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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논단] 좋은 시,좋아하는 시 / 권영민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9. 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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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논단] 좋은 시,좋아하는 시 / 권영민
[64호] 2013년 08월 01일 (목) 권영민 kwonsnu@snu.ac.kr

1.

좋은 시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사실 부질없다. 시를 ‘좋다’ ‘나쁘다’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럼에도 이 질문이 필요한 것은 시가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와 상상을 통하여 빚어진다. 시의 근본적인 특질이 인간의 정서와 상상에 있으며,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것이 시 정신의 본질에 해당된다. 모든 사물을 감성을 통해 받아들이고, 감성으로 표현하며,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시이다. 시는 삶의 다양한 경험과 충동에 정서적 균형을 부여하고, 인간의 삶을 보다 높은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초월의 힘을 발휘한다. 인간은 시를 통해 정서의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시는 인간의 감성 그 자체를 내용과 형식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인간의 삶을 노래하고, 인간의 꿈을 그려낸다. 인생을 표현하고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야말로 시의 영원한 과제이다. 시가 자연을 소재로 하든지 현실을 노래하든지 간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궁극적인 인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내면과 영혼을 울려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는 인간의 삶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시의 정신이 예술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시는 어떤 관념이나 사상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 정서와 상상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는 어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인간의 삶의 본질적인 표현이며, 그 새로운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어이다.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시어’라는 개념을 부여받고 있다. 물론 시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와 다른 별개의 언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를 확연하게 구별할 수도 없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이 시에서 쓰일 뿐만 아니라, 시에서 쓰일 법한 말이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쓰이고 있다. 일상의 언어를 시의 본질에 알맞도록 시에서 활용할 경우 그것이 시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그 의미와 기능만이 아니라, 언어의 조직에 있어서도 보통의 언어와는 구별된다. 시의 언어는 말의 뜻이나 논리에 의존하는 경우에도, 일상의 언어보다는 비약적이거나 날카로운 것이 보통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에 바탕을 두는 것이지만, 일상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지시적인 기능을 넘어서 정서적으로 그 의미를 확대한다. 그러므로 함축적인 기능이 살아나고 상징적인 의미의 공간을 새롭게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를 보다 높은 차원의 정서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려 그 의미를 심화시키고 확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내가 시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작품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 이 시는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적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는 ‘진달래꽃’의 의미를 시적 문맥에 따라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이 시가 얼마나 치밀한 짜임새의 시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진달래꽃〉에는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사이의 이별의 관계가 시적 정황으로 설정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이별의 상황 자체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실제의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시에서 이별은 실제의 일이 아니라 가상의 전제일 뿐이다. 이 시의 첫 연에서 시적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사랑과는 정반대가 되는 극단적 상황으로서 “나 보기가 역겨워”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님을 가정한다. 괴롭고 슬픈 이별의 장면을 사랑 앞에서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면,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늘어지지도 않고 아무 원망도 없이 고이 보내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시의 제2연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는 사람 앞에서 오히려 자신의 변함이 없는 사랑을 드러내고자 한다. 여기서 사랑의 상징으로 선택한 것이 ‘진달래꽃’이다. ‘영변의 약산’에 피어 있는 연분홍의 진달래꽃은 시인에게는 일상의 체험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시인은 이 같은 일상적 체험 영역에 근거하여 자기 정서를 표현하고, 그 표현에서 새로운 시적 감응력을 끌어낸다. 봄이면 ‘영변의 약산’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진달래꽃은 이제 영변 약산에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사랑의 의미로 채색되어 새로운 상징적 이미지로 창조된다.

