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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시집『절대 고독』(선문각,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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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간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어.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청담』. 일조각. 1964 : 『박목월 시선집』. 믿음사. 200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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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천수호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
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
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
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시집『우울은 허밍』(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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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바치며
김인육
땅에게 아버지를 바친다
주르륵,
한 줌 흙으로 당신을 허락한다
덥석, 덥석, 깨무는 대지의 저 붉은 아가리!
평생 땅만 파먹고 살았던 농군
고맙고 미안한 신세
이제, 당신께서 보시할 차례
나무그릇에 담긴 최후의 사내가
희망도 절망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북어포의 사내가
나의 원본(原本)인 사내가
땅의 육보 식탁에 차려진다
일렁거리는 산천
뒤돌아보니
어느새 땅의 배가 불룩하다
ㅡ계간『문학과의식』(2009.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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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강신용
아버지는 없다
고향 마을에도
타향 거리에도
아버지
하늘 높이 불러보지만
텅
빈
세월뿐이다
ㅡ시집『나무들은 서서 기도를 한다』(문경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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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우리 아버지
이대흠
엊그제까지는 몸도 못 뒤집더니
오늘은 뒤뚱뒤뚱 어쩜 이리 잘 걸으실까
통통통 바닥을 퉁기며 다섯 발짝이나 걸었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걸음마 잘 하시네
오른발 왼발 오늘은 걸음마를 떼었으니
내일은 방 한 바퀴 돌아봐야지
아이고 이뻐라
헤벌쭉 헤벌쭉 웃는 우리 아버지
말 배우려는지 못 알아들을 소리로
무어라 혼자 종알거리고
또 꼼지락거리고
화냈다가 흐느끼다가 혼자서 마구 웃는
어여쁜 우리 아버지
그래 그래야지
이제는 아들 얼굴도 알아보고
딸한테도 알은체를 하시네
쥐엄쥐엄 하면 쥐엄쥐엄 잘 따라 하시고
밥 달게 잡수더니 똥도 미끈하게 잘 싸셨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아버지
오줌 똥 못 가려 기저귀 찼어도
과자 주스 먹을 땐
절반쯤은 흘려서 옷이 다 버려도
오물오물 밥 씹는 소리만 들려도 오져라
환하게 웃으면 온 집안이 밝아지는 우리 복덩어리
말도 잘 못하고
혼자서는 잘 걷지도 못하는 어린 우리 아버지
내 살을 갈아서라도 키워야 할
여리고 작은 내 새끼, 우리 아버지
―월간『유심』(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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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함순례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울 아부지 구렛나룻 쓰윽 훑었다는디, 스무날을 넘기자 사랑방 올린다고 밤새 불을 써 놓고 퉁탕퉁탕 엄니 잠을 깨웠드란다 모름지기 사내 자슥 셋은 되야혀 그때 되믄 계집애들이랑 분별하여 방을 줘야 않겄어!
그렇게 맨몸으로 생을 일궜던 울 아부지, 성 안 차는 아들 두 놈 부려놓고
이젠 여기 없네.
