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무렵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시집『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비,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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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노천명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차워지면
이쁜이보다 찹쌀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창변』매일신보출판부. 1945 : 『사슴』―노천명 시전집』.솔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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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도둑
이상국
도둑이 뛰어내렸다
추석 전날 밤 앞집을 털려다가 퉁기자
높다란 담벼락에서 우리 차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집집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이웃들은 골목에 모였다.
―글세 서울 작은 집, 강릉 큰애네랑 거실에서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데 거길 어디라고 들어오냔 말야.
앞집 아저씨는 아직 제 정신이 아니다.
―그러게, 그리고 요즘 현금 가지고 있는 집이 어딨어, 다 카드 쓰지. 거 돌대가리 아냐?라고 거드는 피아노집 주인 말끝에 명절내가 난다.
한참 있다가 누군가 이랬다.
―여북 딱했으면 그랬을라고……,
이웃들은 하나 둘 흩어졌다.
밤이슬 내린 차 지붕에 화석처럼 찍혀있는 도둑의 족적을 바라보던 나는 그때 허름한 추리닝 바람에 낭떠러지 같은 세상에서 뛰어내린 한 사내가 열나흘 달빛 아래 골목길을 죽을 둥 살 둥 달려가는 걸 언뜻 본 것 같았다.
ㅡ계간『내일을 여는 작가』(2008년 겨울호)
―시집『뿔을 적시며』(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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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전날 밤
김남극
달은 꽃사과에 내려앉아 그 빛으로 발을 씻겠다
달은 마가목 열매에 대롱대롱 걸려 바람결에 쓰닥이겠다
달은 비닐하우스에 내려앉다 밀커덩 궁둥이가 까지며 미끄러지겠다
달은
달아빠진 떡함지 귀퉁이에 앉았다가 들기름 빛에 흩어지겠다
흩어져 지시랑물 얕은 고랑에서 밤새 이슬과 섞이겠다
늦게 불 꺼진 방안 어둠 속으로 얼굴을 쑥 들이민다
달도 진 어두운 개울을 건너다 자주 물소리에 울음을 버린 어른과
도랑가에서 놀다 앞산을 넘어온 달을 따 도랑물에 헹구어 꼬쟁이에 꿰어들고 들어온 아이들과
말라가는 줄콩잎만하게 몸을 웅크리고 마당가에 오줌을 누며 오줌발에 번뜩이는 달빛을 내려다보는 내가
곤히 잠들었다
이끼 낀 마당도 오늘은 넓고 환하다
―시집『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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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무렵
맹문재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박했다
잘 익은 호박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 인사 같았고
떡집 아주머니의 손길 같았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처럼 편안한 나의 사투리에도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인터넷 검색이 필요 없었다
월말 이자에 쫓기지 않았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흙냄새 나는 사람들의 사투리를 태운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 할머니의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고
우체국에서 나온 사람들이 여유롭게 햇살을 받았다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고
신문 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청청 하남』(2013. 9월호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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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이병초
굵은 철사로 테를 동여맨 떡시루
어매는 무를 둥글납작하게 썰어 시루구멍을 막는다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호박고지 깔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통팥 뿌리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낸내 묻은 감 껍질 구겨 넣고
쌀가룰 한 둘금 그 위에
자식들 추석옷도 못 사준 속 썩는 쑥 냄새 고르고
추석 장만한다고 며칠째 진이 빠진 어매
큰집 정짓문께 얼쩡거린다고 부지깽이 내두르던 어매
목 당그래질 해대는 것이 무지개떡 쇠머리찰떡만은 아닌지
쌀가루 이겨 붙인 시루뽄이 자꾸 떨어지는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어매는
부지깽이 만지작거리며 꾸벅꾸벅 존다
-계간『시와시학』(2007,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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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정양
아들딸들이 아들딸들 데리고 와서
홍동백서 과채탕육 조율이시
뒤죽박죽 차례 모시고 성묘하고
찻길 막힌다면 아들딸 다 몰고
서둘러 떠나버린 추석날 저녁
서둘러 떠났어도 하릴없이
길 막히는 길 막히는 아들딸들이
국도로 지방도로 사잇길로 뿔뿔이
서로 전화 때려가며 길 찾는 동안
고향 길 잃어버린 혼백들에게
한세상 오도가도 못하는 길도 좀 물어보라고
걸핏하면 목이 잠기던 어머니 목소리로
산 너머 구름 감기며 추석달 뜬다
-월간『현대문학』(2007,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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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만월
송진권
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거나 한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디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물 들어오는 것 같은 것이다
흐느끼며 큰절이나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홀아비 살림살이만 같아
방바닥에 소주병만 구르고 퀴퀴하구나
만월이여
그 딸내미같이 세간을
한번 쓰윽 닦아다오
부엌에서 눈물 찍으며 조기를 굽고
저녁상을 볼 그 딸내미같이
―시집『자라는 돌』(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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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이성복
밤하늘 하도 푸르러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쳐대 빨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또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번 들었던가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 지성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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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이재무
쉰다섯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아부지의 나이. 엄니 돌아가신 뒤
두어 해 뒤꼍 그늘처럼 사시다가
인척과 이웃 청 못이기는 척
새어머니 들이시더니
생활도 음식도 간이 안 맞아
채 한 해도 해로 못하고 물리신 뒤
흐릿한 눈에
그렁그렁 앞산 뒷산이나 담고 사시다가
예순을 한 해 앞두고 숟가락 놓으셨다.
