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시 편
바람속에서 - 정한모
바람의 묵비 - 정호승
바람의 취향 - 조햬경
바람의 性別 - 마경덕
바람의 유전자를 보았다 - 마경덕
바람의 간이역 - 고증식
바람의 길 - 민영
바람의 각도 - 도복희
오래된 바람의 부족 - 손미
바람의 바느질 - 김승희
바람의 구문론 - 이종섶
바람의 정거장 - 강연호
바람의 편지 ―지리산 - 최승자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 신용목
바람의 말 - 마종기
바람의 등을 보았다 -김윤배
바람의 후예 - 김나영
바람의 냄새 - 윤의섭
바람의 뼈 - 윤의섭
바람의 경전 - 김해자
바람의 입 - 장혜랑
바람의 증언 - 구석본
바람의 뼈 - 천수호
바람의 호출 정우영
바람의 시 - 신달자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 김지혜
바람의 발자국- 김경성
바람의 산란 - 김규태
바람의 집 - 이시은
바람의 내부 - 배용재
바람의 강 - 임동윤
바람의 서쪽 - 장철문
바람의 그림자 - 정현종
바람의 길목 - 이성웅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 - 이은규
바람의 보폭으로 - 김은규
바람의 주파수를 찾다 - 이은규
바람의 지문 - 이은규
바람의 행로 - 조용미
바람의 집 - 기형도
바람의 노래 - 오세영
바람의 말, 바람의 편지 - 이영옥
바람의 행적 - 황정숙
바람의 애벌레 - 김영석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 크리스니타 로제티
바람의 금지구역 - 강영은
바람의 책장 ―여유당(與猶堂)*에서 - 구애영
바람의 풍경 - 김석인
바람의 사전 - 강해림
바람의 계단 - 강정애
바람의 징후 - 최지하
바람의 족적 - 조각
바람의 길 - 김자현
바람의 조율사 - 김유석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바람의 산란 - 김규태
바람의 鎭魂曲 - 한석호
바람의 세기 - 박소유
바람의 서(書) - 정원숙
바람의 몸- 황형철
바람의 겨를 - 황형철
바람의 행적 - 김경선
바람의 협로 ―모란(peony)에게 쓰는 편지 - 김영찬
바람의 신부 배성희
바람의 붓 - 위승희
바람의 말, 룽다* - 박미산
바람의 부르튼 심장처럼 - 하린
바람의 실내악 - 김언
바람의 나라 - 김은숙
바람의 영양제 - 김기덕
바람의 목회 - 천서봉
바람의 팜파탈 - 신지혜
바람의 육체 - 김륭
바람의 날개 - 이병률
바람 미술관* - 유지인
바람은 숲의 패밀리 - 강가람
바람에게 묻는다 - 양은창
바람과 비림 혹은 1과 고등어 - 최광임
바람과 구름의 호적부 - 손택수
바람 부는 날 - 신경림
바람 - 신경림
바람엔 뼈대가 있다 - 류호수
바람 조문 - 이서화
바람에게 묻는다 - 나태주
바람 - 김사이
바람 박물관 - 손현숙
바람 - 반칠환
바람의 겹에 본적은 둔다 - 김지혜
바람의 얼굴 - 김주대
바람의 집·1 - 이영춘
바람의 색깔 - 김혜선
바람의 향기를 맡아라 - 강인한
바람의 집 - 이종형
바람의 시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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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에서
정한모
1. 내 가슴 위에
바람은
발기발기 찢어진
기폭
어두운 산정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비정하게 휘날리다가
절규하다가
지금은
그 남루의 자락으로
땅을 쓸며
경사진 나의 밤을
거슬러 오른다
소리는
창밖을
지나는데
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
이불이 되어
내 가슴
위에
싸늘히
앉힌다
2. 남루한 기폭
바람은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어 올리면서 일어났을 것이다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들고 새벽이슬 잠 포근한 아가의 가는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청한 것으로 하여 깨어났을 것이다
처마 밑에서 제비의 비상처럼 날아온 날신한 놈과 숲 속에서 빠져나온 다람쥐 같은 재빠른 놈과 깊은 산골짝 동굴에서 부스스 몸을 털고 일어나온 짐승 같은 놈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그러나 언제든 하나의 체온과 하나의 방향과 하나의 의지만을 생명하면서 나뭇가지에 더운 입김으로 꽃을 피우고 머루 넝쿨에 머루를 익게 하고 은행잎 물들이는 가을을 실어온다 솔잎에선 솔잎소리 갈대숲에선 갈대잎소리로 울며 나무에선 나무소리 쇠에선 쇠소리로 음향하면서 무너진 벽을 지나 무너진 포대 어두운 묘지를 지나서 골목을 돌고 도시의 지붕들을 넘어서 들에 나가 들의 마음으로 펄럭이고 산에 올라 산처럼 오연히 포효하면 고함소리는 하늘에 솟고 노호는 탄도(彈道)를 따라 날은다
그 우람한 자락으로 하늘을 덮고 들판에서 또한 산정에서 몰아치고 부딪쳐 부서지던 그 분노와 격정의 포효가 지나간 뒤 무엇이 남아 있는가
다시 푸른 하늘뿐 외연한 산악일 뿐 바다일 뿐 지평일 뿐 그리하여 어두운 처마 밑 기어드는 남루한 기폭일 뿐
바람이여
새벽 이슬잠 포근한 아가의 고운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정한 것으로 하여 깨어나고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드는 그런 있음으로만 너를 있게 하라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으며 일어나는 그런 바람 속에서만 너는 있어라
(『카오스의 사족』. 범조사. 1958 : 『정한모 시전집』. 포엠토피아 200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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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묵비
정호승
나는 운주사를 지나며 대웅전 풍경 소리를 울렸을 뿐
가끔 당신의 마음속 닫힌 문을 두드리는 문소리를 크게 내었을 뿐
당신이 타고 가는 기차가 단양철교 위를 지날 때
기차 지붕 위에 올라가 가끔 남한강 물결 소리를 내었을 뿐
한번은 목포항을 떠나는 당신의 뱃고동 소리에 천천히 손수건을 흔들었을 뿐
묻지 마라 왜 사랑하느냐고 다시는 묻지 마라
바람인 나는 혀가 없다
―시집『여행』(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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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취향
조혜경
나 한때 바람을 좋아했죠 바람 없는 <스노우 볼> 속의 하루는 심심하죠 폭동도 소요도 없는 그 곳을 나는 좋아하지 않아요 아버지도 바람을 좋아했죠 나뭇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 구름을 흩어놓고 가는 바람 때론 지붕을 걷어가는 바람 바람은 오늘 내 눈동자 안에서 불어요 상쾌한 씨눈을 숨긴 채 유리창을 넘고 담장을 넘고 태평양도 건너지요 바다 깊숙이 들어가 고래가 된 사나이의 이야기도 바람결에 들었죠 사내의 척추에 숨어든 숨결이 물방울 타고 해초 타고 결국 수돗물을 타고 우리 사무실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은 그 바람을 못 본척해요 하지만 콧등에 귓속에 옷자락에 감추고 퇴근하죠 그들은 집에 들어가지 않아요 거리엔 스카프가 날립니다 콧노래가 날립니다 높은 빌딩의 허리가 살짝 휘었다 돌아옵니다 한강 위 철교가 잠시 출렁입니다 아버지는 바람을 좋아했죠 그 바람이 아버지를 좋아했죠 당신들 눈 속에서 천천히 조그맣게 둥근 원을 그리며 돌고 돌고 또 도는 바람이 한때 나를 좋아했죠
ㅡ계간『시산맥』(201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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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性別
마경덕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람이 너울너울 밀고 간 모래물결, 맨발로 사막을 건너간 암컷의 흔적이다. 치맛자락 끌고 조신하게 걸어갔다. 수천 년 모래알을 세며 사막을 걸을 수 있는 자는 몸을 찢은 어미만이 가능한 일,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은 어디론가 흘러간 제 새끼를 보려고 족적足跡을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기록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낙타의 행렬이 그녀의 발자국에 겹쳐지고 바람이 묻힌 자리에 또 바람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니,
이곳에서 이별이란 그저 사소한 일. 평생을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쳐도 늙어버린 어미를 기억할 바람은 없다. 새끼를 낳은 것들의 형벌은 떠난 자식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뼈를 묻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막의 오랜 관습. 별들의 장지葬地가 된 이곳에서 떠돌이 바람도 수없이 뒤꿈치를 물렸을 것이다. 그때 물결 같은 발자국이 찍혔을 것이다.
사구砂丘를 넘어온 회오리바람이 모래밭을 헤집는다.
짝을 잃은 수컷들이다.
―『시와 정신』(201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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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유전자를 보았다
마경덕
산 밑을 지나는데
일제히 나무들이 날고 있었다. 새들에게 날개만 달아주던 나무들이 재재거리며 새떼처럼 울었다.
누가 움켜쥐었다 놓쳤는지,
이파리들 죄 구겨져 잠시 치솟더니 고꾸라졌다. 위험한 비행이었다. 먼발치에서 올려다본 산의 어깨가 수척했다. 바람이 쓸어내린 허공도 우묵했다. 마음을 버린 가을의 손바닥이 버석버석 마르고 있었다.
데구루루 화장실 바닥을 구르는 두루마리, 둥글게 말려 벽에 걸렸던 숲의 기억이 쏟아졌다. 발목과 바꾼 날개를 달고 화장지는 멀리 달아난다. 나무는 뿌리를 버리는 순간, 어디든 갈 수 있다.
대패와 톱으로 나무를 다듬던 아버지, 바람 부는 날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ㅡ계간『문예감성』(2011. 봄.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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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간이역
고증식
다시 돌아와 서 보라
삼랑진 에둘러 낙동역으로
그대 두고두고 마르지 않는
그리움 한 자락 깔려 있나니
연착된 세월을 이고 선
이끼 푸른 역사(驛舍) 하나
먼데 손님처럼 열차는 오고
남실남실 훈훈한 입김으로
바람 먼저 달려와 안기는 곳
거친 눈빛 잠시 내려놓고 보라
상처난 영혼들 미풍에 흘러가나니
거기 고여 있는 가을볕 건져
탁배기라도 한잔 걸치면
떠나간 시절들 되살아오고
세월은 또 완행열차에 실려가나니
ㅡ시집 『단절』(실천문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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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길
민영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날아가는가?
바람은 저 남쪽 쪽빛 바다에서 불어왔다가
아스라이 눈 덮힌 저 북쪽 높은 산으로 날아가고,
다시 발길을 돌려 남쪽에 있는 섬나라로 돌아간다.
술 한잔 마시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하철 역을 찾아가는 노숙자처럼
예측 불허의 바람은 끊임없이 찾아왔다가
불가사의한 우주의 궁륭, 하늘로 날아간다.
바람이여 불어오너라, 내 젊은 날
검은 머리 휘날리며 바다의 신(神)을 찾아 다닐 때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친구였던 바람이여
불어오너라, 저 바다 건너 섬마을의
외딴집을 찾아갈 때까지!
