무리한 이런 앨범이 집집마다 다락이나 장롱 깊은 곳에 있었다. 가족 앨범은 대개 스냅사진으로 채워진다.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흘러갈 시공간을 찰칵찰칵 잡아채서 우리는 기억을 닳고 바래게 하는 시간의 물살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진으로 남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 삶이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생은 저마다 기록해 남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7』 (동아일보. 2014년 12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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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노을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항구다
네 모습이 붉다
내 모습도 붉다
무수한 생명이 남겨놓은 소리
양면성을 지닌 발자국 소리가 빛의 균열에 순응하면
파르르 오감을 느끼는 노을 속 구멍들
먼 바다를 향해 붉은 깃을 세운다
펄럭거리던 돛, 아득히 밀려드는 섬의 물결
지나간 시간, 어스름의 메아리는
그리움보다 쓰라린 공터의 사색을
즐기겠구나, 검은 울음을
다 토해낸 구멍 많은 어느 당산나무처럼
너와 나의 거리가 멀수록
은밀히 포효하는 형상인가, 끼룩끼룩
기러기 떼 날아올라 우리 자리를 힘차게 다독여도
자꾸만 다른 모습이다
앞뒤가 충만한 황홀함으로
더 깊이 더 가벼운 안식으로
또 다른 계절의 문이 숨을 크게 몰아쉰다
네 모습이 편안하다
내 모습도 편안하다
―일간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8』 (2014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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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
아직
―유자효(1947∼)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일간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9』 (2014년 12월 17일)
—시집 『아직』( 시학,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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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풀눈꽃눈 뜨니
―이향지(1942∼)
배가 고프다. 땅거미가 가장 먼저 바위틈에서 기어 나온다. 엄동 직전 폭설에 떠밀린 냉동사마귀가 땅거미의 밥이다. 깊은 눈 속에 자연 저장되어 있던 냉동메뚜기 냉동여치가 땅거미의 밥이다. 풀눈꽃눈 뜨니, 깡총거미도 배가 고프다. 모두가 전광석화처럼 걸음이 빠르다. 풀눈꽃눈 뜨니, 모두가 먹을 것을 찾아서 동분서주한다. 뱀은 먹이를 먹기 전에 사랑부터 한다. 풀눈꽃눈 뜨니, 몸이 몸을 남기려는 몸부림.
<!--[if !supportEmptyParas]--> <!--[endif]-->
쑥 이파리가 새끼손가락을 펴기도 전에 칼날이 들어온다. 쑥쑥 자라는 쑥도 배가 고프다. 풀눈꽃눈 뜨니, 사람들도 들판을 헤맨다. 냉이는 얼음 속에서 꽃봉오리를 만든다. 냉이들은 잠도 안 자고 꽃대를 밀어 올린다. 냉이들은 납작 엎드려서 뿌리를 내린다. 풀눈꽃눈 뜨니, 사람과 풀들의 땅따먹기가 시작되었다.
―일간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0』 (2014년 12월 19일)
—시집 『햇살통조림』 (천년의시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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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ㅅ
―김현(1980∼)
말하렴
너에게 마지막 밤이 추적추적 내려올 때
너에게는 이야기가 있고
너는 이야기를 눈처럼 무너뜨리거나 너는 이야기를 비처럼 세울 수 있다
그 질서 있는 밤에
너에게 안개 또한 펄펄 내려올 때
들어보렴
맨 처음 네가 간직했던 기도를
너의 공포를
너의 공허를
너의 공갈을
점점 노래하렴
너의 구체적인 세계는 녹아내리고
너는 우리가 만질 수 없게 있어지지만
신앙과 믿음은 없거나 없어지는 것
그건 얼마나 적확한 죽음의 신비로움이겠니
너에게 먹물 같은 첫 빛이 쏟아져 내려온다
한순간 네가 살아 누워 있을 때
일 초 후
스물네 시간 후
삼백육십오 일 후
결국 쓸모없어질 기억들을
끝까지 기억하렴
아침까지 둘러앉은 술고래들을
평화로운 낭독의 데모를
한밤에 나눈 구강성교를
그래, 시옷
지난밤 거위 떼처럼
우리는 해야 할 말을 모두 다 했단다
침묵하렴
―일간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1』 (2014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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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비키니 옷장
―김윤한(1959∼)
지퍼를 열면
볼 시린 가족의 일상들이
차곡차곡 접혀 있었다
마당이 없었지만
대신 넓은 하늘이 있었고
바깥이 매섭도록 추웠으므로
연탄아궁이는 더 따뜻했다
단칸 셋방이었지만 언제나
방보다 수천 배 큰 꿈이 있었다
비록 좁은 방 한구석에서
맑은 가난을 지키고 서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시간에도
상징처럼 가족을 확인해 주는
온기 가득한 공간이었다
비록 눈 뜨면 가난했지만
지퍼를 닫으면
옷장에 그려진 꿈들이
수천 마리 나비가 되어 일제히
하늘 가득 날아오르곤 했다
―일간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2』 (2014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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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반도네온이 쏟아낸 블루
―정재학(1974∼)
항구의 여름, 반도네온이 파란 바람을 흘리고 있었다 홍수에 떠내려간 길을 찾는다 길이 있던 곳에는 버드나무 하나 푸른 선율에 흔들리며 서 있었다 버들을 안자 가늘고 어여쁜 가지들이 나를 감싼다 그녀의 이빨들이 출렁이다가 내 두 눈에 녹아 흐른다 내 몸에서 가장 하얗게 빛나는 그곳에 모음(母音)들이 쏟아진다 어린 버드나무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깊은 바다였다니… 나는 그녀의 어디쯤 잠기고 있는 것일까 깊이를 알 수 없이 짙은 코발트블루, 수많은 글자들이 가득한 바다, 나는 한 번에 모든 자음(子音)이 될 순 없었다 부끄러웠다 죽어서도 그녀의 밑바닥에 다다르지 못한 채 유랑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반도네온의 풍성한 화음처럼 퍼지면서 겹쳐진다 파란 바람이 불었다 파란 냄새가 난다 버드나무 한그루 내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일간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3』 (2014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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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공중전화 박스를 나오며
―최승철(1970∼)
방금 나간 여자의 체온이 수화기에 남아 있다. 지문 위에 내 지문이 더듬는 점자들, 비벼 끈 담배꽁초에 립스틱이 묻어 있다. 간헐적으로 수화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로운 사람은 쉽게 절박해진다. 모서리에 매달려 있는 거미의 눈빛이 여자의 체온으로 차가워졌다.