―게간『시와 사람』(2002. 봄)
―시집『뜨거운 발』(애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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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저 붉은 얼굴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만 원 없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텐데
철부지 초년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슨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 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 오래 가슴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ㅡ시집『노자의 무덤을 가다』(서정시학,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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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ㅡ문정희 시배달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2016년 03월 14일)
ㅡ시집『소주병』(실천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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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안부
김나영
시들시들한 오줌줄기 같은 연락이 왔다
죙일 집에만 틀니처럼 박혀 계시다는 아버지
하루 한 번 텃밭에 물 뿌리러 갈 때만 외출 하신다는데
요즘 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데
몇 번 독한 약 뿌렸는데 통 약발이 받질 않는단다
지난 번 통화 땐 열무씨 배추씨
실한 놈으로 사서 부치라고 하셨는데
팔십 평생 한 밭에서 수확한 소출들
씨앗 팡팡 멀리 퍼트리는 힘으로
제 뿌리 죽죽 내리고들 살고 있으니
니들은 네 아버지가 일궈놓은 다모작 아니냐,
울궈 먹어도 몇 번이나 울궈 먹은 게냐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인제 그 뿌리 부실해질 때도 되았지
인제 갈 시간 되았지
내 염려에 무게를 보내 얹는 어머니
기저귀 갈 시간이라고 그만 전화를 끊자신다
링거 선을 타고 전해온 뿌리의 안부에
잊고 있었던 요의가 탱탱하게 쳐들어온다
―시집『왼손의 쓸모』 (천년의시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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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팔자
김나영
'야들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테레비나 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팔자가 상팔자다' 던 아버지
그 좋은 팔자 2년도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네
온 식구들 불러 모아 놓고
사돈에 육촌아재까지 불러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놓고
큰 홀 빌려서 사흘 밤낮 잔치를 베푸시네
배포 큰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새 옷도 한 벌씩 척척 사주고
아버지도 백만 원이 넘는 비싼 옷으로 쫘-악 빼 입으시고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리무진까지 타시고
온 식구들 대절버스에 줄줄이 태우고
수원 찍고 이천으로 꽃구경가지 시켜주시네
간도 크셔라 우리 아버지
이천 만원이 넘는 큰 돈을
삼일 만에 펑펑 다 써버리고
우리들 볼 낯이 없었던지
돌아오시지 않네
잔치는 끝났는데…
아마도 우리 아버지 팔자 다시 고쳤나 보네
―계간『계간문예』(201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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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되어
김완하
아버지가 되어
아가야,
너에게 이름을 준다
이 세상 앞에 너를 세운다
오늘따라 짙푸른
저 산맥 위로 너를 들어 올린다
남으로,
북으로 뻗어 가는 싱싱한 산줄기
앞 다투어 달려가는 곳에
길이 있다
네 울음소리 터져 나와
처음 이 세상 풀잎 흔들 때
부끄러운 삶을 묶어
나도 다시 태어난다
아가야,
저 큰 산 네가 넘어야 한다
―시집『어둠만이 빛을 지킨다』(천년의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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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박남철
1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아
아버지 돈 좀 주세요 머라꼬
돈 좀 주 니 집에 와서 슨 돈이 벌쎄 얼맨 줄 아나
8마넌 돈이다 8마넌 돈 돈 좋아요
저도 78년도부텀은 자립하겠음다
자립 니 좋을 대로 이젠 우리도
힘없다 없다 머 팔께 있어야제
자립 78년부텀 흥 니 좋을 대로
근데 아버님 당장 만 원은
필요한데요 아버님 78년도부터
당장 자립하그라
2
뭐요 니기미이 머 어째 애비 보고
니기미라꼬 니기미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야아 이
자알 배왔다 논
팔아 올레서 돈 들에 시긴
공부가 게우 그 모양이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예끼 이 천하에
소새끼 같은
아버지 천하에
소새끼 같은 아버지
고정하십시요 야아 이 놈아
아버지
3
어젯밤에도 또 아버지 꿈을 꾸었다 아버지는
찬물에 밥을 뚜욱뚝 말아 드시면서 시커멓고 야윈
잔기침을 쿨럭쿨럭 하시면서 마디마디 닳고 망가진
아버지도 젊었을 적에는 굉장한 난봉꾼이셨다는데
꿈속에 또 꿈을 꾸었는데 아 젊은 아버지와
양장을 한 어머니가 참 보기에 좋았다 젊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한창 애교를 떨고 있었고
아 참 보기에 좋았다 영화처럼 사이좋게
나는 전에 그런 광경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시집『지상의 인간』(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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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아버지에게서는
황강록
술 취한 아버지에게서는
좌절한 수컷의 냄새가 난다
꿈이 심란해 지는 시절이 오면
아들들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아버진 왕이 되고 싶었거나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을 뒤바꾸는 혁명을 이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무엇을 꿈꾸었든 꿈꾸지 아니하였든
그는 우울한 술 냄새를 풍기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내 아버지이자 어머니의 남편
집 안은 그의 옷자락에 묻어온 어둠으로 더러워진다 아무리
불을 밝혀도 어둠은 그의 공허한 노랫소리와 뒤섞여
구석에 웅크린 채 지워지지 않는다
모든 수컷들은 꿈을 팔아 돈을 벌어오는 걸까
깔릴 듯한 꿈의 무게에 비해 손에 받아든 돈이 너무 가벼워서 술을 마시는 걸까
수천억의 물고기 비슷한 것들이
내가 되어 태어날 꿈을 꾸었고
수천억의 물고기 비슷한 것들이 좌절하였으니
내가 되어 태어날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나
난 여기 있다. 누군가 수천억의 가능성을 뚫고 내가 되어, 아버지가 되어
그것 봐! 할 수 있잖아! 아직 포기하지 마 넌 한 적이 있어!
