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날개
이병률
먼 산에 올라 나무를 두리번거렸다
나무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걷고 걸어 나무 하나를 찾았다
나무를 찾고 산의 마음에 표시를 하였다
반을 얻은 것 같았다
다시 나무 하나를 찾았다
하지만 아직은 서쪽으로 더 클 일이 있는 나무여서
나무에 돌을 매달고 다시 멀리 먼 산의 마음에 표시를 하였다
그리하여 일 년쯤을 기다려 두 나무의 큰 가지 하나씩을 베었다
사개를 맞대고 질빵을 걸으니
반은 절반을 마주 보며 어깨가 되었다
어깨 위에 또하나의 어깨를 메고
그 위에 세상을 얹고 걸어나갔다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세계를 지나갔다
한번 얻은 지게는 버릴 것이 못 되었다
어깨를 자른대도 지게는 나를 따라왔다
내 살을 지고 내 터를 지고 풍경마저 한몸처럼 옮겼다
누구나 죄진 사람같이 지게로 태어나
죄처럼 업혔던 시절이 있었다
업힌 것이 날개인 줄 알고
퍼드득퍼드득 살려고도 하였다
ㅡ계간『문학동네』(2007.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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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굴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할 같다
그러지 않으면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 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가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ㅡ시집『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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