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 신달자(1943∼ )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일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동아일보, 2016년 06월 17 금요일)
―시집『아버지의 빛』(문학세계사.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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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도종환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 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을음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나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은 심지만 못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 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욕심 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 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시집『부드러운 직선』(창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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