귀찮게 귀찮게 꿈속에서만 소리를 지른다. 깨고 나면 기억은 흔적도 없고
귀찮게 귀찮게 술 먹었을 때만 중얼거린다. 한 소리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깨고 나면 기억은 흔적도 없고... 자기가 왜 그랬는지도 모르고... 하긴
정자가 왜 내가 되고 싶어 했는지 기억할 리가 있겠나...
술 취한 아버지에게선 언제나
좌절한 수컷의 냄새가 나곤했다. 아들들은 그 냄새를 싫어했으나, 그로 인해
아버지를 사랑하거나 미워하였고, 어느 날
실컷 떠들고 웃고, 마침내 울고 난 술자리의 끝에서
아득하게 멀어지는 의식 속에
그 냄새를 맡는다. 여자들이 흐릿한 시야 밖에서
웃으며 떠나가는 동안…
나 역시 왕이 되고 싶었거나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ㅡ『현대시』(20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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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헛기침
손세실리아
병간호에서 임종까지
자식된 도리에 남달랐던 둘째 시숙
묵묵히 유품 정리하던 도중
실밥 뜯어진 목욕가방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말문을 텄다
사느라 전화조차 뜸한 장손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씀 삼가셨고 매달 생활비 송금하는 막내는 가는 데마다 자랑이면서 시도 때도 없이 호출해 오라가라하는 내겐 고맙단 빈말 한 번 없으셨다 부모자식 간이니 아무렴 어때 넘기다가도 솔직히 때론 야속하기도 했지 그런데 방금 깨달았어 생각이 짧아 미처 몰랐음을 이미 넘치게 표현하셨음을……, 명절날 목욕탕에 모시고 가면 성미도 급하게 온탕에서 빠져나와 마른수수깡 같은 등 디밀고선 품앗이로 등밀이하는 동네노인들 향해 여보란 듯 연신 헛기침까지 해대면서 한껏 거드름 피우곤 하셨는데 그 기침이야말로 둘째가 최고라 치켜세워주신 거였다는 걸
이태리타월 손에 끼고
허공 내저으며 흐느끼는
삼 형제 중 아버지를 쏙 빼닮은
―월간『유심』(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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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김종해
사춘기가 끝나가자 아들은 가출을 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이었던 아들, 집과 학교가 없는 낙원을 찾아 아들은 문득 가출을 했다. 체제와 사회에 각을 세우고 갓자란 뿔을 들이댔던 어린 양 한 마리. 뿔은 가렵다. 목가적인 집안의 목책은 뚫렸고, 담임 선생님은 학내 감염을 우려해서 교실 곳곳마다 구제역 백신을 뿌렸다. 몇날 며칠 동안 텅 빈 구윳간을 보며 아버지는 잠을 설쳤고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했다.
가출한 아들을 찾아서 아버지는 노숙자의 역驛과 어린 짐승이 뛰어놀만한 야생의 산과 초원을 뒤졌다. 아들의 절친 인맥을 하나하나 찿아 헤매던 아버지, 드디어 단서를 찾았다. 아들에겐 음악이 있었다. 아들은 초식草食이나 육식肉食보다 향긋한 음악에 더 정신을 쏟고 있었던 것을.
기적소리조차 검은 서울역 근처 남영동의 한 음악다방 DJ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 아들은 음악다방 문을 밀치고 나와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그 뒤를 아버지가 쫓아갔다. 기적소리조차 검은 서울역 뒤 골목에서 골목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바람보다 빠르게 달렸다. 목책 바깥을 나와 길을 잃고 달려가는 어린 양 뒤로 아버지 양이 달려간다.
석탄재 날리는 막힌 골목에서 마지막 질주는 끝나고,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짚고 헉헉헉헉. 아들은 머리를 숙이고 헉헉헉헉. 아버지와 아들사이엔 세상의 어떤 인간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헉헉.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오랫동안 헉헉헉헉.