살아는 있니?
여름쯤 손가락에 눌려졌을 모기가 유리창에 짓눌려져 있다. 절박함 없는 희망이 있던가. 남자는 방금 나간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공중전화 박스를 나오다 관상용 소국(小菊) 하나를 툭, 쳐 본다. 여러 개의 꽃대궁이 동시에 흔들린다. 뿌리가 같은 이유다. 늦기 전이라는 노랫말이 죽기 전이라고 들리는 저녁, 애틋해서 되뇌이는 건 아니다. 차라리 살아서 날 미워해 버스 광고가 지나간다. 그저 당신이라고 부르고 싶은 계절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4』 (2014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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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1917∼1945)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艱辛)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5』 (2014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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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해를 보는 기쁨
―이해인(1945∼)
해 뜨기 전에
하늘이 먼저 붉게 물들면
그때부터
내 가슴은 뛰기 시작하지
바다 위로
둥근 해가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살고 싶고 또 살고 싶고
웃고 싶고 또 웃고 싶고
슬픔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어제의 내가 아님에
내가 놀라네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둥글고 둥근 해님
나의 삶을
갈수록 둥글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빛을 내는 해님
만나는 모든 이를
빛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6』 (2015년 0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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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죽
―강기원(1957∼ )
죽집에 간다
홀로, 혹 둘이라도 소곤소곤
죽처럼 조용한 사람들 사이에서
죽을 기다린다
죽은 오래 걸린다 그러나
채근하는 사람은 없다
초본식물처럼 그저 나붓이 앉아
누구나 말없이 죽을 기다린다
조금은 병약한 듯
조금은 체념한 듯
조금은 모자란 듯
조그만 종지에 담겨 나오는 밑반찬처럼
소박한 어깨들
죽집의 약속은 없다
죽 앞의 과시는 없다
죽 뒤의 배신도 없을 거라 믿는다
고성이 없고
연기가 없고
원조가 없고
다툼이 없는 죽집
감칠맛도 자극도 중독도 없는
백자 같은, 백치 같은 죽
무엇이든 잘게 썰어져야
형체가 뭉개져야
반죽 같은 죽이 된다
나는 점점 죽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요지를 이빨 사이에 낀 채 긴 트림을 하는
생고깃집과 제주흑돼지 오겹살집 사이에서
죽은 듯 죽집은 끼어 있다
죽은 후에도 죽은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7』 (2015년 0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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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맨발
―문태준(1970∼ )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8』 (2015년 01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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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을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맨발』.창비.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7』(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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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1901~1989)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救命帶)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9』 (2015년 01월 09일)
―『함석헌저작집’전30권 . 23권 수평선 너머』 (한길사, 2009.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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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발베개
정충화(1959∼ )
종각역 지하도를 지나다가
보았다
잠에서 깨지 않은 어느 노숙자의 한쪽 다리가
천장을 향해 들려 있는 것을
치켜진 무릎 끝이 뭉툭 잘려 있는 것을
잘린 무릎의 드러난 살갗으로
햇살에 비친 유빙(遊氷)처럼 푸른
빛이 내려앉아
그를 깨우고 있었다
사라진 발은
운동화도 벗지 않은 채
그의 머리 밑에 베개로 괴어져 있었다
깊이 팬 주름 고랑마다
노숙의 이력이 겹쌓인 얼굴 아래서
베개가 되어 함께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낮 동안 그의 몸을 떠받치던 발이
밤이면 다리를 빠져나와
고단한 잠을 베어줬던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0』 (2015년 0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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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
대물림
―편덕환(1937∼ )
연꽃이 떨어지고 나면
연 밭에는 연밥이 가득 꽂혀 있습니다.
나는 쪽배를 요기조기 띄워가며 연밥을 따지요
올해는 예년에 비해 풍년이 들어 많이 따게 되었습니다.
아까부터 우리 아버지께서는
정자나무 아래 등의자에 기대인 채 연밥 따는 아들 모습을 쳐다보고만 계셨습니다.
몇 십년간 떳떳하게 맡아 해 오셨던 일을 송두리째 넘겨주시고 손을 놨기 때문에 서운함을 느꼈던 때문일까요.
