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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천 시 - 원구식/홍일표/박형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7. 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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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천


원구식

  

 

이 개울의 주인은 아마도 흰뺨검둥오리일 것이다.

나는 사람이 아둔해서

최근에야 겨우 이 사실을 알아차렸는데,

녀석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물과 물고기들을 먹고

새끼들을 낳으며

멋대로 날고 헤엄을 치고

아주 느긋하게 목욕을 해왔던 것이다.

자신이 이곳의 주인인 줄 아는

인간들의 뻔뻔함을 오히려 비웃으면서

주인처럼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최근에

비가 내리는 천변을 걷다가

바로 이곳에

천국으로 가는 길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고는

매우 놀라 머리를 탁 친 적이 있다.

“아이고, 이 바보야!”

희디흰 망초꽃들이 오래전부터 턱을 들어

그 방향을 수도 없이 일러 주었는데

이제야 겨우 깨닫다니!

눈을 들어 그곳을 바라보니,

그곳엔 과연 하늘 아래 가장 단단한 화강암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는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때쯤 되어서야 나는

천만 시민들이 아귀처럼 살아가는 서울이라는 이 도시에

하늘이 내려준 기막힌 선물이

두 개씩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물의 어머니인 한강이요,

다른 하나는 바람의 아버지인 북한산이었던 것이다.

불광천은 이 둘을 이어주는

자식들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막내,

정말 보잘 것 없는 실개천이지만

비와 천둥이 휘몰아칠 때면

엄청난 물을 순식간에 정액처럼 쏟아낸다.

바로 그 순간이다!

멀리 태백에서 발원한 한강이

성산대교 아래인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참았던 몸을 풀고

궁극의 오르가즘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행주대교 아래 서해로 빠져나가는 한강물이

온통 우윳빛으로 허옇게 물들고,

흰뺨검둥오리들이 갑자기 우당탕탕하며

물을 박차고 올라

미친 듯이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다.

  


 

ㅡ계간『서정시학』(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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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천

 

홍일표

    

 

조등처럼 서 있는 백로가 어둠의 한 방향만 바라본다

불 꺼진 시간의 흉벽에 구멍이 뚫리고 그 너머 오래전 지나온 자궁

다만 그렇게 컴컴한 적막이다

 

목이 긴 여자가 제 몸을 조용히 몸속에 구겨 넣는다 새가 새를 지우고 한 그루 나무로 진화하는 비애 지금 어디쯤일까 당신은

 

얼굴을 가린 물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흘러가는

밤의 심중

검은 울음이 천변의 억새 덤불로 밝아져 꽁지 흰 새로 날아오르거나

떠나지 못 하고 물속에 뿌리 내린 시린 마음이거나

 

소주병과 뒹구는 한 남자의 밤이 있다 죽음 가까이서

억새의 뼈를 쪼개고 나온 빛으로 밤을 통과하는 물

벤치에 앉아 백로를 바라보던 남자가 백로 안에 들어가 잠든다 가끔 퍼덕거리며 날기라도 하는지

헛손질 헛발질을 하면서

 

사라진 한쪽 얼굴을 지우지 못하고 매일 태어나는 달

 

구름을 억새로 번역한 불광천은 날아가지 않는다

    

 

 

―계간문학과 창작(2015년 겨울호)




  불광천

 

  박형준

    

 

  천변을 거닐다가 밤잉어들을 보았다 낮에는 보지 못했던 잉어들을 밤에 보았다

 

  천변의 벚꽃길에서 멍하게 봄은 광선에 겨울의 질병 부위를 쬐고 있다가 떨어져내리는 벚꽃들로 강물의 비늘이 되었다 밤잉어들은 비늘과 지느러미, 두 단어로 왔다

 

  잉어들은 처음엔 소리로 다가왔다 사진기 셔터를 찰칵찰칵 누르듯이 지느러미를 털며 회귀하는 소리가 귀로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여기까지 오려면 한강과 경계에 있는 시멘트 보를 뛰어넘어야만 한다는데 밤에 상류로 올라가는 건 수초에 알을 낳기 위해서라는데

 

  보와 난간을 뛰어넘으려고 지느러미가 파닥거릴 때마다 물고기 배에 피멍이 드는 환영이 내 눈에 찍히고 있었다 밤물결 속에서 수천의 비늘이 튀어올랐다 여기서 불광사(佛光寺)는 멀지 않다는데 잉어들은 새벽에 빛으로 가득한 상류에 알을 낳는 건지, 나는 그들의 밤 유영에서 영원을 보았다

 

  잉어들이 상류로 올라가고 나는 반대로 한강을 향해 내려가는데, 기슭에선 물결에 얼비치는 벚꽃 비린내를 부리로 건져내며 오리가 한 마리 울고 있었다

  

 

 

―계간창작과비평(2001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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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


박소란

 


밤의 불광천을 거닐다 본다 허허로운 눈길 위
미자야 사랑한다 죽도록, 누군가 휘갈겨 쓴 선득한 고백
비틀대는 발자국은 사랑 쪽으로 유난히 난분분하고 열병처럼
정처없이 한데를 서성이던 저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미자,
적멸을 드리운 세상의 모든 상처 곁에 격력히 나부끼던 이름
미자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떠나갔을까
부패한 추억의 냄새가 개천을 따라 스멀거리며 일어선다
겨우내 그칠 줄 모르고 허우적대던 절름발이 가랑눈과
그 불구의 몸을 깊숙이 끌어안아 애무하던 스무살의 뒷골목
여린 담벼락에다 퉤―보란 듯이 흘레붙고 싶었던
지천한 허방 속 야생의 짐승처럼 똬리를 틀고 아귀 같은 새끼들을 싸지르고 싶었던
내 불온했던 첫사랑, 미자는
아직 그 어둔 길 끝에 살고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어쩌면 미자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돌이켜보면
사랑이란 이름의 무수한 날들은 하나같이 사랑 밖에 객사했듯이
눈의 계절이 저물면 저 아픈 고백 또한 다만 질척이는 농담이 되고 말 일
미자는 지금 여기에 없고 사랑하는
미자는 나를 모르고 기어이 내 것이 아니고



 

-계간『창작과비평』(2010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