ㅡ월간『유심』(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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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각도
도복희
채곡채곡 보자기에 묶여있는 아버지
삼년이 지나고 나서야 풀어보았다
선명하게 접혀있는 길
깊숙이 걸어 들어간 곳이
산인지 바다인지 나프탈렌 냄새가
나비처럼 우루루 날아오른다
분홍색이 흘러내리자
생생하게 살아나는 시침과 분침사이
일곱 살 먹은 계집애가 놓친 팔목은
여전히 길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더 자라야
나란히 서서 바라보던 노을에 젖을 것인지
강물이 되려고 제 몸을 풀어놓던 여름날 햇살이
방안 가득 흘러넘친다
손가락만 펴면 닿을 듯한 거리
그는 물길 흐르는 방향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한 번 건너면 되짚을 수 없는 바람의 각도가
손 내민 방향에서 한 뼘 정도 기울어졌다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 생겨난 빈자리의 오차
그 틈바구니에 강 하나가 흐른다
ㅡ월간『우리詩』(20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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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바람의 부족
손미
오만 년 전의 바람이 불어온 것은 이맘때다
안면이 있는 바람이다 부족의 폐경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신경질
적으로 갈라졌다 불길한 징조다 그녀가 우는 것은
한때 빗물이 날 낳았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친정에 왔어요’ 아버지가 보관하는 문자메시지. 어머니는 친정이
없고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로 한다
다른 채널이 전송되는 각 방으로 가벼운 뼈들이 날아온다
아버지는 빈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만져지는 건 돌멩이 하나
둥근 등에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있다 동굴을 헤엄치던 물고기의
단단한 살을 삼켰던 기억
피가 그리운 어머니의 울음이 잦다
내 졸업사진은 벽 깊숙이 새겨졌다 상태 좋은 암각화, 퇴화한 유적
이 되고 있다
나는 벽에 기대고 앉아 벽지의 붉은 꽃을 만진다
이건 전부 가짜다
동굴 속 짐승들이 오래 익힌 형상으로 아비를 기다린다 아직 숨을
쉬고 있다
우리의 실종 된 아버지들은 오만 년 전 바람을 따라가 사라진 부족
의 족장이 되었을 것이다
지붕 없는 벽화 안에서 그는 가장 편안한 웃음을 보일 것이다
《2009년 문학사상 상반기 신인문학상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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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바느질
김승희
자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다녔다
자아의 문학을 한다고 했다
행여 부셔질까
세상의 구심처럼 갓난아기처럼 안고 다녔다
어찌나 끌어안고 다녔던지
자아의 못에 박힌 가슴이 되었다
자아는 가슴에 박힌 못이 되었다
월트 휘트먼과 달리 자아는 세상만큼 커지는 것은 아니었다
바위도 아니었다
내가 밀어뜨리지 않아도
시간이 와서 그것을 잘게 부수는 날이 왔다
마사토나 모래나 혹은 더한 흙의 가루 같이
색동저고리 옷고름 같이 갈기갈기 갈라진
그것은 목을 더듬대고 목을 감는 끈이 되었다
목을 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괴롭고 성가셔
63빌딩 꼭대기 층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속에 넣고 물 내리는 스위치를 눌러버렸다
자아
너는 또 나를 벼랑으로 이끌어 갔다
한계령 바람 속에 섰다
바람과 바람이 허공 속에 잠시 매듭으로 묶였다가
풀어졌다가 한다,
모가지에 허공과 바람의 손이 간지럽다
가슴에 파란 이파리가 돋아난다
하얀 구름의 하얀 스크린 위에
‘자아’라는 말이 흰 글씨로 흘러간다
그래, 결국, 그것은 말들 속의 한 단어였다
하얀 말들 속의 하얀 한 단어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다
인생은 그런 단어들을 중심으로 스타카토로 끊어지기만 한다
끊어진 스타카토들을 모아 바람이 듬성듬성 바느질을 한다
그러면 자아가 되고 내가 되고 그대가 되고
또 훨훨 날아가 드문드문 구름의 자취가 된다
밀가루가 바람에 날아가듯
세상의 오만가지
자아가 원심력의 궤도를 타고 날아간다
아니 궤도 따위는 없다
얼굴 없는 시간이 된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는
석류의
수평선으로 수평선으로
홀로 날개를 저으며 나아가는
갈매기의
밀물에 들고 썰물에 나고
물결에 숨을 맞추고
그윽하게
스페인어로 “나다 이 뿌에스 나다”
우리말로 “아무것도 아냐. 그리고… 어 아냐, 아무것도”
얼굴 없는 얼굴로 구름 속에 스민다
시계 없는 시간으로 바람 속에 흩어진다
공허가 나 보다 더 큰 그곳에서
바람의 손으로 가슴의 못을 뽑는다
당신의 손을 잡는다
―계간『시와 시1』(2012.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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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구문론
이종섶
바람은 형용사다 나무를 흔들리게 하고 깃발을 휘날리게 한다 나무와 깃발 같은 것들 앞에 흔들린다와 휘날린다를 붙이는 것은 목숨과도 같아서 그런 표현이 사라지면 흔적조차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바람은 동사도 된다 바닥에 있는 것들을 날아가게 하고 무생물체까지도 움직이게 한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야 바람 따라 움직이지 않겠지만 생명이 없는 것들은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며 생명을 흉내낸다 바람을 통해 잠깐씩 살다 가는 목숨들이 아주 많다 바람은 접속사 역할도 한다 나무와 나무를 이어주며 꽃과 꽃을 연결하고 사람과 사람까지도 만나게 한다 바람이 없으면 외롭게 살다가 저 혼자 마감하는 세상 바람이 있어 서로가 손길을 스치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은 그러나 명사
는 아니다 명사의 형질이 없어 무엇이든 명사로 보이는 순간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다 꾸며줄 수도 있고 움직여 줄 수도 있으나 대상 그 자체는 결코 되지 못하는 비문秘文 바람은 그러므로 존재사다 모든 것이 되고 싶으나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한 점 미련도 없이 대상의 존재를 다양하게 그려내는 문법에 만족한다 명사와 명사 사이에 불기도 하고 한 명사를 불어 다른 명사를 불게도 하는 구문론 읽을수록 끝이 없고 쓸수록 신비롭다
ㅡ계간『애지』(2012, 봄호)
ㅡ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2 올해의 좋은 시 100선』(아인북스, 2012)
ㅡ김석환·이은봉·맹문재·이혜원 엮음『2013 오늘의 좋은시』(2013,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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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정거장
강연호
이 정거장에는 푯말과 이정표가 없고
레일은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저 바람의 뒤를 따를 뿐
뒤를 따랐던 흔적일 뿐이다
이 정거장에서 바람은 사방에서 팔방으로 분다
세상의 모든 방향에 눈길을 두면
결국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떠나든 도착하든 이 정거장은
영원인지 잠시인지 머문 바람의 다른 이름이다
이름이란, 일체의 수식을 무정차 통과시킨
앙금 아닌가, 문장과 구절과 행간과
행간의 여백마저, 여백의 침묵조차
스르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보낸 뒤
겨우 남은 지시어나 구구점 같은 것
그나마 문지르면 깨끗이 지워질 거다
그러니 눈으로 보려하지 말고
귀를 기우려라, 바람의 언어는 고요인가 소요인가
이 정거장은 지금
종착이자 시발이며 경유이기도 한데
다만 바람에 처분을 맡기려 대죄하고 있다
ㅡ계간『시와 사람』(2008. 봄호)
ㅡ시집『기억의 못갖춘마디』(문예중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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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편지
―지리산
최승자
내 너 두고 온지
벌써 한 달
바람의 편지도
이제 그쳤구나
아 내 기억 속에서
푸르른 푸르른
또 다시 하루 가고 이틀 가도
내 기억 속에서
푸르고 푸르를
언제나 새로이 쓰여 질
아 지리산, 바람의 편지
―시집『물 위에 씌어진』(천년의 시작,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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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신용목
나는 천년을 묵었다 그러나 여우의 아홉 꼬리도 이무기의 검은 날개도 달지 못했다
천년의 혀는 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탑을 말하는 일은 탑을 세우는 일보다 딱딱하다
다만 돌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비린 지느러미가 캄캄한 탑신을 돌아 젖은 아가미 치통처럼 끔뻑일 때
숨은 별밭을 지나며 바람은 묵은 이빨을 쏟아내린다 잠시 구름을 입었다 벗은 것처럼
허공의 연못인 탑의 골짜기
대가 자랐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
새가 앉았다 바람의 이빨자국이다
천년은 가지 않고 묵는 것이니 옛 명부전 해 비치는 초석 이마가 물속인 듯 어른거릴 때
목탁의 둥근 입질로 저무는 저녁을
한 번의 부름으로 어둡고 싶었으나
중의 목청은 남지 않았다 염불은 돌의 어장에 뿌려지는 유일한 사료이므로
치통 속에는 물을 잃은 물고기가 파닥인다
허공을 쳐 연못을 판 탑의 골짜기
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 천년의 꼬리로 휘어지고 천년의 날개로 무너진다
―시집『백만번째 어금니』(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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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9』(조선일보 연재, 2008)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전집』.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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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등을 보았다
김윤배
모든 지명은 바람의 영토였다
한 지명이 쓸쓸한 모습으로 낡아가거나
새롭게 태어난다 하더라도
세상의 지명은 바람의 품 안에 있었다
지명은 바람의 방향으로 생멸의 길을 갔다
바람이 가고 싶은 곳, 그러나 갈 수 없는 곳이 있었다
바람의 등이었다
바람의 등은 바람의 영토가 아니었다
몸이었다 몸은 닿을 수 없는 오지였다
바람의 등은 온갖 지명에 긁혀 상처투성이였다
바람의 등은 상처 아무는 신음소리로 펄럭였다
나는 내 등을 보지 못했다 등은 쓸쓸히 낡아갔을 것이고 홀로 불 밝혀 기다렸을 것이다 내 몸의 오지였던 등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슬픔으로 출렁이던 기억이 있다 펄럭이지 않던 등,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던 등으로 꽂히는 말의 화살이 있었고 등으로 박히는 눈빛이 있었다 등으로 지는 붉은 해가 있었고 등을 타고 넘던 숨소리가 있기는 했다 내 등에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서러운 문양으로 새겨져 있을 것이지만 등은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내 몸속 오지였다 살아서는 닿을 수 없는 지명은 날마다 밤바다에 불빛을 쏟았다
바람의 등은
대지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휘두르는 채찍으로 깊게 파인다
지명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오랫동안 침묵한다
―시집『바람의 등을 보았다』(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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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후예
김나영
1
아버지는 늘 바람을 부리고 사셨다
늦게 귀가하는 아버지 몸에서 양지바람꽃 냄새가 났다
대문 밖에서 바람의 지문을 다 털고 들어와도 ]
아버지는 바람의 꼬리를 들켰다, 들켜도
잘라내도 도마뱀꼬리처럼 다시 자라나던 바람의
질긴 꼬리가 기어이 엄마를 수덕사로 가게 만들었다
바람을 부리는 건 아버지의 몫이었고 그 바람을
견뎌야하는 건 엄마의 몫이었고 그 바람에
상처를 입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바람 잘날 없던 집구석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던 그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 나의 유년은 무작정 노출되어 있었다
나를 바람막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우리 집은 바람의 열린 학교였다
2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예요 아버지, 어둠이 어찌 이리
포근한지요 언제부터 나는 낮보다 밤을 더 사랑하게 되
었을까요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양방향으로 허
리 뒤트는 바람이 내 안에서 갸르릉거리고 있어요 이 바
람을 얼마나 부리면 늦은 밤 그 잡년을 만나러 가던 아버
지를 만나게 될까요, 그날 밤 아버지도 저처럼 이렇게 두
근거렸나요, 흐음, 냄새가 나요, 이 바람 속에 아버지 냄
새가 나요, 내 안에 바람이 점점 소용돌이치고 있어요, 이
바람의 속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이 바람의 거처
에 그냥 팍 거꾸러지고 싶어요 아버지 꼼짝 말고 기다리
세욧! 나 지금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중이예요, 후훗, 난
어엿한 바람의 딸이 되었나봐요, 나를 휘갑치고 도는 이
바람, 다음엔 누구에게 넘겨주죠?