샘물은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듯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물림은
언제까지나 식지 않으며 뼈붙이로만, 뼈붙이로만 이어져가는 겁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1』 (2015년 0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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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만원을 바라보며
임영석(1961∼ )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바라본다
곳곳이 위조할 수 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해와 달이 하나뿐이라는 일월오봉도,
반으로 접어보니 해와 달이 한곳에 겹쳐진다
음과 양의 기가 한 곳에 만나 통하는 세상
얼마나 많은 문양을 완성해야 이루어진다는 말인가
또한 보는 각과 빛에 따라 나타나는 홀로그램은
그 이치가 사람의 마음처럼 보인다
이 만 원의 돈이면 한 달 치 소식을 전하는 월간 잡지를 사볼 수가 있고
어리광 부리는 조카딸의 입을 봉할 수도 있고
시인의 고단한 눈빛이 묻어 있는 시집 한 권을 사 볼 수 있는데
이 만 원이 내 삶의 표현을 갉아 먹고 있다
얼마나 많은 이 세상의 말을 압축해 놓았으면
돈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할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2』 (2015년 0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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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메리 올리버(1935∼ )
어쩌면 세상이 평평하다는 생각은 부족적 기억이나 원형적 기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여우의 기억, 벌레의 기억, 이끼의 기억인지도 몰라.
모든 평평한 것을 가로질러 도약하거나 기거나 잔뿌리 하나하나를 움츠려 나아가던 기억.
지구가 둥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현상―직립―이 필요했지.
이 얼마나 야만적인 종족인가! 여우와 기린, 혹멧돼지는 물론이고. 이것들, 작은 끈 같은 몸들, 풀잎 같고 꽃 같은 몸들! 코드그래스(해안 습지에서 자라는 볏과 식물), 크리스마스펀(밀집된 단단한 잎을 가진 상록 양치식물), 병정이끼(원래 명칭은 British Soldiers로 빨간 열매가 달린 게 독립전쟁 당시 빨간 모자를 썼던 영국군과 닮아 이름 붙음)! 그리고 여기 작은 흙더미 위를, 발톱과 무릎과 눈으로 뛰어다니는 메뚜기도 있지.
나는 가을에 장작더미에서 검은 귀뚜라미를 보면, 겁을 안 주지. 그리고 바위를 좀먹는 이끼를 보면, 다정하게 어루만져,
사랑스러운 사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3』 (2015년 0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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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수술 전야
―박덕규(1958∼ )
입원하러 가기 전날 밤
갚아야 할 빚을 다 적어 놓아야겠다고
몰래 스마트폰 빛을 밝히며 책상 앞에 앉았다가
서랍에서 발견한
십 년 전 낙서.
그 시절
원인 모를 복통에 시달리며
배를 움켜쥐고 쓴.
하느님,
제가 일 잘 하는 사람인 줄 알고
빨리 불러 일 시키실 작정을 하시면 곤란해요.
하느님,
아직 처리할 게 많아요.
제발 빚 좀 다 갚고 가게 해 주세요.
하느님, 아니 하나님이라도 좋아
제발 십 년만 더 살게 해 주세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4』 (2015년 01월 21일)
―시집『골목을 나는 나비』 (서정시학,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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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소릿길
-박진형(1954~)
몸이 마음을 버릴 때
베란다에 내어놓은 두메양귀비 핀다
연노랑 꽃등이 나를 가만 흔들다가
천구백사십년의 리화듕션에게 데려간다
모시나비는 거미줄에 날개 찢긴 채 울고 있다
복각판에서 찍찍 풀려 나오는
저 소리는 우화(羽化)다
소리로 세상을 촘촘히 읽다니
두메양귀비 곁에서 소리와 몸 바꾼
그대 빈 몸 껴안고 울며 지샌 밤이 있다
그런 밤에는 내 마음 한 가닥
팽팽하게 잡아당겨
청둥오리 떼 날아간다
청둥오리 가는 길
몸이 마음을 버리고 등선(登仙)하는
저 소릿길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5』 (2015년 0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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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
몰핑
김철식(1967∼ )
해 저무는 저녁이면
강변 송신탑 꼭대기에 오르곤 하지
바람을 거슬러 비껴 오르면
굽이치는 저 강물의 진짜 거처가 어딘지 알 수 있지
허공의 한기(寒氣)도 건드리지 못하는
그리움의 정체도 만져지지
더 높은 곳이 도심으로 많이도 내려다보이지만
여기는 정상, 거미처럼 착 달라붙어
내 몰락의 정상을 소리 높여 노래할 수 있지
들어주는 이 누구 없고
분주한 세상 풍경은 아득히 멀고
혼자일 때 파탄의 신호는 더욱 감미로워
귀만 가만 열어두고
저 격세(隔世)의 송신음을 좇아 무한의 아래로 내려가지
전율에 떨면서
사랑이라는 혼선(混線)의 물바람을 가르면서
몸 구석구석에서 타락을 꿈꾸는 섬모들이 길을 내주지
잊혀지지 않는 저녁의 어두운 시간들은 언제나
탑의 철침으로 먼저 와 꽂히고
순간의 몰핑으로 아우성치며 절정에 오르지
밀어내도 밀쳐지지 않고
배척해도 굴복하지 않는
시간의 고압선을 타고 종생(終生)을 향해 치닫지
아, 그러면
그제야 환히 보이는 것
일몰의 흔적들 뒤로 간절히 내게 구애하는 것
기억이 형질 변화를 일으키며 내지르는 환희
비루한, 너무나 비겁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6』 (2015년 0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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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
시래기 한 움큼
―공광규(1960∼ )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 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미운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7』 (2015년 0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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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주원익(1980∼ )
우리가 마지막으로 내뱉어야 했던
관념의 오물들이 관념으로 뒹굴고 있다
흰빛,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로
그것은 때때로 달아나고 미소 짓고 불을 가져온다
강물은 낮을 가로지르고 밤을 위해 잠들었다
돌무더기를 끌고 발자국을 지우며 물소리
들리지 않는 그곳으로 우리는 쓰러져야 했다
쓰여져야 한다 버려진 문장들은 구름의 뼈를 부수고
세상의 빈약한 나뭇가지를 부여잡을 것이다
들판을 거닐다가 굶주린 갈까마귀처럼
우리가 마지막으로 더럽혀야 했던 오지에서
꽃 핀 나무들이 자라나고 흰빛,
헤매고 충돌하는 유령의 관념들아
우리가 처음 버려져야 했던 우리처럼 떨어진다,