그런 무능한 아비가 싫어
담 바깥으로만 싸돌았는데
아, 빈 독에 어둠 같았을 적막
오늘에야 왜 이리 사무치는가.
내 나이 쉰 다섯, 음복이 쓰디쓰다.
크게 병들었는데 환부가 없다
―『시에』(2012. 가을)
ㅡ김석환·이은봉·맹문재·이혜원 엮음『2013 오늘의 좋은시』(2013,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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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추석
천상병
침묵은 번갯불 같다며,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자는 무식이라고
노자께서 말했다.
그런 말씀의 뜻도 모르고
나는 너무 덤볐고
시끄러웠다.
혼자의 추석이
오늘만이 아니건마는,
더 쓸쓸한 사유는
고칠 수 없는 병 때문이다.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 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
다 지내고
음복을 하고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
-시집『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
.·70. 11.『詩人』에 발표.
.『주막()p98』(민). .『천상(p69) (오). .『저승(p44)』(일)에는 5.6연이 한 연으로 재록.
소릉조
―70년 추석에
―천상병(1930∼1993)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일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4』(동아일보, 2015년 09월 18일 금요일)
ㅡ『천상병 전집』(평민사, 2007)
■
·69, 11.『현대시학』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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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이윤학
바깥마루에 털퍼덕 앉아서는 물가에 선 미루나무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미루나무는 수심을 닮아서 하늘을 자신의 키 높이로 끌어내려 황혼의 취기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올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는 어느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오지 않았기에 나는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쯤 억새가 피기 시작했을까요
내 늙은 시절이 떠오릅니다 내 애인은 나와는 육십 살 정도 차이가 났습니다 나는 슬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돌팔이 의사들은 거의가 단명했습니다 나를 업고 사기전골 돌팔이 의사에게 뛰어가던 어머니 나는 노루의 등에라도 탄 듯 뜨겁게 안겨오는 피의 온기에 맘껏 젖어 시들었다 피는 꽃이곤 했습니다 내 몸은 십대 초반이었고 내 마음은 칠십이 조금 넘었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십대 초반이고 내 몸은 칠십이 넘었습니다 나는 누구를 업고 뛴다는 걸 상상조차 못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물가에 선 미루나무는 그만 한 쇠꼬챙이로 내 쓰라린 슬픔의 한나절을 후비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돌팔이 의사들은 단명했고 불에 구워지는 미루나무 쇠꼬챙이 물가에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황혼녘 나는 알싸하게 취해 뒤로 짚은 힘없는 두 팔에 몸을 바치고 저 세상인 듯 물가 미루나무를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간혹 동전을 두 손안에 모으고 흔드는 것처럼 경운기가 지나가고 번쩍거리는 차들이 아스팔트 바닥에 바퀴로 해괴한 비명을 연주할 것입니다 돈사(豚舍) 지붕 앞으로 뻗어 나온 밤나무 가지에선 밤송이들이 입안에 세 알 두 알 한 알씩 알밤을 물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런 말을 만들려고 애썼습니다
―시집 『짙은 백야』(문학과지성사, 201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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