―시집『수작』(애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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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냄새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봐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느냐는 듯이
바람을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월간『현대문학』2010, 5)
―시집『마계』 (민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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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뼈
윤의섭
바람결 한가운데서 적요의 염기서열은 재배치된다
어떤 뼈가 박혀 있길래
저리 미친 피리인가
들꽃의 음은 천 갈래로 비산한다
돌의 비명은 꼬리뼈쯤에서 새어 나온다
현수막을 찢으면서는 처음 듣는 母語를 내뱉는다
생사를 넘나드는 음역은 그러니까 눈에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후에는 공중에 뼈를 묻을지라도
후미진 골목에 입을 댄 채 쓰러지더라도
저 각골의 역사에 인간의 사랑이 속해 있다
그러니까 모든 뼈마디가 부서지더라도 가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파열은 생각처럼 슬픈 일은 아니다
하루 종일 풍경은 바람의 뼈를 분다
來世에는 언젠가 잠잠해지겠지만
한없이 스산하여 망연하여 그리움이라든지 애달픔이라든지
그런 음계에 이르면 오히려 내 뼈가 깎이고 말겠지만
한 사람의 귓불을 스쳐오는 소리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음성을 전해주는 바람 소리
그대와 나 사이에 인간의 말을 웅얼거리며 가로놓인 뼈의 소리
저것은 가장 아픈 악기다
온 몸에 구멍 아닌 구멍이 뚫린 채
떠나가거나 속이 텅 비어야 가득해지는
ㅡ계간『문학과 의식』(2012.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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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경전
김해자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버리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단숨에 떨어져 버리는 것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애비 애미도 없니 집도 절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무덤을 파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쓰고도 한 자도 새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당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9』(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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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입
장혜랑
겨울 산이 헉헉 소리 내어 우는 건
말 많은 바람의 농간이라고
정말 그러는 걸까
할 일 없는 철새들이 날아와 구경한다
바람의 입은 자로 잴 수 없이 커
또 다른 소문으로
민둥산을 푸름푸름 덮기 시작한다
홀로 흐느끼는 겨울 산의 마음자리
내 귀는 그대 발자국 소리 듣지 않고도
언 땅 몸 푸는 청보리같이
푸른 답장을 쓰리
―시집『바람의 입』(한국문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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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증언
구석본
내가 없었다
당신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향기와 빛깔이 모여 두근거리는 꽃,
그 앞에서 둥글고도 부드러운 나를 흔들기 시작하여
아랫도리부터 머리꼭지까지 흔들어도
당신들의 눈에는 꽃의 향기와 빛깔만 보일 뿐
매끄럽고 은밀한 나의 몸은 보이지 않는다.
나의 영혼은 없었다.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외로움과 쓸쓸함이
갈퀴를 세우고 짐승처럼 숲 속에서
나무와 나무 사이를 휘저으면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나뭇잎만 있었다.
골짜기마다 스며들어 울음 울지만
절벽마다 소리의 깃발을 내세워
한세상 살아가는 정신으로 펄럭이지만
언제나 당신들의 메아리였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내 몸과 영혼은 허공일 뿐이다.
그 허공 속을
꽃의 향기와 빛깔이 두근거리며 지나가고
당신들의 외로움이나 쓸쓸함도 지나간다.
사실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얗게 지워지는 영상같이
스르르 허공 속으로 스며들어
눈부신 하늘의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월간『현대문학』(20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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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뼈
천수호
시속 백 킬로미터의 자동차
창밖으로 손 내밀면
병아리 한 마리를 물커덩 움켜쥐었을 때 그 느낌
바람의 살점이 오동통 손바닥 안에 만져진다
오물락 조물락 만지작거리면
바람의 뼈가 오드득 빠드득
흰 눈 뭉치는 소리를 낸다
저렇듯 살을 붙여가며
풀이며 꽃이며 나무를 만들어갈 때
아득바득 눈뭉치는 소리가 사방천지 숲을 이룬다
바람의 뼈가 걸어 나간 나뭇가지 위에
얼키설키 지어진 까치집 하나
뼈 속에 살을 키우는 저 집 안에서 들려오는
눈보다 더 단단히 뭉쳐지는 그 무엇의 소리
―월간『현대문학』(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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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호출
정우영
안방에서 무심히 텔레비젼 보고 있을 때입니다. 히말라야 산록에서 부는 바람이 무릎을 시리게 하는가 싶더니 어느 결에 내가 히말라야 산록 작은 마을 길 걷고 있습니다. 구차하고 불그레한 얼굴들이 늘 만나던 이들처럼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체념과 달관의 짙은 주름살들이 이마 아래 걸쳐져 있습니다. 인사치레로 사람들 둘레둘레 건너다보며 고샅길 들어섭니다. 몹시 낡아 보이는 노인네가 어디선가 다가와 내 귀 잡아끌고 움막으로 데려갑니다. 텐진, 네 거다. 어리둥절한 날랑은 아랑곳없이 예쁘게 꿰맨 신발 들어 내게 건넵니다. 신어보니 내 발에 딱 맞습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절을 해야 하나 마음 주춤거립니다. 노인은 후련하다는 듯 스르르 내려앉더니 바람처럼움막을 빠져나갑니다. 마을 사람들 여럿이 모여 휭 하니 사라지는 노인을 배웅합니다. 어찌 보면 애처롭다는 표정이나 달리 보면 상서롭다는 떨림이 온몸 가득 번집니다. 큰 바람 되어 히말라야 산록 속으로 스며들었는지 노인은 이제 흔적조차 없습니다. 이후 나는 서울 도심에서든, 사무실에서든 불쑥불쑥 바람의 호출을 받곤 하는데 그때마다 서슴없이 히말라야로 스며듭니다 나는 텐진입니다.
―시집『살구꽃 그림자』(실천문학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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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시
신달자
바람이 들었다
바람이 집을 지었다
바람의 집은 무 속에 구멍을 내는 일
구멍을 막는 일이 사람의 집이라면
구멍을 내는 일이 바람의 집이 된다
구멍을 내면서 푹푹 빠지면서 의젓하게 허공의 사자 같은 나는 일을 던지고
날개를 꼬깃꼬깃 접으며 옹색하게 태풍을 주먹만 하게 줄이는 것을 즐기며
다소곳이 무 안에 자신을 담는 일
바람에게도
온몸을 숙이고
무를 파고 들면서까지
반드시 은거(隱居)하고 싶은
하얀 속살의 집이 필요했는가
―시집『종이』(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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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김지혜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2011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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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발자국
김경성
키 큰 느티나무의 몸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바람을 보았다
나뭇잎의 낱장마다 속속들이
소소속 바람이 박히는 소리, 그 소리
나무의 몸속으로 들어가 나이테의 행간을 휘돌아서
쏴 와와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바람의 신발
한 짝 두 짝 주워서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지문처럼 번져 있는 바람의 무늬 손금 닮았다
느티나무의 몸속에 남아있는 바람, 잎 젖혀가며 내게로 와서
발자국을 찍어대고
나는 기왓장 틈 아슬아슬하게 꽃을 피운 씀바귀처럼
절집 마당에 오래 앉아
발자국에 고이는 바람의 말을 읽었다
무언가 간절히 그리워지는 해질 무렵,
몸과 마음을 열어놓으니
몸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
그대 마음인 듯 따뜻해서
흩어져 있는 바람의 발자국 가만가만 만지며 산길 걸었다
내 몸 스치는 곳마다
숲 떨림의 소리 가득했다
ㅡ시집『와온』(문학의전당,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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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산란
김규태
바람은 어느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까닭으로 허파를 열어 놓고
길고 깊게,
때로는 얕고 부드러운 숨 쉬며
저 허공에 매달려 사는 것일까
어느 허공의 언저리에서
여기 숲의 가슴 안쪽까지
쉬지 않고
활강의 날개를 펴고
달려 온 것일까
가시 돋은 잎사귀를 만나면
움칫 놀라거나
밖으로 돌아 나거거나
피해 나갈 시늉조차 내지 않는다
바람은
그런 깨어지지 않는 속마음으로
그의 생애의 영속을 위하여
몸서리나게 요동치며
산란을 거듭한다
―계간『시와 경계』(2010,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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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
이시은
오랜 시간
바람으로 살았습니다
끝없는 고독의 집 지으며
비에 젖은 모습으로
천길 벼랑 오르며 살았습니다
생명줄 다하는 날까지
못다 버릴 이름 가슴에 품고
자갈길 오르막길 가리지 않고
천형이라 생각하고 걸었습니다
번갯불에 매 맞은 영혼 하나
고독의 불을 안고
씻고 비우고 또 내려놓습니다 만
갈증만 버썩일 뿐
갈 곳이 따로 없습니다
바람의 길
메마른 영혼 누일 곳은 고독이라는 집
그 길 말고 딴 길이 없습니다
―격월간『유심』(2010,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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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내부
배용제
믿지 않겠지만,
나는 바람의 몸을 애무해 본 적이 있다
멀리 몇 채의 구름이 날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지나갔고
쓰디쓴 체액들이 게워졌다
나는 한 방울의 정액처럼 바람의 내부로 흘러갔다
꽃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웠고
수만 년 동안 모든 짐승의 울음소리를 기억하는 자세로 피어났다
꿈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은밀하게 바람의 뿌리를 더듬고 있었다
믿지 않겠지만, 내 혀 속에 바람의 씨앗들이 잉태되었다
그때부터 날마다 붉은 피의 밑그림을 그리는
구름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바람들은 가끔 사람의 몸으로 떠돌았다
언젠가 공원의 외진 벤치에서 흐느끼는 사내를 본 적이 있었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울음을 껴안고 소용돌이치던
그 사내의 등은
어느 바람이 흘리고 간 내부일 뿐이어서,
고대의 노을이란 주소지를 기록하지 않고는
그곳에 당도할 방법이란 없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길 하나를 붙들고 밤새 울던 바람을 본 적이 있다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사라진 것들 모두 꽃길을 통과했던 것처럼
사라진 것들의 연대기를 전부 기억하려는 것인지
꽃들은 버려진 발자국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미 사라진 길의 전설과 바람은 한 몸이 된 지 오래,
꽃이라는 고통의 빛깔과
길 위에서 희미해지고 아득해진 것들의 안부를 묻는
어떤 사람들은 가끔 바람의 몸으로 떠돌기도 했다.
―계간『시안』(2010.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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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서쪽
장철문
바람 부는 충적토 지석묘 곁에 서면
이렇게 서 있는 것이 오늘만이 아니다
이 구릉에서 돌창을 다듬은 사나이도
잔솔밭으로 달리는 고라니를 쫓다간
바람 밀려가는 서녘을 바라보곤 했을 것이다
고타마만이 가부좌를 알았겠는가
이 구릉까지 돌을 나른 사람도
돌 밑의 사람도
그 무게를 내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산과 산 사이 빗발 묻어오는 이 시간에도
담쟁이 뒤집어 쓴 돌무덤 속에서
영혼을 바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봄풀 오르는 충적토 지석묘 곁에 서면
여기 서 있는 것이 혼자만이 아니다
―시집『바람의 서쪽』(창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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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정현종
창밖을 본다.
바람이 불고 있다.
한참 있다가 또 내다본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흔들리는 나뭇가지
흔들리는 이파리들.
어른거리는 시간의 얼굴
바람의 움직임을 깊게 한다.
그림자들
어른거려
바람의 움직임은 깊다.
슬픔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슬픔이 움직인다.
바람의 그림자.