이 시에서 진달래꽃이 사랑을 표상하는 상징적 이미지라면, 그 사랑이라는 시적 의미가 내면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은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떠나가는 길 위에 뿌리는 한 아름의 진달래꽃은 사랑의 크기를 나타내며,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아름이라는 말은 두 팔을 벌려 껴안은 둘레의 길이를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를 통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크고 많은 양이다. 이 말에 내포된 ‘두 팔을 벌려 껴안다’라는 동작의 의미는 사랑을 말해주는 몸의 언어에 해당한다. 시적 화자는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하면서 슬픔의 눈물을 보이지 않고, 떠나는 임 앞에서 한 아름의 진달래꽃을 통해 자기 자신의 변함없는 커다란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이별의 슬픔 대신에 크고 깊은 사랑의 진실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이러한 시적 형상화의 과정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 시의 텍스트에서 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제3연이다. 이 시에서 이루어지는 시적 진술을 서법상으로 구분해 본다면, 제3연은 서술형 문장으로 종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청유형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연, 제2연, 제4연의 경우는 모두 시적 화자인 ‘나’를 서술적 주체로 하여 ‘나’의 행위를 서술한다. 그러나 제3연은 떠나는 임에게 당부하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 시적 화자는 가시는 길 위에 뿌려 놓은 그 진달래꽃을 임께서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고 간곡하게 청한다. 여기서 “즈려밟고”라는 말을 ‘지레 밟고’라고 띄어서 읽게 되면 길 위에 뿌려진 진달래꽃에 또 하나의 의미가 덧붙여져 있음을 알게 된다. ‘지레’라는 말이 ‘미리 먼저’라는 뜻이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이 대목은 다른 사람이 밟고 지나기 전에 임께서 먼저 밟고 가시라는 뜻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한 아름의 진달래꽃, 그것은 사랑의 순결성을 의미한다. 이별의 순간에 한 아름의 진달래꽃으로 자기 사랑의 크기를 보여주고, 다시 그 사랑의 순결성을 표시하고자 한다. 이 시의 정조는 이 대목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가정하고 있는 이별의 상황은 슬픔의 장면이 될 수가 없다. 오히려 자기 사랑의 깊이와 진정성과 순결함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임에게 바칠 수 있는 황홀한 순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이별의 상황을 가정해 보며, 그 비극적인 순간을 눈물의 언어 대신에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꾸며낸다. 이 작품의 마지막 구절에서 시적 화자는 진달래꽃으로 상징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랑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였기 때문에,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별의 슬픔이 내면화하고 그 대신에 사랑의 진실이 자리 잡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빛나는 시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이별의 순간에 펼쳐놓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확인법을 누구도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달래꽃〉은 이별의 노래가 아니다. 이별의 아픔과 슬픔을 훨씬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이다. 임에 대한 크고 깊은 사랑, 깨끗하고 정결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3.

현대시는 이미지가 중심을 이룬다. 시적 이미지가 시의 의미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가 되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보다 구체적이고도 감각적으로 형상화할 방법을 찾게 된다. 이를 위해 시적 이미지가 동원된다. 시의 이미지는 시적 텍스트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시인은 유사한 이미지들을 반복시켜 놓기도 하고 상반되는 이미지들을 대조시켜 놓기도 하면서 시적 의미를 형상화한다. 시의 이미지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관념을 육화(肉化)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감각을 환기시키고 미적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시의 이미지는 시인이 창조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 감각적 구체성에도 불구하고 시적 의미의 모호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시의 의미를 위해서는 이미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내가 시적 이미지의 뛰어난 표현을 설명할 때 예로 드는 작품은 정지용의 〈비〉라는 시이다.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山새 걸음걸이.// 여울 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듣는 빗낱// 붉은 잎 잎/ 소란히 밟고 간다.
— 정지용 〈비〉

위에 인용한 〈비〉는 정지용의 언어 감각과 시적 상상력이 얼마나 뛰어난 형상성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단풍이 들기 시작한 골짜기에 가을비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공간적으로 형상화한다. 가을 산골짜기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과 그 수선스런 분위기를 섬세한 감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제1연에서부터 제6연까지는 골짜기로 드리운 구름의 그림자, 갑자기 몰아드는 음산하고도 차가운 기운을 담고 있는 바람, 바람에 몰리듯 바람을 앞서듯 돌 위로 날아와 종종걸음치는 산새 한 마리, 그리고 물이 줄어들어 하얗게 이리저리 갈라지면서 여울져 흐르는 골짜기의 물살 등이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구름과 바람, 산새와 시냇물이 모두 한데 어울려서 하나의 시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구름과 바람이 짝을 이루고, 산새와 물이 한데 어울린다. 물론 이들이 만들어낸 시적 공간은 이 시의 마지막 장면을 위한 무대 장치에 해당한다.

