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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우리말 쓰기 - 'OPEN' 대신 '엶'으로, 'CLOSE' 대신 '닫음'으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8. 2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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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대신 '엶'으로, ‘CLOSE’ 대신 '닫음'으로
 
 

 

1%를 위해 99%를 무시하는 사회

 

어떻게 ‘엶’과 ‘닫음’이라고 표기할 생각을 했나요?
여기는 대한민국인데, 영어로 쓰여 있는 것들이 어딜 가나 많다는 점이 거슬렸습니다. 세계화 시대라서? 이곳은 서울의 중심, 광화문입니다. 우리 찻집에 방문하는 손님이 하루 천 명가량인데, 그중 외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요? 채 열 명이 안 됩니다. 영어 사용자보다 영어를 모르거나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손님이 훨씬 많습니다. 왜 1%를 위해 99%를 무시해야 합니까.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소통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글로 표기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OPEN’과 ‘CLOSED’보다 ‘엶’과 ‘닫음’이라 쓰는 게 훨씬 경제적이기도 하고요.

 

원래 우리말에 관심이 많았나요?
저도 남들과 다를 바 없었어요. 틀린 말을 쓰고, 비속어도 대수롭지 않게 썼죠. 그게 잘못된 것인 줄도 몰랐거든요.

 

어쩌다 우리말에 관심을 두게 되었나요?
국제경영학을 전공하고, 얼마 전까지 경영 컨설턴트로 살아왔어요. 몇 년 전, 한글 도메인 서비스 업체에서 재무 컨설팅을 했는데, 이 업체가 사무실을 한글회관으로 옮겼어요. 일 때문에 그곳에 자주 드나들다 보니, 같은 건물에 있는 한글단체 회원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졌죠. 그때부터 우리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말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나요?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밥 먹고 술 마시는 화기애애한 자리에서도 누군가 제가 쓰는 말 중 잘못된 것을 지적하더라고요. 그런데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신선한 충격이었죠. 무심코 쓰던 말 중에 틀린 게 많고, 틀린 것도 모르고 썼다는 것에 놀랐어요. 그때부터 한글 행사에 따라다니며 보고 배웠습니다. 남들만큼 알지 못하니 앞에 나설 수는 없어, 대신 운전사를 자처했죠.
부지런히 보고 들었습니다. 스승의 날의 유래가 세종대왕의 탄일이라는 것도 세종대왕 동상에 꽃을 바치는 행사에 따라가서야 알았고요.

 
공차 매장 사진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것들

 

‘엶, 닫음’ 표기 외에도 다른 가게와 다른 부분이 있나요?
남들 보기에는 다 비슷하겠지만, 나름대로 이것저것 바꿨습니다. ‘OPERATING HOUR’로 표기되어 있던 것도 ‘영업시간 안내’로, 영어로만 쓰여 있던 요일도 한글로 따로 썼어요. 음료 배달에 대한 안내 문구도 한글로 썼고요.
 
별것 아닌 것 같겠지만, 절대 쉽지 않았어요. 사실 지금도 본사 직원이 지적하면 배 째라고 우기기도 하고, 오기 전에 미리 공식 표지판으로 잠시 바꿔 두기도 합니다. 우리 찻집이 가맹점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내부 치장이나 표지 등을 본사 방침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요.
‘공차’가 타이완에서 들어온 것이다 보니, 본사에서 쓰는 상호, 상표, 상징에 한글은 한 글자도 없습니다. 죄다 한자와 영어죠. 문의 밀고 당기는 방향을 알리는 표지에도 ‘PUSH’와 ‘PULL’만 적혀 있는 거예요. 그것을 떼지는 못하니, 그 위에 ‘미세요’, ‘당기세요’라고 적힌 한글 표지판을 사다 붙였어요. 덤으로 ‘고맙습니다’라고 적힌 표지판도 붙였더니, 본사에서는 미관을 해친다고 난리입니다.
가게 앞 천막에도 원래 공식 상징과 영어 상호만 들어가는데, 제가 강력하게 요청해서 한글 상호도 함께 들어가게 했어요. 전국에서 유일하게 우리 찻집에만 있는 것이죠. ‘ORDER HERE’와 ‘PICK UP HERE’도 각각 ‘주문 받는 곳’, ‘음료 받는 곳’으로 바꿀 생각입니다.
요즘 고민은 모든 어휘를 적절하게 바꿔 쓸 수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주문이 몰리는 점심시간에 특정 음료를 빠르게 내오는 행사를 ‘빠른 코너’라고 이름 붙였어요. 구역? 줄? 쪽? 모퉁이? ‘코너’의 어감을 살리면서도 그것을 대체할 말을 찾기 힘들더군요.

 

‘빛찬’이라는 우리말 이름은 본명인가요?
본명은 김환기입니다. 빛날 환에 일어날 기를 쓰죠. 한글 이름을 지을 때 ‘빛나다’에서 ‘빛’을, ‘일어난다’는 의미를 ‘찬’으로 썼어요. 리의도 교수와 머리를 맞대고 지었는데, 아주 마음에 듭니다.
정식으로 개명 신청하려고 가족회의를 열었는데, 아직 통과는 못했어요. 쑥스럽다나요. 애들 이름도 다 맞춰 지어 놨는데 말이죠. 한글 사랑으로 세상 바꾸기는커녕 집안을 바꾸기도 쉽지 않네요. 웃음 대신 다른 데서는 늘 김빛찬으로 삽니다. 누리소통망이며 명함까지 모두 이 이름으로 바꿨어요.

 

손님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한글로 표기한 걸 알아보는 손님은 많지 않아요. 로마자 표기가 익숙한 거죠. 가끔 특이하다는 반응을 보면 뿌듯합니다. 매장에 한글 가온길한글과 관련된 이야기와 역사의 흔적을 모아 전시해 놓은 세종대로 일대의 길 안내 책자를 비치했더니, 손님들이 오가며 챙겨 갑니다. 한글 관련 책도 돌려 보라고 여러 권 두었는데, 마음에 드는지 많이 들고 가 버리더라고요. 웃음

 

이런 활동들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이런 노력을 하는데도 “고객님, 음료 나오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직원들이 있어요. 커피가 시급보다 비싸서 그렇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커피가 손님보다 높은 건 아니니까요.
요즘 젊은이들은 몹시 똑똑하고 진취적입니다. 직원이 시간제 근무 직원까지 스무 명 남짓인데, 어린 학생들이 특히 신기해하며 잘 따릅니다. 마른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들이죠. 잘못 쓰는 데 익숙해서 그렇지, 알려 주면 잘합니다.

 

김빛찬씨의 웃는 모습

개인이 우리말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대개 한글 사랑을 거창한 것으로 여겨 부담스러워 합니다.
문법을 잘 몰라도 되고, 한글단체에서 활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한글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 이색적이고 신기한 일로 여겨질까요? 한글과 우리말을 바르게 쓰려고 노력하다 보면 차츰 실력이 늘고, 자부심이 생깁니다.
내가 무심코 잘못 쓴 말이 우리말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노력합시다. 우리말을 품위 있게 써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나라가 바로 섭니다.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마음만큼이라도 실천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이지 않겠습니까.
 
김빛찬 씨가 말하는 한글 사랑, 우리말 사랑은 절대 거창하지 않다.
문법을 잘 알지 못해도,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실천할 수 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어느 한곳에서 일어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을 뜻한다. 그가 일으킨 잔잔한 바람이 바른 우리말 쓰기의 돌풍이 되길 바라 본다.

 
 

 
 

글, 사진_서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