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의 냄새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봐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느냐는 듯이
바람을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월간『현대문학』2010, 5)
―시집『마계』 (민음사, 2010)
바람의 시 편 - 정한모/정호승/마종기/윤의섭/마경덕/손미/황형철/김승희/신달지/정현종/이은규 외...
'시 편지·카톡·밴드 > 카톡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박형준 - 카톡 좋은 시 307 (0) | 2016.08.01 |
---|---|
사라진 손바닥/나희덕 - 카톡 좋은 시 306 (0) | 2016.07.27 |
광고지 돌리는 여자 / 문성해 - 카톡 좋은 시 304 (0) | 2016.07.20 |
제비꽃 꽃잎 속/김명리 - 카톡 좋은 시 303 (0) | 2016.07.16 |
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박정대 - 카톡 좋은 시 302 (0) | 2016.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