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좋은 시 123 사랑의 지옥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시집『세상의 모든 저녁』.민음사. 1999) |
사랑의 지옥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새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세상의 모든 저녁』.민음사.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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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꽃 속에 벌을 가둬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로 가둔 벌은 만만한 꿀벌이었습니다. 꿀벌은 잡다가 쏘여도 독이 강하지 않고 따꼼하고 말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끔 호박꽃 속에 들어간 호박벌을 가둘 때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호박벌은 성질이 순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덩치가 크고 깊은 털이 숭숭 나있는 호박벌은 가까이 하기에 겁이 나는 당신이었습니다. 호박꽃은 꽃잎이 크고 꿀샘과 꽃가루는 깊이 있습니다. 호박벌은 꿀을 가져가려면 꽃 속 깊숙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꿀을 갖기 위해 꽃 굴 속으로 들어가는 호박벌, 그때 얼른 꽃잎을 닫아버립니다. 애처로운 호박벌은 처음에는 갇힌 줄도 모르고 열심히 꿀을 따다가 갇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때 호박꽃 속을 빠져나오려는 호박벌의 날갯짓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습니다.
호박벌을 가두는 행위,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혹자는 자유와 구속이 다르지 않다하나 가두는 것도 사랑이었고 풀어주는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갇히는 것 또한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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