ㅡ『애지』(2012. 여름)
ㅡ시집『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문학세계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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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너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데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빛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밥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떴덨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시집『신경림 시전집』(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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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보고 싶다
이상국
자다 깨면
어떤 날은 방구석에서
소 같은 어둠이 내려다보기도 하는데
나는 잠든 아이들 얼굴에 볼을 비벼보다가
공연히 슬퍼지기도 한다
그런 날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들에서 돌아오는 당신의
모자나 옷을 받아들면
거기서 나던 땀내음 같은 것
그게 아버지의 생의 냄새였다면
지금 내게선 무슨 냄새가 나는지
나는 농토가 없다
고작 생각을 내다 팔거나
소작의 품을 팔고 돌아오는 저녁으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나는 아버지의 농사를 생각한다
그는 곡식이든 짐승이든
늘 뭔가 심고 거두며 살았는데
나는 나무 한 그루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시집『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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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재무
어릴 때 아버지가 삽과 괭이로 땅 파거나
낫으로 풀 깎거나 도끼로 장작 패거나
싸구려 담배 물고 먼 산 바라보거나 술에
져서 길바닥에 넘어지거나 저녁 밥상 걷어차거나
할 때에, 식구가 모르는 아버지만의 내밀한
큰 슬픔 있어 그랬으리라 아버지의 큰 뜻
세상에 맞지 않아 그랬으리라 그렇게 바꿔
생각하고는 하였다 그러하지 않고서야
아버지의 무능과 불운 어찌 내 설움으로
연민하고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날의
아버지를 살고 있는 오늘에야 나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애초 큰 뜻 없었다는 것을
그저 자연으로 태어나 자연으로 살다갔을
뿐이라는 것을 채마밭에서 풀 뽑고 있는
아버지는 그냥 풀 뽑고 담배 피우는 아버지는
그냥 담배 피우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늦은 밤 멍한 눈길로 티브이 화면이나 쫓는
오늘의 나를 아들은 어떻게 볼까
그도 나를, 나 이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 자본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란 아버지는
자본 속을 살다 자본에 지쳐 돌아와
멍한 눈길로 그냥 티브이를 보고 있는 거란다
나를 보는 네 눈길이 무섭다
아버지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에까지
연장으로 땅을 파거나 서류를 뒤적이거나
라디오 연속극 듣고 있거나 인터넷하고 있거나
배달되는 신문기사 읽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에게서 아버지 너머를 읽지 말아 다오
아버지는 결코 위대하지 않다
이후로도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다
―제51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목화밭지나서 소년은 가고』(현대문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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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
황영선
아버지는 도덕 교과서,
아버지의 교과서엔 글자가 없다
내가 읽은 많은 책들이 길이라고 우길 때에도
아버지는 내 도덕 교과서에 밑줄을 긋지 않으셨다
행간과 행간 사이에 빠져 허우적일 때에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덕 교과서를 펼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나의 학교,
길눈이 어두워질 때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주신 도덕 교과서를 꺼내어 읽는다
세월이 가면 나의 아들딸도
내가 만들 교과서를 꺼내어 읽겠지
글자 없이 읽던 아버지의 도덕 교과서를
오늘은 소리내어 읽고 있다
―시집『우화의 시간』(2010, 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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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시집『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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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산과 토끼에 관한 아버지의 이야기
심보선
소싯적 아버지는 붉은 산속에서 토끼를 키웠다
열 마리를 백 마리로 백 마리를 천 마리로 늘리겠어!
