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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제목의 시 - 조혜경/김현희/김선재/마경덕/박미라/김이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8. 2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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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의 취향

 

  조혜경

  

 

  나 한때 바람을 좋아했죠 바람 없는 <스노우 볼> 속의 하루는 심심하죠 폭동도 소요도 없는 그 곳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요 아버지도 바람을 좋아했죠 나뭇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 구름을 흩어놓고 가는 바람 때론 지붕을 걷어가는 바람 바람은 오늘 내 눈동자 안에서 불어요 상쾌한 씨눈을 숨긴 채 유리창을 넘고 담장을 넘고 태평양도 건너지요 바다 깊숙이 들어가 고래가 된 사나이의 이야기도 바람결에 들었죠 사내의 척추에 숨어든 숨결이 물방울 타고 해초 타고 결국 수돗물을 타고 우리 사무실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은 그 바람을 못 본척해요 하지만 콧등에 귓속에 옷자락에 감추고 퇴근하죠 그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아요 거리엔 스카프가 날립니다 콧노래가 날립니다 높은 빌딩의 허리가 살짝 휘었다 돌아옵니다 한강 위 철교가 잠시 출렁입니다 아버지는 바람을 좋아했죠 그 바람이 아버지를 좋아했죠 당신들 눈 속에서 천천히 조그맣게 둥근 원을 그리며 돌고 돌고 또 도는 바람이 한때 나를 좋아했죠

 

 

 

ㅡ계간『시산맥』(201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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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의 취향


김현희

 


불을 살리고 죽이는 일은
장작이 아닌 아궁이의 힘


차곡차곡 나무를 쌓아올려 엉성한
피라미드를 만든 후
신문지 반쪽으로 불의 출발을 알린다
불꽃을 왕성하게 하거나 사그라지게 하는 건
오로지 아궁이의 마음
숨쉬기 좋은 날 햇빛 맑은 날이면
유순한 불길 순한 불씨도
바람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덩달아 여기저기
사나운 꽃을 피워 올린다
장작이 숨긴 작은 습기에도
숨통을 닫아버리는 아궁이의 생각은 건조하다
굴뚝으로 역류된 바람에 왈칵
울분을 삼키지 않고 뱉어 버리는 불구멍
볏짚 아카시 소나무 잔가지들 한 아름 밀어 넣어도
불같은 뚝심을 뚫어야만
불 맛을 볼 수 있는 가마솥과 아랫목
아궁이가 좋아하는 바싹 마른 소나무
입맛에 맞으면 탁, 탁, 탁, 즐거운 소리로 답한다


아궁이의 취향을 통과한
꽃불의 열렬함과 뒷불의 은근함에 지친 허리를 편다

 

 


ㅡ계간『시에』(2012.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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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시의 취향


  김선재
 

 

   거친 잠이 조금만 다정해진다면 나는 나와 너 사이에서 너를 만날 텐
데 물론 주로 먼 곳의 얘기를 하겠지 이를테면 숲이 물이 되는 꿈 물이
몸이 되는 꿈


   옛날 얘기를 해줄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잊어버린 기억에 대한 잃어
버린 이야기 저녁의 세계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코끼리의 코와 잠자리의
잠에 대해 열두 시에서 열두 시까지


   사랑한다 말하지 말아요, 열두 시에서 영 시까지

   미워한다고도 말하지 말아요, 영 시에서 열두 시까지

 
   주어는 얼마든지 어떻게든 어디론가 쓸쓸한 기침을 콜록거리고

   녹슨 나사의 회전은 병적으로 반짝거려

   나는 다정한 동사를 쓰기에 너무 늙었다

   지나치게 부끄럽지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언제든지 어디서나


   그러니 내일의 얘기를 해줄래 그리 멀지 않은 마른 첫 입술에 대한
말라버린 생각 기약 없이 기대하는 익숙한 끼니의 방식으로 고슴도치의
부드러운 동면에 대해 영 시에서 영 시까지

 
   창을 넘어온 바람이 커튼을 어루만져서

   익숙하게 멀고 다정하게 침울한 우리들

   아주 작은 자전을 기록한 어느 날에는

   슬프지 않게 슬퍼하다 죽을 수 있을까

 
   검은 것과 흰 것 사이의 내일은

   펜이 종이로 향하는 마음에서

   종이가 하늘로 흐르는 마음과

   나무가 들판을 달리는 마음으로


   늙지 않는 바람에서 속지 않는 나무까지

 
   꽃이 피거나 꽃이 지거나

   새가 웃거나 새가 울어도

   잡담 같은 길은 끝나지 않으니

 
   오늘의 취향과는 이제 안녕입니다

 