그곳으로 떨어지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8』 (2015년 0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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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우포 여자
권갑하(1958∼ )
설렘도 미련도 없이 질펀하게 드러누운
그렇게 오지랖 넓은 여잔 본적이 없다
비취빛 그리움마저 개구리밥에 묻어버린
본 적이 없다 그토록 숲이 우거진 여자
일억 오천만년 단 하루도 마르지 않은
마음도 어쩌지 못할 원시의 촉촉함이여
생살 찢고 솟아오르는 가시연 붉은 꽃대
나이마저 잊어버린 침잠의 세월이래도
말조개 뽀글거리고 장구애비 헐떡인다
누가 알리 저 늪 속 같은 여자의 마음
물옥잠 생이가래 물풀 마름 드렁허리
제 안을 정화시켜온 눈물 보기나 했으리
칠십만 평 우포 여자는 오늘도 순산이다
쇠물닭 홰 친 자리 물병아리 쏟아지고
안개빛 자궁 속으로 삿대 젓는 목선 한 척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9』 (2015년 0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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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은는이가
정끝별(1964∼ )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0』 (2015년 02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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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옛날 생각
이능표(1959∼ )
1.
가끔, 아주 가끔
물에 잠긴 그림자를 길어 올리듯이
나는 옛날 노래를 들어.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
가끔, 아주 가끔
이마를 짚고 뒤를 봐.
죽은 사람이 말을 걸듯이
가끔, 아주 가끔
2.
가끔, 아주 가끔
죽은 사람이 말을 걸듯이
이마를 짚고 뒤를 봐.
가끔, 아주 가끔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
나는 옛날 노래를 들어.
물에 잠긴 그림자를 길어 올리듯이
가끔, 아주 가끔
3.
나는 옛날 노래를 들어.
이마를 짚고 뒤를 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1』 (2015년 0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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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최정례(1955∼)
여자는 빨래를 넌다
삶아 빨았지만 그다지 하얗지가 않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햇빛이 동쪽 창에서 서쪽 창으로 옮겨가고 있다
여자는 서쪽으로 옮겨 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살기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지
서쪽 창의 햇빛도 곧 빠져나갈 것이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봄이 있었다
어떤 시는 오래 공들여도 거기서 거기다
억울한 생각이 드는데 화를 낼 수도 없다
어쨌든 네가 입게 된 옷이야
벗어버릴 수는 없잖아 예의를 지켜
얼어붙었던 것들은 녹으면서
엉겨 매달렸던 것들을 놓아버린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들을 붙잡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이따위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형이 다니는 피아노교습학원 차를
타고 싶어서 쫓아갔다가 동생이
피아니스트가 되었다는 얘기
그가 라디오에 나와 연주하고 있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멀리 산이 보였었는데
이 집은 창에 가득 잿빛 아파트뿐이다
전에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된 것
우연은 간곡한 필연인가
우연이 길을 헤매는 중인데 필연이 터치를 했겠지
그래서 여기에 이르렀겠지
잃어버린 봄, 최초로 길을 잃고 울며 서 있었던 것은
여섯 살 때인 것 같다
피아노의 한 음이 이전 음을 누르며 튀어오른다
우연과 필연이 서로 꼬리를 치며 꼬드기고 있다
문득 서쪽 창으로 맞은편 건물의 그림자가 들어선다
퇴근하는 지친 몸통처럼 어둡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2』 (2015년 0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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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새들은 아직도……
―최영미(1961∼ )
아스팔트 사이 사이
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위에
휘영청 쏟아질 듯 집을 짓는구나
된바람 매연도 아랑곳 않고
포클레인 드르륵 놀이터 왕왕시끌도
끄떡없을 너희만의 왕국을 가꾸는구나
부우연 서울 하늘 무색타
까맣게 집을 박는구나
봄이면 알 낳고 새끼 치려고
북한산 죽은 가지 베물고
햇새벽 어둠 굼뜨다 훠이훠이
부지런히 푸들거리는구나
무어 더 볼 게 있다고
무어 더 바랄 게 있다고
사람 사는 이 세상 떠나지 않고
아직도
정말 아직도 집을 짓는구나
게으른 이불 속 코나 후빌 때
소련 붕괴 뉴스에 아침식탁 웅성거릴 때
소리 없이 소문 없이
집 하나 짓고 있었구나
자꾸만 커지는구나
갈수록 둥그래지는구나
봄바람 싸한 냄새만 맡아도
우르르 알을 까겠지
모스크바에서도 소리 없이
둥그렇게 새가 집을 지을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3』 (2015년 0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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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
물리치료
이정주(1953∼ )
여자는 내 어깨 아래 핫백을 밀어 넣는다
나는 데워진다
따뜻하고 어지럽다
여자는 내 어깨에 멘소레담을 바르고 근육들을 만진다
시원하고 아프다
여자는 내 어깨에 전극을 붙이고 스위치를 올린다
찌릿찌릿하고 간지럽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미진하다
이 통증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내 팔은 다른 것을 찾고 있다
지난여름의 돌을 더듬고 있다
돌에 걸려 넘어져 얼굴이 처박혔던
백사장을 더듬고 있다
얼굴 쳐들고 하늘로 뿜었던 욕설을 그리워하고 있다
옆에서 박수치며 웃던 여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여자에게 인사한다
여자는 나를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여자는 이미 다른 사람을 데우고 있다
목이 마르다
하늘에 맑은 물 한 잔과
붉은 알약 하나가 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4』 (2015년 0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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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
동질(同質)
조은(1960∼ )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지금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말이꼭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를 생명처럼 잡고 있는
절박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신도 사람도 믿지 않아
잡을 검불조차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꾸벅꾸벅 졸았다
답장을 쓴다
