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좋은 시 219 성당 부근 정세기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성당 가까이에 살던 그해 겨울 지붕들이 낮게 엎드려 소리 없이 젖어 잠들고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 읽다 만 성경 구절을 성에 낀 창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눈사람이 지키는 골목길을 질러 상한 바람이 잉잉 울고 간 슬픔을 연줄 걸린 전깃줄이 함께 울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종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울려퍼지면 저녁 미사를 보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긴 그림자도 젖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장작더미 위로 쌓이던 달빛이 스러지고 사랑하라 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도 꺼진 밤 그레고리안 성가의 낮은 음계를 밟고 양떼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성당 뜨락엔 마리아상 홀로 남아 산수유 열매 같은 알전구 불빛을 따 담고 있었다
―시집 『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실천문학사, 2002) |
성당 부근
정세기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계수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성당 가까이에 살던 그해 겨울
지붕들이 낮게 엎드려
소리 없이 젖어 잠들고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
읽다 만 성경 구절을
성에 낀 창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눈사람이 지키는 골목길을 질러
상한 바람이 잉잉 울고 간 슬픔을
연줄 걸린 전깃줄이 함께 울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
종소리가 은은한 향기로 울려퍼지면
저녁 미사를 보러 가는 사람들
그들의 긴 그림자도 젖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장작더미 위로
쌓이던 달빛이 스러지고 사랑하라
사랑하라며 창가에 흔들리던 촛불도 꺼진 밤
그레고리안 성가의 낮은 음계를 밟고
양떼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성당 뜨락엔 마리아상 홀로 남아
산수유 열매 같은 알전구 불빛을 따 담고 있었다
―시집 『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실천문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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