이 시는 제7연과 제8연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상을 종결한다. 여기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은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는 구름, 음산한 소소리바람, 까칠한 다리로 종종걸음치는 산새, 하얗게 여울져 흐르는 물살로 이어지는 시적 심상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시적 결정체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비는 우주와 자연의 산물이 된다. 이러한 시적 진실에 대한 발견이 절제된 정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시의 마지막 구절인 “붉은 잎 잎 / 소란히 밟고 간다.”는 정지용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이룰 수 없는 고도의 시적 감각을 자랑한다. 붉게 물든 나뭇잎 위로 소란스럽게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감각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대목은 묘사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시적 대상에 대해 생명을 불어넣는 언어적 기법이 놀랍다. 빗방울이 나뭇잎을 밟고 간다! 이것을 단순한 의인화의 표현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 섬세한 시적 감각과는 거리가 멀다. 소란스럽게 붉은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뭇잎을 밟고 간다고 표현한 것은 시각적인 감각과 청각적인 감각이 공감각적으로 작용하여 빚어낸 하나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시에서는 ‘빗방울’이라는 시적 이미지의 결정(結晶)을 위해 수많은 이미지를 통합한다. 구름이 이는 하늘, 골짜기로 몰아오는 바람, 두 다리가 까칠한 산새, 흰 물살 여울진 시냇물−이러한 이미지들은 그대로 평면 위에 펼쳐진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따르고 감싸면서 특이한 공간적 질서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공간적 질서는 그대로 자연의 질서로 통한다. 빗방울은 다시 시냇물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구름이 되고 바람이 일고 또 산새를 몰아대면서 빗방울로 떨어질 것이다. 이 대자연의 조화로운 순환의 질서가 이 시의 시적 공간에 담기는 것이다.


4.

시는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으로부터 빚어진다.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시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시는 마음을 말한 것(詩言志)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거기서 비롯된다. 공자의 말씀에 “시 삼백 편에 생각의 간특함이 없다.”고 했거니와, 그것은 시정신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말임과 동시에 인간의 마음의 심원을 시와 함께 드러내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옛적부터 시를 사랑하여 왔다. 시를 짓고 그것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생활 속에서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아 왔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촌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시를 통해 삶의 도리를 배우고 자신들의 꿈을 드러내었다. 옛날 과거제도와 같은 관리의 등용 시험에도 시를 짓는 문제가 항상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었던 것은 물론이고, 문벌이 있는 가문에서는 조상이 남긴 시문을 모아 문집을 만드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이다. 시와 더불어 삶을 살아가면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삶을 끌어 올리고자 했던 옛 선인들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삶은 각박하고 현실은 매우 거칠다. 거기다가 우리의 정서는 메말라 버렸다. 하루하루의 생활을 꾸려가기에도 바쁜 사람들이 시를 운위한다는 것 자체가 한가로운 일처럼 보일 정도가 되었다. 시는 오로지 시인들만의 몫이고, 일상의 인간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시를 음미하고 그 깊은 정서의 세계에 빠져들어갈 수 있는 낭만이 생활의 어느 구석에도 자리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사람들은 흔히 시의 위기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의 위기를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정서적 파탄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그것을 찾는 사람의 곁에만 자리한다. 시는 객관적인 현실의 인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적인 세계인식을 요구하는 경우에 그 존재 의미가 살아난다. 사람이 자기 내부에서 인간의 영혼을 관찰하고자 할 때에만 시의 의미가 중요시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시를 찾아 읽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며 그렇게 만만히 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시가 답답하고 재미없는 읽을거리가 될 가능성이 많다. 거대한 서사문학의 물결을 즐기는 사람은 시란 것이 정말 시시한 말장난으로 보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시라는 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담을 쌓는 사람도 많지만, 시는 자꾸 읽어야만 가까워진다. 시를 읽는 일은 언제나 어디서나 자유로워야 한다. 어느 시대이건 문화의 창조력은 시에서 비롯된다. 시가 한 시대의 정신의 꽃이라고 하지 않는가?

 

권영민 
kwonsnu@snu.ac.kr / 문학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서울대 국문과 교수 역임. 주요 저서로 《한국 현대문학사》 《서사 양식과 담론의 근대성》 《이상 텍스트 연구》 《이상 문학의 비밀 13》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만해대상 학술상, 서울문화예술상 등 수상. 현재 단국대 석좌교수.

 

 

<유심 홈에서 가져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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