―시험꼭잘보세요행운을빕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5』 (2015년 02월 16일)
―시집『생의 빛살』(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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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바람에게
김지하(1941∼ )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바랄 것은
몹시도 시장한 중에
눈 밝혀 찾아먹는 밥 한 그릇
배부르면 배 두드려
대중없이 부르는 밥노래 한 가락뿐
춘란 뽑혀
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
못생긴 여뀌닢으로 잔뜩
비틀어져 내 다시 났으니
바람아
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
새 햇살로 흔들려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6』 (2015년 0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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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송가(送歌)
이재무(1958∼)
모두들 그렇게 떠났다
눈결에 눈물꽃송이 몇 개
띄운 채
입으론 쓸쓸히 웃으면서
즐거웠노라고
차마 잊을 순 없겠다는
말 바늘 끝 되어
귓속 아프게 하고
인연의 매듭 풀면서
가늘게 떠는 어깨
두어 번 두드리고 떠난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아도 돌아오리란
믿음 지키며 저무는 강가
물살에 닳은 조약돌로 앉아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밤을 맞았다
그런 날들의 먼 인가의 불빛은
물빛으로 반짝거렸고
살아온 생이
뿌리에서 떨어져 나온 나뭇잎처럼
쓸쓸했다 강물은 뭍으로 올라와
생의 출발을 서두르고 재촉했지만
사소한 바람에도
낮고 축축한 울음을 낳던
갈대의 몸에 묶인 마음을
끝내 움직이진 못했다
조약돌에 이끼가 살고
물때가 제법 무성해지자
어느 먼 마을에서 온
개망초 하나
눈물인 듯 울음인 듯
내 곁에서 꽃을 피웠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7』 (2015년 0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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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잘 익은 사과
김혜순(1955∼ )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8』 (2015년 02월 25일)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5』(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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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생각의 사이
―김광규(1941∼ )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9』 (2015년 0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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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
꽃 보자기
이준관(1949∼ )
어머니가 보자기에 나물을 싸서 보내왔다
남녘엔 봄이 왔다고.
머리를 땋아주시듯 곱게 묶은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아지랑이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녘 양지바른 꽃나무에는
벌써 어머니의 젖망울처럼
꽃망울이 맺혔겠다.
바람 속에선 비릿한 소똥 냄새 풍기고
송아지는 음메 울고 있겠다.
어머니가 싸서 보낸 보자기를
가만히 어루만져 본다.
식구들의 밥이 식을까봐
밥주발을 꼭 품고 있던 밥보자기며,
빗속에서 책이 젖을까봐
책을 꼭 껴안고 있던 책보자기며,
명절날 인절미를 싸서
집집마다 돌리던 떡보자기며,
그러고 보면 봄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냈나 보다.
민들레 꽃다지 봄까치풀꽃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꽃 보자기에 싸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0』 (2015년 03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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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신현림(1961∼ )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자살한 장국영을 기억하고 싶어
영화 ‘아비정전’을 돌려 보니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네요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해요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들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전쟁으로 사스로 죽어가더니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살자들
살기엔 너무 지치고, 휴식이 그리웠을 거예요
되는 일 없으면 고래들도 자살하는데
이해해 볼게요 가끔 저도 죽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죽지는 못해요 엄마는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되죠
이 세상에 무얼 찾으러 왔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마음을 주려 하면 사랑이 떠나듯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절벽이 달려옵니다
시를 쓰려는데 두 살배기 딸이
함께 있자며 제 다릴 붙잡고 사이렌처럼 울어댑니다
당신도 매일 내리는 비를 맞으며 헤매는군요
저도, 홀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1』 (2015년 03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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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
춘신(春信)
―유치환(1908∼1967)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 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2』 (2015년 03월 06일)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2003)
―시집 「생명의 서」(행문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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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
선물
정다혜(1955∼ )
갱년기 우울증으로 한동안 소식 끊겼던 친구,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어 첫눈처럼 찾아왔지 뭐예요. 깍쟁이 그 친구 갈빗집에서 밥까지 샀어요. 그 이유가 궁금한데도 그냥 싱글벙글 했지요. 무슨 이유가 있는지 무슨 비법이 있는지 따지듯이 묻자 마지못해 입을 열듯 선물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친구. 그 선물이 커다란 다이아몬드인지 값이 오른 부동산인지 몰라 궁금증이 들끓는데, 그 뜨거움 단숨에 식히는 친구의 고백. 열흘 전에 첫 손자를 선물 받았어!
