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보폭으로
이은규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던 그가 묻는다
편도 저쪽의 바람은 간혹 상향등을 번쩍이며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생이 살아있음을 흩날림으로 확인하기 위해
時時로 바람을 건너 먼 곳으로 향하는 것들
스치는 흰 몸의 나무들 어둡게 환하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붐비는 바람
그리움으로 몸이 휘는 잎 하나 있다하자
왜 휘어지는지도 모르면서
미처 어떻게 휘어져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내내 바람이라는 가지에 걸려 있는 것들
바람 한 줄기를 피우기 위해
그는 또 얼마나 오래
생과 바람의 사잇점을 건너는 편도의 날들을 견뎌야 할까
길마다에 스며 발길을 재촉할 바람의 보폭
바람은 흩날리는 것으로 모든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
그렇게 흩날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서
그 안 보이는 몸을 소리의 亂廛에 숨기는 걸까
바람이 쉴 곳은
흩날림의 전언에 귀 기울이는 어느 귓바퀴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아니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기다림으로 몸이 휘는 잎 하나 있다하자
폐허라고 부르지 말자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는 바람
그 어떤 생의 흔적도 보탤 수 없는 폐허
時時로 편도 저쪽의 허공으로 불려가
한 점 바람으로 흩날릴 그가 있다
잎들, 바람의 보폭으로 몸이 휘는 밤
―웹진『시인광장』(20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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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주파수를 찾다
이은규
바람의 나라에 문자를 잊은 이들이 살고 있다
전해 듣는 신의 말처럼 먼 문장이 있을까
누군가 들려주는 경전은
신의 전언이 아니라 읽는 이의 목소리일 뿐
언젠가 라디오가 전해주던 정오의 그림자처럼
낡은 책장에 새겨진 지문
그럼에도 읽을 수 없었던 손들을 위해
움직이는 경전 만들어지다
경문(經文)이 적힌 종이를 돌돌 말아 원통 속에 넣은
마니차, 한 번 돌리는 것만으로 참회할 수 있다면
법륜(法輪)이 전하는 설법을 듣는다
결함 있이 둥글게 온전할 것
불필요하게 필요한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
바퀴를 굴려 이르지 못할 곳에 닿을 것
라디오에 달린 바퀴로 주파수를 찾던 시절
사람들이 찾으려는 건 신일까 바람의 주파수일까
문자를 기억하는 손들이 마니차를 돌리는 이유
궁금해 하지 않는 사이, 해는 지고
텅 빈 경내
어느 손이 두고 간
경전의 바퀴를 차르르, 차르르 돌리는 바람 한 점
ㅡ계간『서정시학』(2010.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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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지문
이은규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 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힌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여진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당신의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 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 行方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2008 젊은 시' (문학나무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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