아버지는 산 아래를 향해 주먹을 흔들며 외쳐댔다
아버지는 헤밍웨이와 스타인벡을 읽으며 토끼를 키웠다
달무리 진 밤 희뜩한 별빛들로 어설픈 천점(天占)을 보고
손수 담근 산머루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마른 나뭇가지를 들어 허공에 불립문자를 휘갈기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쓸쓸한 얼굴로 말하곤 했다
토끼가 늘어날수록 고독과 광기도 늘어나더군
그러나 하루하루 아버지의 함성은 녹슬고 주먹은 금이 갔다
깨우침은 정처 없어지고 용기는 구부정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산림단속원들이 토끼농장에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산 아래 마을로 내달렸다
거기 어느 피륙 가게 경리였던 어여쁜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는 산에 두고 온 아름답고 사랑스런 토끼들을 떠올리며 울었다
어머니의 긴 손가락이 아버지의 봉두난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다른 한 손의 긴 손가락으로는 굴리던 주판알을 마저 튕겼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그때를 떠올리며 말하곤 했다
너희 어머니는 동정심과 현실감각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처자였지
세월은 흐르고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토끼 같
은 삼 남매가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독과 광기는 점차 잦아들었다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고자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아버지는 헤밍웨이와 스타인벡을 읽으며 우리 삼남매를 키웠다
아버지는 때로 쓰고 때로는 말했다
때로는 환멸에 대해서 때로는 치욕에 대해서 쓰고 말했다
마치 행복을 불러오는 유일한 방법이라도 되듯이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회한에 젖어 말하곤 했다
나는 전도양양한 토끼 농장주였어
공무원 시험도 단 한 번에 합격할 만큼 머리가 좋았다구
하지만 그 여우 같은 산림단속원들이 토끼를 무자비하게 살육했지
이제 나도 그놈들처럼 공무원이 된 거야
그놈의 돈 때문에 원수들과 한 무리가 된 거지!
언젠가는 붉은 산으로 돌아가고 말 거야
거기에는 어쩌면 살아남은 토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붉은 산속에서 토끼를 키웠었다
아버지는 붉은 산 아래에서 우리 삼 남매를 키웠다
아버지의 마음속엔 많은 방랑들이 녹슨 왕관처럼 굴러다녔다
아버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고 아무도 증오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태양이 영원히 뜨거운 상태로 죽어가듯이 죽어갔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어느 여름날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붉은 산이 어디인지 모른다
아버지의 붉은 산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거기가 어디든 거기가 실제로 존재하든 아니든
아버지는 결국 붉은 산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토끼들이 살고 있을 붉은 산으로
고독과 광기가 아직도 뜨겁게 불타고 있을 그 붉은 산으로
―시집『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 지성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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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추는 90분간의 불놀이
김찬옥
흰 국화꽃으론 부족했나요?
새 희망을 품을 시간도 주지 않고
하얀 눈꽃이 만발한 캐딜락을 타고 싶다고요
새벽 5시,
벽제로 가는 길이 너무 어둡고 춥지요?
창밖을 보세요
세상이 겹겹이 다 얼어붙고 말았어요
자동차도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요
눈 속에 파묻힌 썩은 나무둥치라도 끌어다 불을 당겨볼까요?
차라리 화덕에 아버지를 밀어 넣고 불꽃을 지피는 게 좋겠다구요
정말, 당신 우리 아버지 맞나요?
엄밀히 말하면 남-- 남편의 아버지이죠
그래도 이건 아니죠,
의무도 빛을 발하면 눈물이 되는 법,
지금 불법보다 더한 불효 법을
자식들한테 선동하는 거 맞죠?
이 엄동설한에
그것도 새해 첫 새벽에
아버지를 태워 자식들 언 몸을 녹이라니요
그 훈기로 눈물을 말리라니요
아버지가 추는 90분간의 불놀이
팔십 생애의 우여곡절이 훠이훠이 잘도 넘어 가네요
근데 이 불꽃이 다 지고나면 그땐 무엇으로 눈물을 말리지요
―웹진『시인광장』(2016년.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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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빙의 아버지
― 이수익 (1942∼ )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 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을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일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동아일보, 2016년 01월 1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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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소된 주민등록 ‘아버지’
―이광석(1935∼)
등 굽은 세상 더 탓하지 말게
살다 보면 굽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랴
아버지의 등 굽은 허리 너도 벌써 보았겠지
쇠주 한 잔 품고 돌아온 어느 겨울 저녁
축 처진 어깨 너머 꽁초처럼 찍어 밟던
단 한 줄의 일기…….