사람의 상처는
사람으로 치료된다는 것을
예순에 손자를 선물 받고
할머니란 이름을 선물 받고
단숨에 알아버렸다는 친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3』 (2015년 03월 09일)
―시집 『마지막 출근』(문학의전당, 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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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장석남(1965∼ )
1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
찌르라기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
저녁 하늘을 업고 제 울음 속을 떠도는
찌르라기떼 속에
환한 봉분 하나 보인다
2
누군가 찌르라기 울음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봄 햇빛 너무 빽빽해
오래 생각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저 새떼들이 나를 메고 어디론가 가리라,
저 햇빛 속인데도 캄캄한 세월 넘어서 저기 울음 가파른 어느
기슭가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안다
찌르라기떼 가고 마음엔 늘
누군가 쌀을 안친다
아궁이 앞이 환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4』 (2015년 03월 11일)
―시집 『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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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산양
―고이케 마사요(1959∼ )
호타카의 깊은 산속 온천에서
산양과 마주쳤던 다섯 살 가을
산양은 발소리도 없이 다가와
자옥한 수증기 속에서 알몸인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산양을 물끄러미 맞바라보았다
무리에서 벗어난 산양과
외톨박이로 홀로 있던 나
나는 손으로 온천물을 떠서
산양을 향해 뿌렸다
말 대신 건넨 인사였는데
산양은 조금 놀란 듯했다
온천물에 젖은 산양의 가슴털은
산양의 외로움이 젖은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 숲을 쓸고 갔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이윽고 산양은 조용히 몸을 돌리더니
가만가만 뛰어 산을 향해 되돌아갔다
꿈을 꾸듯 온천물에
깊은 밤 살며시 발끝을 담그면
자옥한 수증기 너머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그때 만난 산양이
틀림없이 찾아오리라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아득한 우주의 시선으로
가슴털의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5』 (2015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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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
반짝반짝
임경섭(1981∼ )
무츠키가 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애벌레가 꿈틀거리는 가을이었고
달이 환한 밤이었다
무츠키는 부모와 함께
비탈진 솔숲 사잇길을 걷고 있었다
한손으로는 어머니의 검지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중지와 약지 사이에
잠든 잠자리의 날개를 끼워 든 채
무츠키는 울창하게 웃자란 낙엽송 가지 사이로
부서진 달빛을 바라보면서
부모를 따라 걷고 있었다
내리막이 시작되자 달빛 대신 여러 채의
다락이 있는 집들이 뿜는 희미한 불빛이
별자리처럼 흔들렸다 무츠키가 달빛을 놓치고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릴 즈음이었을까
무츠키의 머리 위로 털 한 뭉치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무츠키의 부모는 허리를 굽혀
자식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털이 아니었다
무츠키의 부모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것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츠키의 어머니는 혼신의 힘으로 팔을 휘둘러
자식의 머리통을 휘갈겼고
무츠키의 아버지는 사력을 다해 두 발로
바닥에 떨어진 송충이를 여러 차례 짓이겼다
무츠키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무츠키의 부모는 흉측한 벌레로부터
자식을 구해낸 것에 안도했지만
무츠키는 달랐다
그는 부모가 징그럽다고 하는 것이 왜
징그러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을 때리고 밀치면서까지 고요를 짓밟아버린
부모를 언제까지 미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 식구가 지나간 자리 위로
울퉁불퉁한 비탈길이 환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6』 (2015년 0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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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
그이 얼굴
―김연희(1981∼ )
돈이 없어서 힘들었다
맛있는 거 못 사 먹고
기저귀도 못 사고
갑자기 똑 떨어지니 어떡해
이럴 줄 몰랐는데 어떡해
난 몰라
난 몰라
생기겠지
생기겠지?
저녁에 해지고
애들이랑 구루마* 끌고 온 그이 마중
문 앞에서 그이가 웃는다
그을린 얼굴엔 찌든 땀이 가득
돈 많이 벌었어
십만 원 가까이 벌었다
그래서 맛있는 거 먹고
기저귀도 사고.
* 내 남편 한받은 ‘구루부 구루마’를 끌고 홍대 앞을 다니며 음반과 책을 판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7』 (2015년 0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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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은혜와 원수 맺음을 경계하였건만
―송일순(1950∼
찬바람 부는 강변길을
아무 생각 없이 걷던 겨울밤
꽥! 꽥! 꺅! 꽥!
새가 괴이하게 울며
푸덕푸덕
강변 둔치로 날아들고 있었다
순간 큰 소리로
너 왜 그러니?