 


ㅡ계간『문학과 사회』(2011년 봄호)
ㅡ시집『얼룩의 탄생』(문학과지성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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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취향

 

마경덕

 

 

지상으로 귀향하는 저것들

추락하는 순간, 제가 태어난 곳을 알게 된다

까마득한 하늘로 유학을 떠난 것은

모두 되돌아오기 위함이었다

 
도시에 거주한 구름들은 호기심이 많은 십대나 이십대

놀이공원 지붕에 걸터앉아 거울을 보고 있다면 사춘기가 분명하다

이때부터 인증샷 셀카를 찍고 강과 바다에 대한 질문이 많아지고

제 몸 구석구석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잘록하게 허리를 조이고 키높이 깔창을 깔고

저녁노을에 머리를 염색하러 우르르 몰려간다

 
양떼 조개 새털로 카드놀이를 시작하면

성인이 되었다는 2차 성징, 먼 하늘을 훔쳐보거나

층운이 다른 구름에게 접근했다가 따귀를 맞고 돌아와

미모의 인어구름을 들여오자고 익명으로 댓글을 단다

점심시간에 떠돌이 바람과 접속하고 번번이 자리를 이탈한다

 

이것들은 모두 설문지에 기록된 일상적인 통계

간혹, 별종도 있어 여우비와 교제를 하다가 하늘 학적부에서 제명되기도 하는데,

 
천 길 낭떠러지에서 점프를 하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것,

번개 천둥 돌풍을 다룰 수 있으면 조기졸업도 가능하다 체류기간이 짧은

구름의 손바닥을 펴보면 번개에 감전된 흔적이 있다

 
스미거나 박살나거나 흘러가거나, 그것은 개인의 취향이다

 

 

 
ㅡ계간『시와 미학』(2011.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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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귀의 취향


박미라

 


누군가 숨죽여 울고 있다 앙다문 이빨 사이로 줄줄 새는 울음소리다 아니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다 아니다

 
큰비가 온다는 전갈이다 빗줄기보다 먼저 도착한 빗소리이다


잠 깨니 창밖은 햇볕이 쨍쨍


낯선 빗소리에 대하여 내 오른쪽 귀에게 묻기로 한다


귀에서 나는 소리를 귀에게 묻는다

 
이것은 최근에 시작된 내 오른쪽 귀의 취향


달팽이관 가득 빗소리를 쌓아둔 듯

 
밤낮으로 들리는 빗소리 때문에 세상의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


내가 즐기는 소리의 목록에도 빗소리가 있지만 소리로 소리를 지우는 건 뜻밖의 횡포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와 유리컵 깨지는 소리를 혼동한 날부터 시작된

 
오른쪽 귀의 소심한 반란

 
색깔을 뒤섞으면 검정이 되듯 소리를 뒤섞으면 침묵이 된다니


몸 속 어딘가의 근육 한 줌은 토악질을 할 때만 반응한다는데


어떤 이름을 생각할 때만 빗소리를 내는 기관이 내 안에 있거나


기어이 큰물을 내어 쓸어버릴 기록 따위가 있다는 것인지


오른쪽 귀를 만지작거리며 고흐의 자화상을 생각하는 한때


창밖에는 햇볕이 쨍쨍

 

 

 
ㅡ계간『시와 표현』(201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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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취향

   

김이듬

 

 

꽃보다 열매를

열매보다 이파리를

흰색보다 검정색을

좋아한다지

그게 그거지

걸어가네

바다를 향해서? 묘지를 향해서?

그게 그거지

폭우에 잠긴 도시보다 저수지를 저수지보다 수영장을

샴푸보다 리필 샴푸를

금발보다 갈색 모발을 모발보다 가발을

여자보다 남자보다

장난 아니더라

침대에서

차에서

여름날 해질 무렵 공원보다 겨울 골목길을

힙합이라 록이나

들은 건 있어 가지고

오 고통이여

오 감각이여

그러고 그러지

어찌나 순진하던지 어찌나 웃기고 웃기던지

죽어가면서 말했지

팔을 놔주세요

사랑하긴 했죠?

 

 

 

ㅡ계간『詩로 여는 세상』(2010.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