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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 신달자/도종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6. 25.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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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신달자(1943)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 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일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동아일보, 20160617 금요일)

시집아버지의 빛(문학세계사.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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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도종환  

 

 

심지를 조금 내려야겠다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이 있는데

심지만 뽑아 올려 등잔불 더 밝히려 하다

그을음만 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잠깐 더 태우며 빛을 낸들 무엇하랴

욕심으로 나는 연기에 눈 제대로 뜰 수 없는데  

 

결국은 심지만 못쓰게 되고 마는데

들기름 콩기름 더 많이 넣지 않아서

방안 하나 겨우 비추고 있는 게 아니다

내 등잔이 이 정도 담으면 넉넉하기 때문이다

넘치면 나를 태우고

소나무 등잔 대 쓰러뜨리고

창호지와 문설주 불사르기 때문이다  

 

욕심 부리지 않으면

은은히 밝은 내 마음의 등잔이여

분에 넘치지 않으면 법구경 한 권

거뜬히 읽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빛이여  

 

 

 

시집부드러운 직선(창비,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