그러자
날아 앉던 새가
흠칫! 한다
그때
새의 앞발에 채어 비명을 질러대던
작은 새 한 마리가
수리부엉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며
어둔 창공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 간다
나 이제껏
은혜와 원수 맺음을 경계하여 왔건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8』 (2015년 0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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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
혼선
―전영미(1978∼ )
돌은 돌의 말을 하고
나무는 나무의 말을 하고
바람은 바람의 말을 한다
당신은 당신의 말만 하고
나는 내 말만 한다
한데 뒤섞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당신을 향하던 내 말은
당신에게 가기도 전에 뒤섞이고 만다
서로의 말은
한 번도 서로의 말인 적이 없다
당신의 말은 당신의 것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9』 (2015년 0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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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
세월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샘 레벤슨(1911∼1980)
매력적인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하게 말하십시오.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보십시오.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배고픈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십시오.
아름다운 머릿결을 원한다면
하루에 한 번 어린아이에게
그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도록 하십시오.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싶으면
그대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며 걸으십시오.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인 인간은
회복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며,
소생되고,
교화되며,
구원받아야 합니다.
결코 그 누구도 버려져서는 안 됩니다.
그대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당신의 팔 끝에 손이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대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당신은 두 개의 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 손은 그대 자신을 도와주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손입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0』 (2015년 0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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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
봄, 소주
―김완(1957∼ )
벚꽃잎 분분분 날리는
부곡정에 들어선다
연탄불 돼지 삼겹살 구이
상추에 마늘, 매운 고추 얹어
된장 쌈 하니
세상살이 여여(如如)하다
도가지 헐어 내온 갓지에
소주 한 잔 하니
가야 할 길들 환해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1』 (2015년 0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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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
희망촌 1길
―임형신(1948∼ )
은사시나무 포자가 눈처럼 날리는 언덕에 희망촌이 있다 상계4동 배수지 아래 철거민들이 모여들어 사십 년 넘게 희망을 먹고 산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마다 만신들의 깃발이 펄럭이고 그 옆에 엉거주춤 태극기도 붙들어 매져 있다
기울어진 담벼락에 나팔꽃 씩씩거리며 올라간다
사금파리에 찔린 청도라지
독기를 뿜고 웃자라는
한 뼘의 마당
대낮은
텅 비어 있다
무허가 봉제 공장 사라지고 교회가 들어섰다 목공소 있던 자리 단청 고운 절도 하나 들어앉아 서로 마주보며 희망 한 줌씩 나누어 준다 겨우살이풀처럼 늘어져 있는 할머니들 등 뒤 며느리밥풀꽃도 기웃거리고
만신들의 깃발이 휘청거린다
오늘 또 무엇이 들어와서
어떤 희망 한 줌
뿌리고 가려나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2』 (2015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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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
월요시장
―여태천(1971∼ )
어제와 같이 오늘의 날씨를 생각하며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본다
향료를 싣고 인공의 도시를 찾아다니는
푸른 눈의 낙타
길게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걸어오고 있다
도시의 사막에서 발이라도 빠질까
조심조심 걷는다
되새김질을 하며 얇은 모래의 언덕을 오르는
낙타의 가쁜 숨소리 덜 덜 덜
오래 된 아라비아의 음악이 들린다
전국적으로 황사가,
기상 캐스터의 또박또박한 음성이
모래의 귀를 밟고 지나갔다
단단하게 굳은 모래의 집들 사이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웅성거린다
늙은 낙타의 등에서는 재빨리
지중해의 과일과 고랭지 채소가 내려지고
천막 안에는 남태평양의 비린내를 풍기며 생선이 쌓인다
풀 한 포기 없는 곳에 장이 선다
오늘은 비를,
며칠째 물과 먹이를 찾고 있는 원시인의 표정으로
창밖을 본다
영 글렀다
황사는 벌써 아파트 단지를 점령한 모양이다
혹시나 비라도 오면, 그래서
이 오랜 사막의 구릉을 내려갈 수 있다면
햇빛이 황사와 부딪혀 나는 소리가
들리다 말다 그랬다
움직일 때마다 바싹 마른 몸이
먼지를 피우며 스르르 흘러내렸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3』 (2015년 04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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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
달걀
고영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창을 닫았다.
어둠을 뒤집어 쓴 채 생애라는 낯선 말을 되새김질하며 살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집은 조금씩 좁아졌다.
강해지기 위해 뭉쳐져야 했다.
물속에 가라앉은 태양이 다시 떠오를 때까지 있는 힘껏 외로움을 참아야 했다.
간혹 누군가 창을 두드릴 때마다 등이 가려웠지만.
房門을 연다고 다 訪問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위로가 되지 못하는 머리가 아팠다.
똑바로 누워 다리를 뻗었다.