“외롭다 힘들다”
6.25 군번도 못 찾은 전사통지서 60년 껴안고 울음 운
내 아버지의 갓데미산*은 이미 전설이다
이제 더는 외롭고 힘든 세상 나무라지 말게
팔십 고개에도 편한 잠 어디 있으랴
불안 하나 못 잠그는 열쇠꾸러미, 나무껍질처럼
까칠한 지갑, 무슨 약인지도 모를 수북한 약봉지, 한낮에도
기웃거리는 치매 증후군, 잃어버린 첫사랑 같은
녹슨 기억들, 혹은 우울증
손주들 재롱도 너무 커버려 휴대전화 문자도 안 잡히는구나
가자 세상의 아버지들이여
마누라 잔소리 눈치 조금씩 여위어 가는
얼마 안 남은 착한 자유를 위해
아무도 호명해 주지 않는 말소된 주민등록 같은
이 시대의 미아 ‘우리 아버지’
당신의 마지막 아름다운 상처
오늘밤 동네 포장마차 빈 잔 가득 안아드리고 싶다
*갓데미산 - 경남 함안 여항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9』 (동아일보. 2014년 11월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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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나태주
방구석에 세워 놓은
장롱짝같이 우뚝한
있을 땐 모르다가도
사라지면 문득 그리워지는
때로는 무덤으로 찾아가
무릎 꿇고 물으면
마음속 들리지 않는 말로
대답해 주는 음성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시집『자전거를 타고 가다가』(푸른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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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아버지
김경애
느그 아부지는 학교 댕길 때
공부는 잘했다는디
할 줄 아는 것이 암껏도 없시야
마늘, 양파 밭에 농약 치면서
줄도 제대로 못 잡는다고 화가 난 엄마
딸딸거리는 경운기 몰고 가면서
경운기 시동도 못 거는 양반이라고 흉을 본다
마늘 뽑다가 <동물의 왕국> 본다며
찔레꽃 한 아름 꺾어들고
집으로 들어가시는 아버지
내 원수, 사자, 속창시 없는 인간이라고
엄마는 오후 햇살에 대고 말을 한다
한동안 찔레꽃 향기 가득한 방안
무담시 순해지는 성명자 씨
―계간『푸른 사상』(2014. 여름)
아버지를 쓰다
문정영
아버지는 집 앞 강물로 쓰면 싱겁고
한낮의 햇빛으로 지우면 파랬다.
이른 저녁이면 뜨거워진 공기가 은어들처럼 파닥거렸다.
아버지는 조용히 흔들리는 물결을 2층 옥상에서 바라 보셨다
가문 날에 아버지를 부르면 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어린 나는 아버지와 익숙해지지 못했다.
아버지를 배워 아버지가 되었으나
그 사이 강가의 돌멩이들은 혼자 머무는 법을 익히기도 했다
아버지는 얼굴이 검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아버지와 몸이 닿아도 아픈 곳이 먼저 닿았다.
초봄에 붉은 저녁이 걸려 있던 오동나무를 잘라냈다.
잘린 밑동에서 자라는 새잎처럼 나는 키가 커갔다.
누군가를 가려줄 수 있도록 넓어지라고 하셨으나
마음은 금이 간 사기그릇처럼 소심했다.
아버지는 거름을 준 텃밭의 단감나무였다.
무언가를 더 줄 수 있다는 듯 주렁주렁 해를 매달았다.
아버지를 쓰고 싶었으나 읽는 법을 알지 못했다.
―계간『포엠포엠』(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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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소
이상윤
땡볕 속에서 쟁기를 끄는 소의 불알이
물풍선처럼 늘어져 있다
아버지는 쟁기질을 하면서도 마음이 아프신지
자꾸만 쟁기를 당겨 그 무게를 어깨로
떠받치곤 하셨다
금세 주저앉을 듯 흐느적거리면서도 아버지의
말씀 없이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
소
감나무 잎이 새파란 밭둑에 앉아서 나는
소가 참 착하다고 생각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버지는 동네
앞을 흐르는 거랑 물에 소를 세우고
먼저 소의 몸을 찬찬히 씻겨주신 뒤
당신의 몸도 씻으셨다
나는 내가 아버지가 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나 파킨슨씨병으로
근육이란 근육이
다 자동차 타이어처럼 단단해져서 거동도
못하시는 아버지의 몸을 씻겨 드리면서야 겨우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힘들고 고단한 세월을 걸어오시는 동안
아버지의 소처럼 나의 소가 되신
아버지
아버지가 끄는 쟁기는 늘 무거웠지만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위해서 백합처럼 흰
내 어깨를 내어 드린 적이 없다
입술까지 굳어버린 아버지가 겨우 눈시울을 열고
나를 바라보신다
별이 빛나는
그 사막의 밤처럼 깊고 아득한 길로
아직도 무죄한 소 한 마리 걸어가고 있다
-시집『하느님도 똑같다』(화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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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ㅡ시집『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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