―시집『광휘의 속삭임』(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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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길목
이성웅
몸에 잘 맞는 나무 옷 한 벌 걸치려
알몸이 된 어머니
자다 말고 기어오르며 빨아먹었을
봉분도 허물어지고
가끔 들리는 자식소리에
부풀던 달팽이관도 이제 고요하다
뼛속을 잦아들던 바람이 자지러지자
일곱 새끼 업어낸 등짝
검붉은 등창만 매달려 있다
일흔아흔 나이테를 베고 누운 어머니
질척거리며 걸어왔던 다리를 질끈 묶자
식어버린 아궁이
원시의 숲으로 떠날 채비를한다
낙타 등 같은 딱딱한 옷깃마다
여섯 개 나무 단추를 채운다
이승에서 닿지 않는 길 끝
부르는 내 소리 담지 못할 것이다
대답 없이 흩어지는 바람의 길목
때 없이 시리다
―월간『우리詩』(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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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자들의 경전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2008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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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보폭으로
이은규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던 그가 묻는다
편도 저쪽의 바람은 간혹 상향등을 번쩍이며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생이 살아있음을 흩날림으로 확인하기 위해
時時로 바람을 건너 먼 곳으로 향하는 것들
스치는 흰 몸의 나무들 어둡게 환하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붐비는 바람
그리움으로 몸이 휘는 잎 하나 있다하자
왜 휘어지는지도 모르면서
미처 어떻게 휘어져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내내 바람이라는 가지에 걸려 있는 것들
바람 한 줄기를 피우기 위해
그는 또 얼마나 오래
생과 바람의 사잇점을 건너는 편도의 날들을 견뎌야 할까
길마다에 스며 발길을 재촉할 바람의 보폭
바람은 흩날리는 것으로 모든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
그렇게 흩날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서
그 안 보이는 몸을 소리의 亂廛에 숨기는 걸까
바람이 쉴 곳은
흩날림의 전언에 귀 기울이는 어느 귓바퀴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아니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기다림으로 몸이 휘는 잎 하나 있다하자
폐허라고 부르지 말자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는 바람
그 어떤 생의 흔적도 보탤 수 없는 폐허
時時로 편도 저쪽의 허공으로 불려가
한 점 바람으로 흩날릴 그가 있다
잎들, 바람의 보폭으로 몸이 휘는 밤
―웹진『시인광장』(20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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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주파수를 찾다
이은규
바람의 나라에 문자를 잊은 이들이 살고 있다
전해 듣는 신의 말처럼 먼 문장이 있을까
누군가 들려주는 경전은
신의 전언이 아니라 읽는 이의 목소리일 뿐
언젠가 라디오가 전해주던 정오의 그림자처럼
낡은 책장에 새겨진 지문
그럼에도 읽을 수 없었던 손들을 위해
움직이는 경전 만들어지다
경문(經文)이 적힌 종이를 돌돌 말아 원통 속에 넣은
마니차, 한 번 돌리는 것만으로 참회할 수 있다면
법륜(法輪)이 전하는 설법을 듣는다
결함 있이 둥글게 온전할 것
불필요하게 필요한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
바퀴를 굴려 이르지 못할 곳에 닿을 것
라디오에 달린 바퀴로 주파수를 찾던 시절
사람들이 찾으려는 건 신일까 바람의 주파수일까
문자를 기억하는 손들이 마니차를 돌리는 이유
궁금해 하지 않는 사이, 해는 지고
텅 빈 경내
어느 손이 두고 간
경전의 바퀴를 차르르, 차르르 돌리는 바람 한 점
ㅡ계간『서정시학』(2010.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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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지문
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 行方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2008 젊은 시' (문학나무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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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행로
조용미
폭풍이 지나가고 있다
바람을 못 이기고 쓰러져 누운 나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나무들이 증명하는 바람의 행로,
심지가 곧은 것들은
저렇게 生을 다해 단 한 번
꺾어지는 것
사원을 뒤덮어 폐허를 구축한 케이폭나무는
폐허의 뒤에도 살아남으려는 욕망으로
뿌리의 긴 발톱을
사원의 지붕 위에 박아넣고 있었다
탑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의 욕망이
사원을 지탱한다
깨어진 돌에 새겨진 범어처럼
문 하나하나마다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나는
새로운 폐허인,
어느 먼 유적지에서처럼 나는 중얼거린다
삶의 미망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만의 장경과 일천칠백의 선의 공안이
필요한 것은 아니리라
폭풍이 지나갔다
부러진 나뭇가지의 잎들이 말라가고 있다
바스락바스락 숲속에서
염소들이 먹을 것을 찾아다니고 있다
―시집『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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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
기형도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시집『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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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오세영
바람 소리였던가.
돌아보면
길섶의 동자童子꽃 하나,
물소리였던가.
돌아보면
여울가 조약돌 하나,
들리는 건 분명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너는 어디에도 없고
아무데도 없는 네가 또 아무데나 있는
가을 산 해질녘은
울고 싶어라.
내 귀에 짚이는 건 네 목소린데
돌아보면 세상은
갈바람 소리.
갈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
―시집『벼랑의 꿈』(시와시학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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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바람의 편지
이영옥
나는 오래 흔들린 억새꽃
입술이 물고 있던 생각들을 조금씩 날려버린다
털이 빠져버린 말을 어디에 적을까
공중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게 차오르고
나는 자꾸 허공을 뒤진다
가을은
볕을 거두고
숨소리를 거두고
그늘이
제 설 자리를 줄이는데
나는 맑은 물을 꾹꾹 찍어
편지를 쓴다
나는 흰빛을 빌려 너를 벗어났다
나는 몸을 숨기고 전진한다*
무수한 잔뼈를
바람 속에 묻고서
붙잡을 수 없는 것은 쓸 수 없는 것,
검은 눈물을 본 적 없는 너는
내 문장을 절대 읽지 못한다
* 데카르트의 글 인용
―계간『시와 미학』(2011.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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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행적
황정숙
구름을 몰고 온 바람이 통 안에 가득하다
뼈를 파도처럼 일으키며 소 울음소리로 운다
땅에 귀를 대고 말발굽 소리로 거리를 측정한다는
타타르 왕국 목축인들은
구름의 크기, 빗방울의 수로 바람의 무게를 느낀다는데
촘촘하게 박혔던 골수들은 뼈울음으로 그동안 살아온 소의 행적들을 잰다
서쪽으로 바람이 떠난 자리
불의 혀들이 소화되지 못한 말들을 되새김질 한다
코뚜레에서 풀려난 것들로 들끓는 통 속엔
푸른빛 기름기로 겉돌던 불온한 시절이 있다
뿌리 내릴 곳 없는 사막의 풀씨로 견디는 시간쯤이야
풍화되는 화석처럼 밤새 제 몸을 비워간다지만
바람이 걸어온 행적을 길은 바꿀 수 없다
울음이 끝나는 곳
누린내 풍기는 길이 겹겹이 우려진 시간
숭숭 뚫린 뼈에서 파도 소리가 난다
흙먼지 동반한 발자국 천천히 바깥세상으로 걸어나온다,
달콤한 허기 속을 뽀얗게 피어오르는 편란운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1.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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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애벌레
김영석
무쇠 낫을 들고
숲길을 뒤덮은 푸나무를 쳐 낸다
길을 내며 나아갈수록
베어진 푸나무들이 피워 올리는
늪 같은 어둠 속으로 깊이 빠진다
오랜 세월 수많은 벌레와 새들이 죽어
마침내 이루어진 이 늪을 지나자
밤낮도 아닌 희미한 미명 속에
고인돌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고
고인돌 속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바람의 애벌레들이 꿈꾸고 있다
초승달 같은 낫을 들고
애벌레의 꿈을 들여다본다
어느 먼 숲을 흔드는 바람 소리뿐
꿈속은 텅 비어 있다
초승달 빛을 뿌리는 낫을 들고
텅 빈 꿈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바람 소리를
꿈 속의 한 잎 귀가 듣는다.
―계간『문학나무』(2010.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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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크리스니타 로제티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나도 당신도 보지 못했어요
하나 나뭇잎 살랑거릴 때
그 사이로 바람은 지나가고 있지요
누가 바람을 보았나요?
당신도 나도 보지 못했어요
하나 나무들 고개 숙일 때
그 곁으로 바람은 지나가고 있지요
-전국국어교사모임 엮음『국어시간에 세계시읽기』(나라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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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금지구역
강영은
바람의 행보는 벼랑을 넘으면서 시작된다 관계의 사이에 서식하는, 사랑 합니다, 사랑 합시다, 라는 종결형 어미에 대답하는
행간에 머리를 들이민 바람의 눈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장은 마른 풀 쓸리는 벌판, 수백 만 마리의 새떼가 날아가는 장면은 그 다음에 목격 된다
고도 높은 울음이 통과할 때마다 피기를 반복하는 북북서의 허공을 바람은 꽃으로 이해한다
사타구니를 오므렸다 펴는 바람의 편집증에 대하여 여러 번 죽어 본 새들은 안다
허공은 날개가 넘어야할 겹겹 벼랑이라는 것을,
서녘 하늘에 붉은 꽃 반죽이 번진다 허공에서 베어 나온 꽃물이라고, 당신은 바람의 은유를
고집 한다 내가 잠시 벼랑 너머를 바라본 건 그때였을 것이다
금지된 허공을 넘은 새들의 무덤이 벼랑 끝에 걸려 있다 바람은 벼랑을 끝내 읽지 못 한다
서녘 하늘에 붉은 꽃 반죽이 번진다 허공에서 베어 나온 꽃물이라고, 당신은 바람의 은유를 고집 한다 내가 잠시 벼랑 너머를 바라본 건 그때였을 것이다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1∼2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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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책장
―여유당(與猶堂)*에서
구애경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그대의 표정을 보네
파도소리 스며있는 머리말 속살을 타고
첫 장을 지나는 노을
갈채로 펼쳐지네
오래도록 서 있었을 배다리 뗏목 위로
저문 하늘을 업고 떠나는 새떼를 향해
별들도 산란을 하네
넘어가는 책장들
갈잎은 결을 세우려 마음을 다스리는가
안개의 궤적을 뚫고 스러지는 이슬 안고
목민의 아슬한 경계
은빛 적신 판권이었네
* 다산 정약용 생가.
(심사위원/ 이근배·문인수)
―월간『유심』(2014. 2) - (서울신문 시조부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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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풍경
김석인
억새의 목울대로 울고 싶은 그런 날은
그리움 목에 걸고 도리질을 하고 싶다
있어도 보이지 않는 내 모습 세워놓고
부대낀 시간만큼 길은 자꾸 흐려지고
이마를 허공에 던져 비비고 비벼 봐도
흐르는 구름의 시간 뜨거울 줄 모른다
내려놓고 지워야만 읽혀지는 경전인가
지상에 새긴 언약 온몸으로 더듬지만
가을은 화답도 없이 저녁을 몰고 온다
(심사위원/ 이근배·홍성란)
―월간『유심』(2014. 2) - (동아일보 시조부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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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전
강해림
바람의 탑
입 없는 돌멩이의 몸 빌은
바람이 서로 고단한 몸 포개고 있다
나무 꼬챙이에 하얀 말머리뼈를 달아 놓아 신들이 보시기에 좋겠다
책, 바람흘림체의
문맹의 마지막 망명지인 내가
세상의 모든 목적달성과 논리가 거절한 영혼으로 불어가면서
허공에 쓰는,
첫 문장도
끝 문장도 없이
중풍
울 엄마 바람서방한테 치맛자락 잡혀서
늑골에 뜬 달은 물에 불은 나무토막 같아서 온다온다 해놓곤
오동낭개 걸려서, 세월은
풍장風葬
눈먼새가와서쪼아먹고햇볕과바람이교대로와서거두어가는,사람들이시詩라고부르는
바람났어
여자의바람은풍향이복잡하지약풍으로불어와통째로뿌리뽑히지복사꽃,불을확당겨놓은듯얼굴이예뻐지고헤어스타일이바뀌고구두굽높이가달라지고암튼,
바람의 납골당
이제 밥그릇 같은 유골항아리 속에서 고단한 두 다리 뻗어도 되겠다 바람은
국지풍, 혹은 높새바람
갓 터져 나온 꽃망울들
입술과 입술이 포개질 때
소통불능의, 불편한 진실은 아름답지
오래 전 거래 중지된 내 안에서만 죽어라고 불어오는
ㅡ시집 『그냥 한 번 불러보는』(시인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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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계단
강정애
타래난초꽃이 타래 줄기를 따라 피어 있습니다.
비상계단을 오르는 모습입니다
바람에 자신의 몸을 묶고
흔들리는 꽃들이
허공을 움켜잡고 있습니다.
식물의 저녁에 촘촘히 지층을 만들고 있는 바람
붉은 등에 기대어
비틀어짐의 묘술을 연출하며 아슬아슬합니다
실타래처럼 꼬인 여름 두 줄기가
공중의 고요를 비틀고 있습니다.
스스로 몸을 헐어
족적足跡을 신고 가는 축의 바깥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핏대를 올린 목이 붉습니다.
벌어진 작은 입술에 고인 진득진득한 음역陰易
곡선과 곡선이 맞닿아 서로 엉킨 그늘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어지러움이 현기증을 향해 오르고 있습니다.
여러 개의 꽃송이가 나선형 계단에 쉬고 있습니다.
어쩌면 삐뚫어진 바람 두 줄기가
풀어지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햇볕을 달구던 긴 여름, 색소 빠진 매듭이 풀리고
바람의 계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ㅡ《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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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징후
최지하
붉은 헝겊 같은 노을이 살다갔다
죽은 나무에 혈액형이 달라진 피를 돌려야 할
심장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기다림의 대상이, 그, 무엇이었던 동안
더 이상 풀빛은 자라지 않았다
대신에 동구 밖의 삼나무들이 푸른 잎을 마쳤다
가두어 놓았던 귀를 풀어 놓자마자
귀가 아니라 입이었다며 우는
야행의 고양이와도 같았던,
그것은 단순히 후회에 관한 피력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소문처럼 스쳤다가 간 걸음 속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전에 내렸던 눈이나 비가 다시 내계(內界)로
돌아갈지 모른다
당신이 보낸 전령사들, 그, 후로
당신이 직접 와서 지나간 자리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할 가능성은
방향에게 기대어 목을 꺾거나
내게로 오는, 그, 동안을 하르르 밟아주는 일이었다
당신은 증명하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다
바람의 채집사를 자처해 보았을지도 모르는
전생보다 더 멀리서 걸어 왔던 세월 동안
뒷모습 쪽에만 대고, 훨씬 전에 지나간 유행가 같은, 낡은,
셔터를 겨누어 보기도 했을 거라는
가장 처음일 때 오고
가장 나중일 때 닿았던
당신의 징후에게, 더 이상 생의 손가락 하나를
걸어보는 행위를
파란이라거나 파탄이라는 이름으로 치유하지는 않겠다.