사방이 열려 있었으나 나갈 마음은 없었다. 조금 더 착한 새가 되기 위해서
나는 아직 더 잠겨 있어야 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4 (2015년 04월 03)
—월간『현대시학』(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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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
묵매(墨梅)
―강영은(1956∼ )
휘종의 화가들은 시(詩)를 즐겨 그렸다
산 속에 숨은 절을 읊기 위하여 산 아래 물 긷는 중을 그려 절을 그리지 않았고 꽃밭을 달리는 말을 그릴 때에는 말발굽에 나비를 그리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 몸속에 절을 세우고 나비 속에 꽃을 숨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었다
사람이 안 보인다고 공산(空山)이겠는가
매화나무 등걸이 꽃피는 밤, 당신을 그리려다 나를 그렸다 늙은 수간(樹幹)과 마들가리는 안개비로 비백(飛白)질하고 골 깊이 번지는 먹물 찍어 물 위에 떠가는 매화 꽃잎만 그렸다 처음 붓질했던 마음에 짙은 암벽을 더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4』 (2015년 04월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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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
황홀
―허형만(1945∼ )
세상의 풍경은 모두 황홀하다
햇살이 노랗게 물든 유채꽃밭이며
유채꽃 속에 온몸을 들이미는 벌들까지
황홀하다 더불어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내가 다가가는 사람이나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모두
미치게 황홀하다 때로는 눈빛이 마주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오, 황홀한 세상이여 황홀한 세상의 풍경이여 심장 뜨거운 은총이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6』 (2015년 04월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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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
강남춘(江南春)
―이흔복(1963∼ )
산에 산에 두견 너는 어이 멀리를 우짖는가. 너는 어이 가까이를 우짖는가. 달 가운데 계수나무 그늘도 짙을러니 내 후생하여 너를 엿듣는 봄은 이리도 화안히 유난하다.
일찍이 내가 먼 곳을 떠돈 것이 내가 나를 맴돎이었으니, 미쳐 떠돎이 한결같이 쉬지 않았으니 도화는 붉고 오얏꽃은 희며 장미꽃은 붉다.
꽃은 꽃대로 잎은 잎대로 가끔 슬쩍 앞자리를 다투는 듯 나고 죽고 가고 온다.
날마다 당당(堂堂)하여 천천만만의 산 멀리서 바라볼 때는 앞에 서 있더니 어느새 뒤에 서 있다.
오늘 맑은 바람만 두루 불어 뿌리 없는 눈(眼) 속의 꽃을 오며 흩고 가며 흩으면서 그침이 없으니 아름다운 날들은 점점 멀어지고 나는 홀연 서러워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5』 (2015년 04월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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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
전화
―데이비드 예지(1966∼ )
전화가 올 때 당신은 외출 중이다. 메시지를 듣고
답신을 하자, 그다지 친하지 않은 누군가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의 파트너가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그녀는 당신이 개인적으로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떠나버렸는지를.
그녀는 당혹해하고 당신은 그녀에 대해 가슴아파한다.
다소 혼란스럽기는 하다. 사실 친구가 아닌 때문이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사람.
게다가 만날 때마다 솔직히 끔찍했던 사람.
당신은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물론 그녀에게가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다.
당신은 죄의식을 느끼고, 또는 죄의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그때,
그의 이미지가 보다 선명하게 떠오른다.
니코틴에 찌든 손가락과, 철망에 걸린
사막의 잡초 같은 머리칼. 언제나
신을 붙들고 퍼부어대던 탐욕스러운 말투.
추하고 역겨운 입 냄새.
그래, 이젠 다신 그런 일은 없으리라.
친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을 보면 언제나 먼저
알은척을 하던 그가 이제 다시는 인사를 건넬 수 없다.
그런데 이 예기치 못한 역겨움은
감이 아니라 왜 후회 같은 것인지.
그런 일은 전혀 예고도 없이 찾아든다.
그리고 당신을 가장 괴롭혔던 그 일이―어쩌면 그의 웃음이―
당신이 그리워하고, 그리워한다고 생각하고, 듣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음악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는 가버렸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8』(2015년 04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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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
김경윤
―오하룡(1940∼ )
그는 김경윤입니다 그와 어머니는 서른 살 차이고 나와는 쉰 살 차이였습니다 나이 따위 세상을 알고 난 후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나이가 걸리적거리던지 두 분 사이 어색히 여긴 일 지금도 사과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떻든 이승의 한 갈래 길에서 어머니는 그의 팔을 잡게 되고 나도 그냥 그의 한쪽 팔을 잡고 동행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시원하게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른 해를 한참씩 딴 길을 가다간 다시 합류하고 딴 길을 가다간 합류하다가 그는 여든다섯에 이승을 떠나고 어머니도 그로부터 열두 해를 더 보내고 예순아홉에 떠났습니다 지금 호젓이 그와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그들과 동행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이름을 되새겨 보고 있습니다 나와 동행이어서 그의 발걸음이 허둥거리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9』(2015년 04월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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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Edges of illusion (part VII)
정재학(1974∼ )
바다에 가라앉은 기타,
갈치 한 마리 현에 다가가
은빛 비늘을 벗겨내며 연주를 시작한다
소리 없는 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부끄러워져
당분간 손톱을 많이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백 개의 손톱을 기르고 날카롭게 다듬어
아무 연장도 필요 없게 할 것이다
분산(奔散)된 필름들을 손끝으로 찍어 모아
겹겹의 기억들 사이에서
맹독성 도마뱀들이 헤엄쳐 나오도록 할 것이다
달의 발바닥이 보일 때까지
바다의 땅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나도 나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
네가 고양이처럼 예쁜 얼굴을 하고 딸꾹질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보라색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생선이 되어 너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0』(2015년 04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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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시 100주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100 (목록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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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 ~ 50) - 목록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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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년 한국인의 애송童詩 (1 ~ 50) - 목록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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