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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 풀이 마르는 소리/눈 그친 달마의 차 한 잔 / 생선 굽는 가을 / 공놀이하는 달마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8. 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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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풀이 마르는 소리


최동호

 


벽지 뒤에서 밤 두시의
풀이 마르는 소리 들린다.
건조한 가을 공기에
벽과 종이 사이의
좁은 공간을 밀착시키던
풀기 없는 풀이 마르는
소리가 들린다.


허허로워
밀착되지 않는 벽과 벽지의
공간이 부푸는 밤 두시에
보이지 않는 생활처럼
어둠이 벽지 뒤에서 소리를 내면


드높다, 이 가을 벌레소리.
후미진 여름이
빗물진 벽지를 말리고
마당에서
풀잎 하나하나를 밟으면
싸늘한 물방울들이
겨울을 향하여 땅으로 떨어진다.

 

 


(『황사바람』.열화당.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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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그친 달마의 차 한 잔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최동호

 


은산철벽 마주한 달마에게
바위덩이 내려누르는 졸음이 왔다
눈썹을 하나씩 뜯어내도
졸음의 계곡에 발걸음 푹푹 빠지고


마비된 살을 송곳으로 찔러도 졸음이 몰아쳐왔다
달마는 마당으로 나가
팔을 잘랐다 떨어지는 선혈이 튀어*
하얗게 솟구치는 뿌연 벽만 바라보았다


졸음에서 깬 달마가 마당가를 거닐었더니
한 귀퉁이에 팔 잘린 차나무가
촉기 서린 이파리 햇빛에 내보이며
병신 달마에게 어떠냐고 눈웃음 보내주었다


눈썹도 팔도 없는 달마도 히죽 웃었다
눈 그친 다음날
바위덩이 졸음을 쪼개고 솟아난 샘물처럼
연푸른 달마의 눈동자


(여보게! 차나 한 잔 마시게나)

 


* 혜가는 어깨 높이로 눈 내린 날 스승에게 법을 물었다. 스승 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팔을 자르고 난 다음 혜가는 달마의 법을 얻었다.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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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굽는 가을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최동호

 

 

썰렁한 그림자 등에 지고
어스럼 가을 저녁 생선 굽는 냄새 뽀얗게 새어나오는
낡은 집들 사이의 골목길을 지나면서
삐걱거리는 문 안의


정겨운 말소리들 고향집 불빛 그리워 되돌아보면
낡아가는 문틀에
뼈 바른 생선의 눈알같이 빠꼼이 박힌
녹슨 못 자국


흐린 못물 자국 같은 생의 멍울이 간간하다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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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놀이하는 달마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


최동호

 

 

저물녘까지 공을 가지고 놀이하던 아이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공터가 자기만의
공터가 되었을 때
버려져 있던 공을 물고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걸어나와 놀고 있다


처음에는 두리번거리는 듯하더니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공터의 주인처럼 공놀이하고 있다
전생에 공을 가지고 놀아본 아이처럼
어둠이 짙어져가는 공터에서 개가
땀에 젖은 먼지를 일으키며 놀고 있다 다시


옛날의 아이가 된 것처럼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공터에서 쭈그러든 가죽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개는
놀이를 멈출 수 없다 공터를 지키고 선
키 큰 나무들만 골똘하게 놀이하는 그를
보고 있다 뜻대로 공이 굴러가지 않아 허공의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보는 눈길이 늑대처럼 빛날 때


공놀이하던 개는 푸른빛 유령이 된다 길게 내뻗은 이빨에
달빛 한 귀퉁이 찢겨 나가고
귀신 붙은 꼬리가 일으킨 회오리바람을 타고
공은 하늘로 솟구쳤다 떨어지기도 한다
어둠이 빠져나간 새벽녘
이슬에 젖은 소가죽 공은 함께 놀아줄
달마를 기다리며 버려진 아이처럼 잠든다

 

 


(『공놀이하는 달마. 200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