ㅡ《2014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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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족적
조각
물렁한 땅에 발자국을 찍는다
올 때와 갈 때가 다른 표정이다
버드나무 숲 오른쪽 모퉁이에
늘 한 방향으로 나를 표시하면
나무는 꼬리를 세우고
달빛을 헤치고 온 어미 늑대가
곳곳에 처연한 냄새를 배어 놓는다
그럴 때 행방이 지천이다
허기에 지친 울음이
쩌렁 쩌렁 들판을 휩쓸고 지나가
스스로 그어놓은 담장을 넘어
심연에 핀 열꽃을 따먹는다
야생의 탈을 벗을 때인가
떠나고 떠나서 더 이상 내 보낼 입김 하나 없을 때
자유롭게 나가고 들어오는 종족들이 보인다
별빛을 해찰하며 외딴 골로 숨어들어
부름도 대답도 없이 소멸로 남는다
먼 기척처럼 물렁한 땅이 다져지면 그곳이 나의 무덤이다
떠돌던 내 발바닥에 핏기가 사라지고
화석처럼 숨이 말라서 흔적마저 희미해지면
당신은 환영처럼 다시 주술을 외울 거다
나는 사라진 게 아니다
침묵할 뿐이다
ㅡ계간『시와 정신』(201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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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길
김자현
소나기 멎은 샛강에 서면
길을 내는 바람 모습이 가득하다
는실는실 애기똥풀 달맞이꽃 흐드러진 들판사이로
깨끗이 닦인 자색 자전거 도로를 따라 걷는다
노란 꽃 매단 달개비 양 옆에
발 묶인 망초대 흔들어 몸을 숨기는 바람
작은 팔을 휘저으며 걷는
아기 발밑으로 기어들었다간
머리에 쓱 손을 넣어 나풀거리게 하고는
은빛 바퀴 살 헤집고 나와 다시 강변을 달려간다
제 몸을 베어 길을 내주고
망초로 억새로 다시 태어나는 바람의 소원
먼 산 속에
시베리아 호랑이 한 마리 들어있는 늦여름
우르릉대는 하늘 아래 바람이 낸 길 따라가면
여기저기 기우뚱 생의 등짐 진 달팽이들
ㅡ시집『앞치마를 두른 당나귀』(시와문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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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조율사
김유석
우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웅크려
풀이 휘는 반대편의 장력을 익힌다.
중심에서 멀수록 팽팽히 당겨지는 뿌리의 힘을
꽁무니로 빨아들여 체액과 섞는다.
몸통이 부풀고 섬모가 돋는 발에
무엇인가 끈끈하게 만져질 때
한 번 디뎌본다. 잎사귀가 휘저은 허공
주르르 내리는 것 같지만
수없이 겹쳐있는 바람의 나선들에 휘감기는
그 곳의 벼랑에서 집 짓는 법을 떠올린다.
집은 현장이다. 배고픔과 포획
공것 같은 기다림을 한데 걸어둬야 하는 그 곳은
가끔 저 조차 헛짚을 만큼 휘청거려야하므로
바람보다 질기고 유연한
풀잎과 풀잎, 그 흔들림을 얽는다.
중심은 늘 움직여야 한다.
흔들림을 따라 이동하는 평형감각을
풀잎을 당겨가며 줄에 입힌 후
말랑한 사각 틀마다 양쪽의 허공을 끼워 넣으면
살짝 들춰지는 망사 사이
파닥거리는 바람의 각선
저 거미, 지금 바람을 조율하는 중이다.
ㅡ월간『현대시』(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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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굴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할 같다
그러지 않으면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 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가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ㅡ시집『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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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산란
김규태
바람은 어느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까닭으로 허파를 열어 놓고
길고 깊게,
때로는 얕고 부드러운 숨 쉬며
저 허공에 매달려 사는 것일까
어느 허공의 언저리에서
여기 숲의 가슴 안쪽까지
쉬지 않고
활강의 날개를 펴고
달려 온 것일까
가시 돋은 잎사귀를 만나면
움칫 놀라거나
밖으로 돌아 나거거나
피해 나갈 시늉조차 내지 않는다
바람은
그런 깨어지지 않는 속마음으로
그의 생애의 영속을 위하여
몸서리나게 요동치며
산란을 거듭한다
ㅡ계간『시와 경계』(2010.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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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鎭魂曲
한석호
누가 입속에 바람의 사원 하나 세워 놓았던 것인가.
아, 하고 입을 벌리면
회오리바람이 몸속 어딘가를 캄캄하게 더듬어
물고기 떼 허공에 풀어 놓는다.
미명의 눈가를 흐르는 비릿하고 뜨거운
저 냄새들 물의 누이들,
합장하고 있는 올빼미의 둥근 침묵,
기이한 형상으로 얽힌 뼈와 뼈가 바위 그늘에서 별을 헨다.
눈꽃은 콧잔등에 돋는 별을 헤고
세상의 모든 사랑은 바람의 사원을 찾아 떠돈다.
아, 하고 입 벌리고
잠든 것들의 꿈속에서 뛰쳐나오는 오늘과 입 맞춘다.
바람이 잠을 껴안고 춤을 춘다.
검은 구름의 문장으로 달아난 발자국 소리 되돌아오고
아, 하고 입을 벌리면
네가 썼던 검은 대리석의 글씨들이 일어선다.
칠흑의 울음 위에서
네 노래는 검은 대리석 같은 밤을 일으켜 세운다.
네 노래는 녹슨 음악의 분수를 지휘한다.
네 노래는 녹슨 불기둥을 지휘한다.
네 노래는 수세기동안 침묵했던 허기를 지휘한다.
네 노래는 수세기동안 휴식중인 모래시계의 권태를 지휘한다.
네 노래는 모든 지워진 사랑에 불 지핀다.
어제를 쓰다듬는 것은 버림받은 사냥개의 길고 지친 혀들
나는 가슴 한켠을 지긋이 내려놓고
초목과 꽃과 물과 불의 시간을 천천히 핥는다.
검은 대리석의 밤을 두드리면
아! 내 잠속 깊은 곳에 바람이 수혈의 링거를 꽂고 있다
ㅡ웹진『시인광장』(20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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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세기
박소유
몇 개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바람의 세기가 바뀌는 중이다
그 힘을 믿거나 혹은 믿지 않거나
유랑극단이나 실크로드 같은
바람으로 떠밀려 가는 곳은 어디나 있게 마련이다
오리나무 낮달처럼 가깝고도 아주 먼 내륙에서 발원된,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닌
바람은 기막힌 복화술을 지녔다
먼 곳에서 들리는 듯 다른 소리를 내지만
실은 한숨이나 휘파람처럼
내 안에서 빠져 나오는 소리들
어느 것도 바람 없이 움직이려 하지 않기에
나도 모르게 빌미를 주고 마는 거
그래서 귀에 들리는 건 모두 바람소리다
잠시 잠깐이다
만질 수는 없으나 거죽이 있어 변신과 합체가 순간이니
눈에 보이는 건 또한 바람뿐이다
몇 세기를 바꾸며 단 한 번도 달려보지 못했던 내가
쉿, 지금 이 길로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습니다
ㅡ웹진『시인광장』(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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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서(書)
정원숙
허밍을 날리듯 온 몸의 감각과 구멍을 여네
독하고 슬픈 바람의 말이 귓가를 배회하네
타클라마칸에서 핏기 잃은 바람
티벳고원에서 무릎 깨진 바람
아프리카에서 숙성된 바람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들 늘 바람 쪽으로 귀를 열어도
바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형체 없는 말의 그물을 짜네
실낱 같은 소리에도 죄의 소멸을 읊조리고
불안하지 않은 비행飛行을 꿈꾸는 자들,
기타소리보다 낮은 곳에 흐르는 바람의 말을 필경할 수 없네
밀입국자처럼 떠도는 바람
ㅡ시집『바람의 서(書)』(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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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몸
황형철
대대로 몸 안에 바람이 응축된 馬幇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와야 할 길을 떠난다는 것은 짧은 수명을 담보로 바람을 풀어내는 일이다
새만이 다다를 수 있는 茶馬古道에 오직 바람이 성한 것도, 지층의 칠팔 할이 바람으로 이뤄진 것도 그 때문이다
미처 다음 생을 받지 못한 이름들과 말들의 비명이 떠내려가는 대협곡에 흰 뼈들이 소용돌이 치고
바람에게 길을 내주느라 길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든다
이제 내가 가진 몇 마리의 새를 놓아주기로 한다
새는 제 힘을 다해 격렬한 바람의 눈물을 날개에 새길 것이다
그리고 먹먹한 암벽의 혈을 짚으며 걸어야지
아무 곳에도 귀속하지 않는 바람의 시제가 궁금한 때가 있다
이 세상 가장 은밀한 내륙에 묻혀 있을 화석이 된 바람의 연대기를 찾아
긴긴 世路의 파문에 대해 들을 테다
바람의 몸을 빌려 살아야겠다
몇 세기를 거슬러 바람은 심장에 전이되고 우기를 지나 나는 또 어딘가로 돌아갈 것이다
나와 바람은 근친이다
ㅡ시집『바람의 겨를』(고요아침,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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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겨를
황형철
쑥부쟁인지 구절초인지 긴가민가 싶어 갸웃하는데
바람의 숨까지 모조리 들이마시며 사방으로 기우는 꽃들
꽃들의 운율을 적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다
망울이 터져 가는 몸이 떨릴 때마다 낮게 엎드려 미세한 기척을 들으려 애쓴 적 있다
지금 보면 그것은 무수한 바람의 겨를을 살피는 일
바람이 태어날 때와 사라질 때 그리고 아득한 그 간격을 문장으로 기록하기
가능한 세밀하게 바람이 지나간 자리의 흔적까지 그리는 것이었다
가깝게는 굴피나무나 무당벌레에게 넣는 기별과 같고
멀게는 우주로부터 내통하는 비밀과 같고
꽃의 생몰도 실은 바람이 부려놓은 전언과 같아서
하늘에 이르는 바람의 겨를에 어떻게 가 닿을 수 없었다
시시하게 흘러가버린 얄궂은 인연에 날개라도 달아주고 싶었다 나를 앞질러 간 것들의 모호한 행방과 후에 따라올 운명까지 불러다가 깊은 호흡으로 불안한 저녁을 안도했다 간혹 꽃을 떠난 향기와 바람이 꾼 꿈이 구름에 실려와 짙은 그늘이 됐고 그때마다 무어라 명명해야 할지 어지러웠다 다만 꽃이 흔들리고 바람이 부는 것도 매한가지처럼 보였을 뿐 세상의 모든 어스름에 불빛을 하나씩 달아주고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다
바람이 아닌 것에 곧잘 흔들린 적이 있다
ㅡ시집『바람의 겨를』(고요아침,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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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행적
김경선
그가 다녀갔다
조는 틈을 타 현관에 매단 풍경에게 인사를 부탁하고
늘 꼿꼿한 산세베리아에게도 안부를 묻고 갔다
완벽한 투명함,
누구도 그를 목격하지 못했다
다만 그가 어깨를 툭 치고 도망가거나 할 때
불현듯 쓸쓸해지고 그리움이 일어설 뿐
엇 저녁부터 전봇대를 붙들고 전단지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속사정을 풀어놓는다
내려다보던 현수막, 슬픔이 전이된 듯 파르르 떨며 온몸으로 운다
그가 다녀가면 가슴에 하나씩 보이지 않는 구멍이 뚫린다
기우뚱 엇나간 그림자 잠시 흔들리고
제 가슴을 풀어 헤친 허공,
내 가슴의 잠금장치도 녹물 토해내며 삐걱거린다
그가 다녀간 것이다
그가 내 몸에 머물던 때가 있었다
첫아이를 낳고 산후풍이 들면서
아이 대신 그를 품었었다
내 뼈마디마다 그의 손길이 다녀갔다
그와의 통정은 언제고 통증을 유발했다
그때 나는 그와의 이별을 얼마나 원했던가
이별 후 나는 그의 행방을 알려하지 않았다
간간이 역전이나 공원에서 노숙을 한다는 그
요즘 들어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사를 하다 삐끗한 허리에 통증이 느껴진다
ㅡ월간『우리詩』(20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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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협로
―모란(peony)에게 쓰는 편지
김영찬
피오나(Peona), 밤이 깊었다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움푹 패인 어깨 위에
밤이 깊었다
봄꽃은 지고 새로 자란 발톱이 아프도록
밤이 깊었다
그믐달이 조심조심 뒤꿈치 들고 걸어나간 길들 모두
속사정 알 수 없이 무겁게
밤이 깊었다
피오나, 아무도 그립지는 않아 두려움 없는
너는 피었다
머리카락 성긴 바람이 불어와 말없이 쌓이는 곳
손닿지 않는 구름 속의 협로 그 깊은
화심 속에 등불 환한 밤
밤이 깊었다
ㅡ계간『시선』(2010.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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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신부
배성희
반갑습니다
초여름 저녁
도발하는 자에게 기울이는 사물의 지능이 세 겹의 능선을 보여줍니다 산을 바라보던 두 입술이 아아- 동시에 감탄하면 시간은 아무데도 없고 그저 짙푸른 능선이 그 순간의 몸일 뿐
부풀어 날아온 나무향기가 속눈썹을 건드릴 때
말랑해진 틈새로 최초의 하모니가 흘러들 때
저체온으로 살고 있던 손가락이 금방 데워지네요 다정한 손바닥 안에서 예쁜 물고기들 갑자기 떼 지어 수로를 마구 돌아다니지만
상자는 열릴 가능성으로 남을 때 가장 아름다워
우리도 마찬가지
석양일배(夕陽一杯)의 취기도 마찬가지, 샬롬
샬롬, 헤어져 돌아갑니다 눈보라 매서운 수목한계선에서 무릎 꿇고 生을 버틴 목질로 바이올린 만들어 연주할게요 공명의 극치를, 나 홀로 떨리는 그 선율 산정호수에 번질 테지요
우주의 파동으로 만들어진 육체
시선만으로 포개져 굽이치는 능선들
아쉬움 없는 저녁이라면 나아씽베터 나아씽베터
또 다른 소멸의 무대에서 바이올린과 활이 되어 만나자는 싱거운 소리 생략하고 악수를 합시다
바람이여
유월의 손바닥이여
ㅡ계간『시평』(2011.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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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붓
위승희
지는 해가 아름답다고
내 것이라 할 수 없고
봄날 아지랑이 한 쌈지로
세상을 건널 수도 없네
물안개 한 다발로
모든 것을 덮을 수도 없고
물방울 한 방울로
가뭄을 충분히 적실 수도 없는 일,
실금 간 방죽에 집을 지을 수도 없는
저 광녀의 노래는
침잠하는 푸른 늪 가시연잎 한 장 위에
고행하는 산그림자로 어룽어룽,
아름다운 것은 눈물이다
눈물은 거울이 되어 서 있다
ㅡ월간『현대시』(2009.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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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룽다*
박미산
오방색의 등지느러미는 부드러웠다.
