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짐에 대하여
문숙
친구에게 세상 살맛이 없다고 하자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보란다
생각해보니 옳은 말이다
노처녀였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짝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된 것도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체 게바라도 김지하도
삐딱하게 세상을 보다 혁명을 하였고
어릴 때부터 엉뚱했던 빌게이츠는
컴퓨터 신화를 이뤘다
꽃을 삐딱하게 바라본 보들레르는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고
노인들도 중심을 구부려
지갑을 열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돈도 연애도 안 되는 날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그 도수만큼
슬쩍 기울어져 볼 일이다
―시집『기울어짐에 대하여』(2012, 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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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다
안명옥
한때는 바람에 기대어 살며 흔들리던
우리 집 베란다 화초가
오래 버려둔 시간
망각에 기대어 살며시 꽃을 피운다
나는 어렸을 때 서해에 기대어 살고
열아홉에 독립했을 때는 나이에 기대어 살았다
봄담에 기대어 살며 노란 꽃을 피우던 개나리처럼
스물넷에 준비 안 된 결혼을 했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신발을 따라 교회에 가거나
절에 간다 옛사랑은 입산을 하고
술에 기대어 살던 선배가 하는 말,
아내는 흰머리 나면 검은머리 뽑아주고
애인은 흰머리 나면 얼른 흰머리 뽑아준다는데
나는 사람에게 기대지 않으면서
평화가 오고
평화는 차츰 불편에 기대어 사는 법을 터득한다
불편은 생각에 제 몸을 기댄다
핸드폰은 늘 무음을 좋아하여 약속을 만들지 않고
소리는 변두리에 사는 동안
자연 속에서 비로소 자유에 몸을 기댄다
귀뚜라미가 달에 기대어 밤을 견딜 때
취업 안 된 제자, 악기에 기대어 산다는 안부가 온다
―계간『열린시학』(2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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