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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 코스모스 / 수유리 시편 / 독락당(獨樂堂) / 산정묘지(山頂墓地) 1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12. 4.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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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코스모스


조정권

 

 

십삼촉보다 어두운 가슴을 안고 사는 이 꽃을
고사모사(高士慕師) 꽃이라 부르기를 청하옵니다
뜻이 높은 선비는
제 스승을 홀로 사모한다는 뜻이오나
함부로 절을 하고 엎드리는
다른 무리와 달리, 이 꽃은
제 뜻을 높이되
익으면 익을수록
머리를 수그리는 꽃이옵니다
눈 감고 사는 이 꽃은
여기저기 모여 피기를 꺼려
저 혼자 한구석을 찾아
구석을 비로소 구석다운 분위기로 이루게 하는
고사모사 꽃이옵니다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조광출판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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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유리 시편


  조정권

 

  어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화계사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다가 보았다
  자색(紫色) 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태고목(太古木)들이 숙연한 전신침묵(全身沈默)을.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끓고 있는 큰 바위들의 단좌(端坐).
  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오던 고목들의 출렁거리는 뿌리 둥지께에서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이 겨울 내내 산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어는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허심송(虛心頌)』. 영언문화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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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獨樂堂)


조정권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

 

 


(『산정묘지(山頂墓地)』. 민음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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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괸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입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 제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비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봄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에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려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희망했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한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산정묘지(山頂墓地)』. 민음사. 199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