내 안으로 들어온 바람
임독맥을 거쳐
머리 위에서 빙빙 돌았다
밤이 되면 머리끄덩이 잡혀
파랗게 춤을 추었다
많은 물고기 떼가 나를 따라 돌았다
세상이 노랗다
썩지 못하는 흰색의 잠
단단해진 불면
숨은 물갈퀴로 빙벽을 잘랐다
거대한 얼음산이 산산이 부서지며
내 발끝에선 검고 검은 세계가 수없이 갈라졌다
굉음과 돌풍
기와 혈,
속에서 이리 저리 흔들리는 등지느러미를 보았다
바람의 말
다 날아가고
텅 비고 색 바랜 내가 문득, 남는다
註) 룽다 *:불교의 경전이나 소망을 적어 걸어놓는 티베트 사람들의 오색 비단 천
ㅡ계간『서정시학』(2008.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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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부르튼 심장처럼
하린
나의 마지막 개는 어두운 토방 밑에 있었다
약 먹은 쥐를 삼키고 버려진 소파처럼 죽어갔다
개가 그을리는지도 모르고
난 아랫목에 누워 ‘플랜더스의 개’를 봤다
뱃속에서 녹은 고깃국은 토해지지 않았다
목줄과 밥그릇만을 묻었다
개의 무덤에서 사나운 바람이 짖어 댔다
바람의 부르튼 심장처럼 미친개가 되어 달렸다
눈물을 훔치며 변성기를 지났다
ㅡ월간『현대시학』(200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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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실내악
김언
이 방에서 그는 여러 군데 앉아 있다. 동시에 수십 군데에 앉을 수도 있다. 구름의 배치에 따라 의자의 위치가 바뀌고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며 앉아 있는 포즈가 발견되고 그사이 침묵이 흐른다. 느리게.
그는 밤에 보이는가 싶더니 낮에도 서 있다. 낮에도 천장은 충분히 높고 그는 등을 웅크리고 들어선다. 구름은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방향을 바꿀 것이다. 의자 위에도 윤곽이 남아 있다. 천천히.
침묵을 견디지 못해 귀를 틀어막는 한두 사람의 손이 있다. 그 손가락이 오늘 밤의 연주곡목이다. 그는 밤에 보이는가 싶더니 낮에도 가만히 서 있는 소리를 낸다. 예정된 시간에 그는 일어섰다. 앉아 있던 그가 의자 위에도 남아 있다. 죽은 듯이 침묵을 흘리는 이 방에서 그는 여러 군데 앉아 있다. 브라보!
그의 음악이 그의 기침 속에 섞여들었다. 그의 기침이 그의 음악 속을 파고든다.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며 그는 앉아 있다. 그렇게 일어설 때가 있다. 그는 아직 만들어지고 있다.
ㅡ월간『현대시학』(200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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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나라
김은숙
바람의 나라로 가는 것은 예약이 필요 없지
다만 제 몸의 물길을 만들어 수 있어야 하네
물의 몸짓으로 일렁이며 무심히 하늘길 접어들어
바람의 몸속을 넘나들 수 있어야 하네
일렁이는 물길 아래로
시퍼런 멍이 울멍울멍 슬픔처럼 고이고
너른 등짝 한가득 푸르스름한 이끼로 덮이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물길에 정박하여
문득 바람의 나라에 이를 것이네
그 곳에선 오래 묵은 속엔 것들 다 토해내고
뼛속까지 바람의 몸이 될 것이니
다 바랜 기억도 허공에 흩어져
마음자리 하나 남기지 않을 것이네
온 우주에 바람소리가 전부인
저 먼 세상에 닿아
ㅡ웹진『시인광장』(201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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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영양제
김기덕
파도의 혓바닥이 태양을 삼킨다. 밤의 목구멍을 넘어 아침의 능선에서 꽃씨를 뿌리는 햇살, 파랗게 열린 길 위로 바람이 인다.
비타민은 채소의 언어였다. 순식물성의 말속엔 엽록소가 담겨있었다. 신진대사를 부르던 언어들은 뱀처럼 꿈틀거렸고, 한 알의 씨앗은 산과 바다를 풀어놓았다. 심해를 헤엄치는 상어 떼들, 근육질로 영그는 산비탈에 씨알들. 한 계절의 농익은 얼굴들이 토마토를 심는다.
바람은 계절 내내 나무들의 유방에 볼을 부비고, 이파리를 흔들며 젖을 물렸다. 햇살 밴 과실의 유두를 빨면 꿀물이 쏟아지던 하늘.
바람이 빠져나간 골다골증의 땅들은 황무지로 변해갔다. 끼니때마다 밥을 떠 넣으며 양분을 채워도 무의식의 토양에서 나무들은 고사목이 되어갔다. 랩을 씌우고 비닐 포장한 안개의 날들. “새로운 태양이 필요해” 바람의 알갱이들이 플라스틱 병에서 달그락거렸다. 하늘 사방에 매인 구름의 묵시록.
바람의 말씀은 미네랄이 되었다. 식이섬유의 알약을 삼킨 뿌리마다 풀냄새가 났다. 컹컹 짖어대는 어둠속에서 뼈의 백색분말들은 눈물로 녹아들었다.
가시만 남은 입으로 어머니의 젖을 빤다. 독으로 박힌 파편들이 뼈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고래들이 뛰는 맥을 짚어 노을을 넣고 숲의 바람으로 빗어낸 캡슐. 목구멍으로 넘기자 초신성이 타오른다. 온 몸으로 번지는 붉은 파도. 입에서 나온 말들이 딸기밭에 불콰하다.
태풍이 몰려온다. 가득 수액을 실은 바퀴를 밀고와 후드득 뿌리마다 바늘을 꽂는다. 새파랗게 일어서는 핏줄.
ㅡ웹진『시인광장』(201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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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목회
천서봉
붉은 창문들 저무네. 거리엔 부옇게 물길이 번지고 벗겨진 대지의 표면이 비늘처럼 흘러가네. 햇살의 따가운 못질 뒤에도 나무들은 자꾸만 제 잎 쥐고 휘청거리네.
버려진 오르간처럼 켜켜이 쌓인 공사장 파이프들이 저녁을 연주하네. 노을 따위를 발음하면 삶은 늘 뿌리부터 뒤척인다고, 저기 어깨 둥글게 웅크려 철야기도를 준비하는 가로수.
공중을 만지는 평화로운 연기를 보네. 바람은 오후 6시를 읽는 기술, 혹은 복음. 흔들려야지. 흔들려야지. 깃대처럼 골목에 나를 꽂아두네. 떨어져 빈 나뭇잎 자리까지, 다만 모든 것이 바람의 영역이네.
늦은 상점의 문이 스르륵 밀렸다가 절로 닫히네. 누구일까. 누구일까. 어둠의 긴 목이 자꾸 기울고 사람들은 정물처럼 늙어가네. 모두가 바람의 존재를 믿었지만 아무도 그의 뼈마디를 보지 못하네. 푸르르,
저마다의 십자로를 건너는 시간, 허파꽈리처럼 웅크려 핀 생의 바람꽃들, 지천이네. 자라, 자라, 잠들지 않는 한밤의 환한 집회를 보네.
