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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장정일 - 카톡 좋은 시 310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8. 17.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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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톡 좋은 시 310 - 장정일/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 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을 흘렸지요

 

 

   ―시집『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2002)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1962∼)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 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을 흘렸지요

 

 

 

―시집『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2002)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6』(동아일보. 2013년 12월 18일)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59』(조선일보 연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