ㅡ『작가세계』(신인상 당선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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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팜파탈
신지혜
작두 위 칼날 타는 巫女같다
아까부터 가느다란 전선 줄 위에서
겨울 삭풍 한 줄기 줄타기한다 아니,
줄이 바람 데리고 엄한 神女처럼 호통친다 그렇게
춤사위가 약해서야 삼대천 하늘 서슬이 어디 시퍼래 지겠느냐,
쇠방울소리 요란하게 별들 떨어져 내리겠느냐
답십리 살 때, 앞집 살던 18살 선옥이,
웃을 때 보조개 예쁘던 그녀가
신내림 받던 날, 나 그녀가 맨발로 작두 타는 것 보았다
몇 번 죽을 고비 넘긴 후에야 허공 능선과 구릉 오르내리며
칼날 위 한 리듬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신지체 장애자 아버지와 맹인 어머니와 두 동생 위해
아무리 먼 산간 벽지라도 억척같이 달려가
재수 굿, 성주맞이, 푸닥거리, 진오기, 굿판 걸지게 벌이던 선옥이,
생의 경지가, 더도 말고 작두날 타듯 해야,
삶의 억센 요새 옴짝달싹 못하게 함락시킬 수 있다고
들려주던 선옥이,
새파랗게 질린 겨울 하늘 밑, 저 바람
살아있는 칼날 위 신명나게 춤추는 법 이제야 터득하게 되었을까
끝 벼린 칼날의 날카로움 비로소 읽었다는 듯, 바람이 줄 퉁기며
능란하게 공중제비 휘돌아 치고 있다
ㅡ월간『현대시학』(200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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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육체
김륭
몸 안에서 죽은 시간이 머리카락으로 자라
들어 올린 머리, 팔베개 할 수 없는 달의 무덤가로 훌쩍 키만 자란
바람이 울어 자꾸 울어 손발만 그려주면 사람이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는
당신
털썩, 주저앉아 바닥칠 수 없는 나무를 갈비뼈 삼아 육체를 드러내는 당신은 라면박스로 집 지어준 새끼고양이 같아서 우리 어머니 죽어서도 고삐를 놓지 않을 송아지 같아서
운다 자꾸 울어서 죽지 않는다 살아서 울며
울어서 죽음마저 깨운다
울어라, 울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다
울음의 솔기가 풀릴 때마다
돋보기 쓴 어머니 바늘에 실 꿰고 나는 낮은 지붕 위로
가만히 눈물 한 장 더 얹어둔다
문 쪼매 열어봐라
너그 아부지 왔는갑다
ㅡ계간『문학나무』(2008.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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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날개
이병률
먼 산에 올라 나무를 두리번거렸다
나무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걷고 걸어 나무 하나를 찾았다
나무를 찾고 산의 마음에 표시를 하였다
반을 얻은 것 같았다
다시 나무 하나를 찾았다
하지만 아직은 서쪽으로 더 클 일이 있는 나무여서
나무에 돌을 매달고 다시 멀리 먼 산의 마음에 표시를 하였다
그리하여 일 년쯤을 기다려 두 나무의 큰 가지 하나씩을 베었다
사개를 맞대고 질빵을 걸으니
반은 절반을 마주 보며 어깨가 되었다
어깨 위에 또하나의 어깨를 메고
그 위에 세상을 얹고 걸어나갔다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세계를 지나갔다
한번 얻은 지게는 버릴 것이 못 되었다
어깨를 자른대도 지게는 나를 따라왔다
내 살을 지고 내 터를 지고 풍경마저 한몸처럼 옮겼다
누구나 죄진 사람같이 지게로 태어나
죄처럼 업혔던 시절이 있었다
업힌 것이 날개인 줄 알고
퍼드득퍼드득 살려고도 하였다
ㅡ계간『문학동네』(2007.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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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미술관*
유지인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다
미감이 사라진 혀와 입의 적막한 동거 같다
텅 빈 공간 앞에서 질문을 까먹은 사람처럼 멍해진다
호흡의 난간에서 날리는 비명의 한 점 같은
눈동자의 초점을 그리다말고 떠난 모래사막에서
너는 모래알 섞인 밥알을 보내왔지
모래 속을 빠져나가는 물을 붙잡으려 했던 적 있다
그런 날의 숫자들은 달력에서 눈이 빨개진 채 매달려 있다
바람의 갈비뼈 속에서도 태어나는 것들이 있다고
스스로 만든 다리를 건너는 법을 알게 되었지
뒤돌아보지 않는 바람의 눈빛을 여기서 만난다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신선한 바람의 아이들이
예술의 눈초리에 매달린 속눈썹처럼 팔랑거릴 때
바람은 산통을 끝낸 산모처럼 여유로웠다
느낌의 실체를 만나러 왔다던 너는
문틈에 옷자락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바람의 방백을 듣고 간 게 분명하다고
한동안 연락하지 않는 너의 침묵이 배달되어왔다
느낌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은
다 실체의 옷을 벗은 추운 몸뚱이 같은 거라고
가 닿을 수 없는 바다 끝을 바라보다 주워든
낡은 소라껍질 속에서
바람의 생각은 점점 골똘해져갔다
*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이타미 준이 건축한 미술관 이름 그곳엔 그림은 없고 대신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ㅡ계간『시안』(2012.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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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숲의 패밀리
강가람
그 숲에 가면
천 개의 입술을 가진 언어들만큼이나 다른 느낌의 바람이 살지
그것은 너무 오래된 것이어서 숲의 패밀리였네
연둣빛 잎사귀마다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는 불후의 입술
내가, 나의 곁에 선 당신의 존재를 확신하듯
사랑의 위태로움은 바람으로부터 시작되지
조금 슬픈 바람의 노래에
점점 가늘어진 그림자로 떨고 있는 너를 보았지
으르렁거리다 으름장을 놓고
할퀴고 사나워졌다가도
금방 온순해져서 킬킬대는 패밀리
서로 목을 끌어안고 입씨름을 하다가
바람이 빠져나가면
너는 텅 빈 항아리
높은 곳에서 혹은 뿌리에서
연두에서 갈색으로 건너뛰면
때론 폭포처럼 때론 시냇물처럼
너를 다 마셔버린 뒤
초록 아가미로 살랑대는 바람
바람의 품에 꽃과 향과 열매를 안겨준
너
대답해 봐
너는 바람의 뿌리를 믿은 적 있니
ㅡ계간『시인시각』(2009.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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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게 묻는다
양은창
대나무 숲은 바람의 층계다.
한 층 오를 때마다 더해지는
흔들림의 강도
우리도 한때 아찔한 높이로 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팽팽한 탄력은 언제나 제 자리로 돌아오는 법
참, 고마웠다고, 평생 잊지 않겠다는 말
부질없다.
늘어선 경계의 위태로운 혼들에게 보내는
경배의 눈길도 거두어라.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곧은 몸매로 매섭게 버티는 건
태생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비어있는 몸
단 한 번의 절망으로도
파멸에 이르는
저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라면
안녕이라는 말, 부디 행복하라는 말
한 마디도 나는 버겁다.
바람으로 쌓아올려 바람으로 무너지고
말로 쌓아 올려 말로 무너지는 여기는
시방 첩첩이 쌓아올린 푸른 뼈들의 무덤이다.
ㅡ웹진『시인광장』(20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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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비림 혹은 1과 고등어
최광임
바람에게 제 몸을 맡긴 창문이 막무가내 울다
잠들 즈음 나는 눈을 뜬다
한밤중이 목전인 11시가 새벽 한 시경의 적막 같다
이마를 쓰다듬던 부드러운 손길과 그윽한 눈빛을 만나던 시간이 다
스르르 몰아오던 나의 잠이 언제나 너의 손끝에서 시작되었을 때도
지금처럼 비릿한 냄새가 묻어나곤 했다
그러므로 새벽의 1시는 푸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다를 떠올리는 고등어의 푸른 모습이다
뒤척일 때마다 비린내가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람이 자꾸 비림으로 읽히는 침침한 눈 때문은 아니다
늘 비를 거느리고 있는 바람의 모습을 제대로 읽기위해
실눈을 뜨거나 거리를 조정할 때 덜컹 혹은 후두둑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급한 소리 뒤에는 언제나 그 냄새가 있었다.
창문이 잠결에도 우우우 몸부림친다
생각이 그리움 쪽으로 기울수록 기억은 비릿해진다
어쩌면 막무가내로 울었던 것은 바람이라야 옳을 것이다
1과 고등어의 관계를 11시로 보았던 것처럼
지금의 내 생이 부단히 소망해온 너라는 영역이 실은 그리움이었듯
비로소 내가 어떤 너를 그리워한다 한들
내 안의 그리움이 저를 그리워한 것과 같이
초저녁 선잠에서 깨어보면 11시가 1시로 읽혀도 무방하게 될 즈음
바람과 비림과 1과 고등어의 거리에 대하여 감각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이
ㅡ계간『시와 사상』(201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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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구름의 호적부
손택수
게을러터진 아버지는 내 출생신고를 이태나 미뤘다
나의 무정부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면사무소를 찾아가는 대신 나는 하늘과 땅에 출생신고를 했고
바람과 구름의 호적부에 먼저 이름을 올렸다
삼인산 너머로 지는 노을과
하늘을 아주 까맣게 물들이던 까마귀들이 나의
면서기였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어머니 등에 업혀 바라보던 꽃들, 별들
순간순간들이 나의 든든한 정부요 국가였다면 어떨까
출생신고를 미룬 그 이태가 나의
평생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게을러터진 아비의 아들답게
사망신고를 미루고 미루면서
나는 아버지의 유골가루를 품고 다닌다
반은 어머니가 계시는 바닷가 언덕에 묻고
반은 삼인산에 뿌릴까 영산강에 뿌릴까
사십 년 만에 귀향한 고향의 느티나무에게 한 줌,
학교에 가지 못해 훌쩍거리며 걷던 논두렁에게도 한 줌
오매 저 냥반이 성식이 아닌가
엄니 대신 빨래 다니던 대추리댁 둘째 아닌가
수런거리는 대숲에게도 한 줌
세월아네월아 나도 한 이태쯤 이렇게 버텨볼까
지울 수 없는 바람과 구름의 호적부 속에서
―격월간『시사사』(2014.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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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신경림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멸치 국물 냄새가 난다
광산촌 외진 정거장 가까운 대폿집
손 없는 술청
연탄 난로 위에 끓어넘는
틀국수 냄새가 난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기차바퀴 소리가 들린다
갯비린내 싣고 소금밭을 지나는
주을이라 군자의 협궤차 소리가 들린다
황석어젓 이고 새벽장 보러 가는
아낙네들의 북도 사투리가 들린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갈대밭이 보인다
암컷 수컷 어우러져 갈갬질하는
개개비가 보이고 물총새가 보인다
강가 깊드리에서 나래질하는
옛날의 내 동무들이 보인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꿈을 꾼다
버들고리에 체나 한 짐식 덩그머니 지고
그 옛날의 무자리되어 길 떠나는 꿈을
가세가세 흥얼대며 길 떠나는 꿈을
ㅡ시집『가난한 사랑노래』(실천문학사, 1988)
ㅡ시전집『신경림 시전집 1』(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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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신경림
산기슭을 돌아서 언 강을 건너서 기름집을 들러 떡볶이집을 들러 처녀애들 맨살의 종아리에 감겼다가 만화방도 기웃대고 비디오방도 들여다보고
큰길을 지나서 장골목에 들어서서 봄나물 두어 무더기 좌판 차린 할머니 스웨터를 들추고 마른 젖가슴을 간질이고 흙먼지를 날리고 종잇조각을 날리고
가로수에 매달려 광고판에 달라붙어 쓸쓸한 소리로 축축한 소리로 울면서 얼어붙은 거리를 녹이고 팍팍하게 메마른 말들을 적시고
ㅡ시전집『신경림 시전집 2』(창비, 2004)
ㅡ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27』(동아일보. 2014년 3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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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엔 뼈대가 있다
류호숙
무슨 헛소리냐 하겠지만
며칠 전에도 지하철 환기통 빠져나가는
바람 무리와 나란히 걸으며
마른기침처럼 흩날리던 그들의
은밀한 얘기를 엿들은 적 있다
거대한 먹구름을 몰고 다니면서
하늘이란 하늘은 전부 씹어 먹고 거드럼 피우다
밤이면 소복 입은 달빛이
오롯이 모여 앉은 신천변을 건너뛰어
자동차 전용도로를 내달리던
매머드보다 웅장한 흰 뼈의 뒷모습을 보았느냐
손사래 치지 말라
뼈대가 없다면 저 아름드리 상록수를
어찌 자빠뜨린단 말이냐
팔공산을 베고
낙화에 엎드려 곤히 쉬는
저 바람의 긴 꼬리벼는 건드리지 마라
ㅡ『대구의 詩』(대구시인협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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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조문
이서화
한적한 국도변에 弔花가 떨어져 있다
내막을 모르는 죽음의 뒤끝처럼
누워있는 화환의 사인은
어느 급정거이거나 기우뚱 기울어진 길의 이유겠지만
국화꽃들은 이미 시들어 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잡풀 속
며칠 누워있었을 화환
삼일동안 조문을 마치고도 아직 싱싱한 꽃송이들
잡풀 속 어딘가에 죽어 있을
야생의 목숨들 위해
스스로 이쯤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까
같이 짓물러가자고 같이 말라가자고 누워있는 화환
보낸 이의 이름도 사라지고
꽃술 같은 근조(謹弔) 글자만 남아 시들어 간다
길섶의 바랭이 강아지풀
기름진 밭에서 밀려난 씨앗들이 누렇게 말라간다
누군가 건드리면 그 틈에 와락 쏟아놓는 눈물처럼
울음이 빠져나간 뒤끝은 늘 건조하다
지금쯤 어느 지병의 망자도 분주했던 며칠의 축제에서
한 숨 돌리고 있을 것 같다
먼지들이 덮여 있는 화환 위로
뒤늦은 풀씨들이 떨어진다
밟으면 바스락거릴 슬픔도 없이 흘러가는 국도변
가끔 망자와 먼 인연이었다는 듯
화환 근처에 뒤늦게 찾아와 우는 바람소리만 들린다
―계간『시산맥』(2012. 겨울)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19』(용인신문. 2013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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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게 묻는다
나태주
바람에게 묻는다
지금 그곳에는 여전히
꽃이 피었던가 달이 떴던가
바람에게 듣는다
내 그리운 사람 못 잊을 사람
아직도 나를 기다려
그곳에서 서성이고 있던가
내게 불러줬던 노래
아직도 혼 자 부르며
울고 있던가.
ㅡ시집 『사랑, 거짓말』(푸른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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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김사이
간드러지게 노래를 잘하던 외숙모 눈웃음이 예뻤던 외숙모 고만고만한 새끼들 다섯을 놓고 동네 사내랑 눈 맞아 도망간, 도망을 가도 하필이면 옆 동네라니 바람처럼 멀리 멀리 날아가든가 바람 잘 날 없는 집에 시집 와 바람으로 맞선 외숙모는 바람처럼 사내와 도망을 친다 뿌리를 흔드는 태풍은 못 되면서 소문만 무성하게 흩뿌려놓은 채 잡혀오기 일쑤였다
세 들어 사는 동생네에 갓난이까지 줄줄이 맡겨놓고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외삼촌, 소주 됫병 나발 불고 동네방네 휩쓸고 다니다 마지막 길엔 어머니를 찾아와 깽판을 부리고 꼬꾸라지던, 마흔 즈음 먼저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외숙모의 바람은 멈추었으나 큰아들이 바람을 잡아탄다 큰아들의 바람을 잠재운 두 딸들 그제야 바람도 같이 늙는다
도망간 남편을 기다린 여자에겐 바람의 욕망이 없었을까 그 여자의 남자에게 첫 순정을 내주었던 어머니는 바람의 욕망이었을까 한창 꽃 같은 시간들이 바람 따라 흩어져 버렸다 아픈 시간들이었다 아팠기 때문에 견뎠을 바람 같은 삶 아프기 때문에 바람을 좇아 떠돌았던 아버지 내 핏속에도 스며있을 바람의 씨앗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마흔을 넘어서니 독기가 옅어진다 발갛게 열이 오른다 내 자궁 속 바람의 씨앗이 꿈틀거리는 것일지도
―계간『창작과 비평』(2013.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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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박물관
손현숙
나무판과 나무판 사이 그 간극 위에
각 없는 지붕 하나 달랑 올렸다
헛것으로 채워진 헛간
문 없는 문 속으로 발 들이민다
조각조각 틈새로 스미는
빛의 잔상, 몸 없는 몸들이 쏟아진다
눈 감고도 환한 집
자명한 대답 속에 서있는 듯
무채색의 덩어리 한 채
바람은 우연히 제 몸집 부풀린다
빛과 어둠으로 얼룩진 바닥
제 목청껏 우는 울음소리에
바람은 앞뒤 없이 바람을 불러온다
그 바람에 하늘과 땅 비스듬히 섞일 때
꽃 한 송이 길 없이도 길을 연다
이 길 유유히 통과하는 동안이면
육신은 잿빛으로 반짝반짝 가벼워도 좋겠다
누구나 잠시 빌려 입는 바람의 말
평생을 이어놓은 긴 질문처럼
나는 지금 세상에 없는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오는 중
백년을 걸어서 하루를 통과하는
여기, 앉아서 평생을 탕진해도 좋겠다
―월간『유심』(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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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반칠환
저 놈은 대단한 독서광 아니면
문맹이 틀림없다
열흘째 넘기지 못한 서적을
돈 세듯 넘겨놓고,
포플라 잎 팔만대장경을
일제히 뒤집어 놓은 채 달아난다
―시집『전쟁광 보호구역』(지혜사랑,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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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김지혜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유목의 봄,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의 다른 말은 유목
들판을 옮겨 다니다 툭, 터진 꽃씨는
허공을 떠돌다 바람 잠잠한 곳에 천막을 친다
아주 가벼운 것들의 이름이 뭉쳐있는 어느 代
날아오르는 초록을 단단히 잡고 있는 한 채의 게르
꿈이 잠을 다독거린다.
떠도는 혈통들은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 어느 종족의 소통 방식 같은 천막과 작은 구릉의 여우소리를 데려와 아이를 달래는 밤
끓는 수태차의 온기는 어느 후각을 대접하고 있다.
들판의 화로(火爐)다.
노란 한 철을 천천히 태워 흰 꽃대를 만들고 한 몸에서 몇 개의
계절을 섞을 수 있는 경지
지난 가을 날아간 불씨들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살아나고 있다.
천막의 종족들은 가끔 빗줄기를 말려 국수를 말아 먹기도 한다.
바닥에 귀 기울이면 땅 속 깊숙이 모래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초원의 목마름이란 자기 소리를 감추는 속성이 있어 깊은 말굽 소리를 받아 낸 자리마다 바람이 귀를 접고 쉰다.
이른 가을 천막을 걷어 어느 허공의 들판으로 날아갈 봄.
《2011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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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얼굴
김주대
노을은 바람이 얼굴을 가지는 시간이다
붉은 구름으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바람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말들을 시간의 서쪽에 내려놓는다
돛대 끝에 올라앉은 갈매기 한마리가
노을의 목소리에 젖어
하늘을 듣고 있다
바람의 말을 품고 갈매기는 곧 멀리 날 것이다
ㅡ시집『그리움의 넓이』(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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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1
이영춘
그가 떠난 빈 집 마당에 차를 세워 놓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통째로 저당 잡힌 내 동생의 집, 서까래에선 바람이 윙윙 늑대처럼 울었다 여기저기 붙은 붉은 딱지, 그가 토하고 떠난 핏덩이처럼 뭉클뭉클 구름덩이로 치솟아 올랐다 그가 남긴 흔적처럼, 목소리처럼 빈 소주병과 농약병이 웅웅댔다 누런 달빛이 그의 눈동자인 양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누나, 이제 그만 돌아가!’ 그의 손길이 어느새 내 등을 토닥거리고 사라졌다 적막이 그의 목소리로 꺽꺽 울어댔다
나의 엔진은 오래도록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이영춘 제7시집『노자의 무덤을 가다』(서정시학,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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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색깔
김혜선
물크러진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임종이 머지않았습니다, 의사가 나간 후
저녁으로 나온 멀건 죽을 떠 먹였다
냄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 때 바삭바삭 씹히는 콘프레이크 같았다
팬티만 입고 추는 맘보춤이거나
여자의 광대뼈를 빛나게 하는 펄 쉐도우였다
스카프 끝에 매달려가는 수컷 인플루엔자일 때도 있었다
나는 그의 맨홀에 빠진 뚜껑이었고
광장에서 치솟아 오르며 우는 분수였다
역광 속으로 사라지는 여우비였고
장롱 밑 신문지에서 녹은 나프탈렌 이었다
그물을 뚫을 듯 팔딱거리던 새파란 물고기의 때를 지나는 동안, 그는
냄새였다
꽃으로 위장한
썩지 않는 색깔
빨간 팬티 같은 양파망을 뒤집어쓴 수수 알 조 알 들
주르르 한 생이 흘러내릴 듯
숟가락을 물고
기저귀를 다 적시고 흘러 넘쳐
그는 밤꽃 같은 눈으로 지린 바다를 풀어놓고 있었다
―웹진『시인광장』 (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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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향기를 맡아라
강인한
한때 나는 뉴스 생산자였다.
피곤한 일이었지만 수고한 만큼 찰진 보람도 있었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탄다.
내게 다가와 얼굴을 어루만지며 뒤로 자빠지는
강바람은 한 템포 느린 감정을 지녔다.
구름과 별을 제치며 나는 달린다.
이 강변의 자전거전용도로를 달리는 자들, 그들은
대대손손 행복하리라. 오래오래 이 뉴스 생산자를 기억하리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
일찍이 나는 빗자루를 탄 마녀가 돼서 번개처럼 날아간 적이 있다.
이것은 일급비밀, 기브 앤 테이크는 만고불변의 외교 원칙이다.
익사자들 마흔여섯 명을 영웅의 반열에 봉헌하는 일은
아무나 행하지 못할 일,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애국적으로 폭발하는 군함이 있다.
나는 유머를 좋아하는 뉴스 생산자.
어린이날 뜨락에 놀러온 병아리들에게 나는 말했다.
나쁜 아저씨들 때문에 날마다 속을 썩이고 그들로부터 여러분을
지키기 위하여 밤잠 못 잘 때가 많아요.
하지만 여러분들을 보면 한없이 즐거운
나는 정직한 뉴스 생산자.
때로는 카오스의 뉴스가 윤슬처럼 빛나는 곳,
아직 코스모스는 피지 않았지만
튼튼한 댐 위로 불어오는 초록빛 바람을 흠, 흠, 흠,
나는 흠향한다. 녹차라테의 향기, 오르가슴으로 뒤트는 강물의 기쁨을.
―계간『시인동네』 (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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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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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시
이해인
바람이 부네
내 혼에
불을 놓으며 부네
영원을 약속하던
그대의 푸른 목소리도
바람으로 감겨오네
바다 안에 탄생한
내 이름을 부르며
내 목에 감기는 바람
이승의 빛과 어둠 사이를
오늘도
바람이 부네
당신을 몰랐다면
너무 막막해서
내가 떠났을 세상
이 마음에
적막한 불을 붙이며
바람이 부네
그대가 바람이어서
나도
바람이 되는 기쁨
꿈을 꾸네 바람으로
길을 가네 바람으로
―시집『나를 키우는 말』(시인생각,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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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性別
마경덕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람이 너울너울 밀고 간 모래물결,
맨발로 사막을 건너간 암컷의 흔적이다. 치맛자락 끌고
조신하게 걸어갔다. 수천 년 모래알을 새며 사막을 걸을
수 있는 자는 몸을 찢은 어미만이 가능한 일,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은 어디론가 흘러간 제 새끼를 보려고 족적
足跡을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기록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낙타의 행렬
이 그녀의 발자국에 겹쳐지고 바람이 묻힌 자리에 또 바
람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니,
이곳에서 이별이란 그저 사소한 일. 평생을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쳐도 늙어버린 어미를 기억할 바람은 없다.
새끼를 낳은 것들의 형벌은 떠난 자식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뼈를 묻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막의 오랜 관습. 별들의
장지葬地가 된 이곳에서 떠돌이 바람도 수없이 뒤꿈치를
물렸을 것이다. 그때 물결 같은 발자국이 찍혔을 것이다.
사구沙丘를 넘어온 회오리바람이 모래밭을 헤집는다.
짝을 잃은 수컷들이다.
ㅡ계간『시와 정신』(2011년 봄)
ㅡ시집『글러브 중독자』(애지, 2012)
2021년 1월 7일 오후 7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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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유전자를 보았다
마경덕
산 밑을 지나가는데
일제히 나무들이 날고 있었다. 새들에게 날개만 달아주
던 나무들이 재재거리며 새떼처럼 울었다.
누가 움켜쥐었다가 놓쳤는지,
이파리들 죄 구겨져 잠시 치솟더니 고꾸라졌다. 위험한
비행이었다. 먼발치에서 올려다본 산의 어깨가 수척했다.
바람이 쓸어내린 허공도 우묵했다. 마음을 버린 가을의
손바닥이 버석버석 마르고 있었다.
데구루루 화장실 바닥을 구르는 두루마리, 둥굴게 말려
벽에 걸렸던 숲의 기억이 쏟아졌다. 발목과 바꾼 날개를
달고 화장지는 멀리 달아난다. 나무는 뿌리를 버리는 순
간, 어디든 갈 수 있다.
대패와 톱으로 나무를 다듬던 아버지, 바람부는 날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ㅡ『문예감성』(2011. 봄.여름)
ㅡ시집『글러브 중독자』(애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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