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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헤순 시인 편
(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1
김혜순
나는 내가 모든 학생인 그런 학교를 세울 수 있지. 쉰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내가 고무줄 양끝을 잡고, 열 살의 내가 고무줄 뛰기 하는 그런 학교. 이를테면 말이야. 지금의 내가 기저귀 찬 나에게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 말을 가르칠 수도 있고, 여중생인 나에게 생리대를 바르게 착용하는 법도 가르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열 살인 내가 예순 살인 나에게 인생이란 하고 근엄하게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몰라. 또, 이를테면 말이야, 나는 또 내가 모두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도 지을 수 있지. 실연당하고 미친 듯이 농약을 구해온 열아홉 살 나와 네가 싫어 그랬다고 우리집 담을 도끼로 부수던 남자를 바라보는 스무 살의 내가 함께 나오는 그런 소설도 지을 수 있을 거야. 이런 소설은 어때? 열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나에게 겸상으로 우리 엄마가 밥상 차려주는 그런 소설. 결혼 전의 내가 공원에 앉은 지금 나의 뺨을 때리고, 일흔 살의 내가 뺨 맞은 나를 위로해주는 그런 소설 말이야.
불 다 꺼진 한밤중의 공원 벤치
나는 지금 가방을 열었어
일 년 삼백육십오 일 하고도 곱하기 삼
밥상 당번하는 거 지겨워 사춘기 소녀 식모처럼
징징거리면서 오늘밤 나는 가출했거든
그런데 무심코 가방을 열자
수많은 나와 가출해 추위에 떠는 내가 동시에 만나 버린 거야
저기 봐, 저기 가방에서 나온 내 머리통 하나
그네 위로 높이 떠올랐잖아?
가슴엔 수놓인 손수건을 달았어
부처 얼굴이 무서워 포교당 유치원을 탈출했어
아니, 잘못 봤어 그보다 몇 년 뒤야
물 없는 우물에 빠져 소리지르고 울 때야
저기 봐, 또 저기
가로등 위로 풀빵을 사든 내가 지나가잖아
할아버지 몰래 금고에서 동전을 꺼냈어
저 발 아래 물웅덩이엔
내 무릎 사이로 발가벗은 귀여운 내가 기어오네
쭈쭈 아가 이리 온, 맛있는 젖 먹여줄게
일흔 살의 내가 마흔인 나를
위로하느라 가로수 사이 불어제치네
흰 머리칼 다 풀어지고 이마엔 땀이 맺혔어
내 몸에서 나온 나의 할머니들과
나의 딸들이 달로 뜨고 별로 뜨고
나뭇잎 잎잎마다 바람으로 불어제쳤어
한밤 내내 나는 나에게서 불을 쬐고 앉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게 안겨 젖 빠는
가장 어린 나에게서 오오래 불을 쬐었다
일흔 살 먹은 나의 껍질뿐인 젖무덤을 더듬기도 했다
보름달 아래 겨울 가출이 아주 따뜻했다
식어가는 화로 하나 껴안은 것처럼
(『불쌍한 사랑 기계』.문학과지성사. 1997)
또 하나의 타이타닉호
김혜순
솥이 된 ‘또 하나의 타이타닉호‘
1911년 건조되었고, 선적지는 사우탬프턴
속력은 22노트, 여객선, 한 번 항해에 2천 명 이상 탑승한 경력
내가 결혼한 해에 해체되었으며
지금은 빵 굽는 토스터, 아니면 주전자, 중국식 프라이팬,
한국식 압력밥솥이 되었다
상처투성이의 큰 짐승
육지 생활에 여전히 적응 못하는 퇴역 선장
그래서 솥이 되어서도
늘 말썽이 잦다
나는 밥하기 싫은 참에 압력밥솥 회사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자꾸 김이 새잖아요?
내가 씻은 쌀이 도대체 몇 톤이나 될까. 새벽에 일어나 쌀을 씻고, 식탁을 차리고, 다시 쌀을 씻고, 솥을 닦고, 숟가락을 닦고, 화장실을 닦고, 다시 쌀을 씻는다. 닭의 뱃속 에 붙은 기름을 긁어내고, 쌀을 씻고, 생선의 내장을 꺼내고, 파를 다진다. 다시 쌀을 씻는다. 망망대해를 떠가는 배, ‘또 하나의 타이타닉’>표 압력밥솥, 과연 이것이 나의 항해인가.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우리 집에 정박한 한국식 압력밥솥 ‘또 하나의 타이타닉호’
불쌍해라, 부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밥하는 거 지겨워
설거지하는 거 지겨워
그럼 그것도 안 하면 뭐할 건데?
압력밥솥이 내게 물었다
뱀처럼 밥 먹고 입을 쓰윽 닦지
내가 대답했다
영사기에서 쏟아지는 빛처럼 가스불이 솥을 에워싸자 파도가 끓는다
스크린처럼 하얀 빙산에 배가 부딪칠 때
밤바다로 쏟아져 들어가는 내 나날의 이미지
물에 잠겨서도 환하게 불켜고
필름처럼 둥글게 영속하는 천 개의 방
느리디느린 디졸브로
솥이 된 여자, 그 여자가
곧, 스타들과 엑스트라들이 끓어오르는 흰 파도와 함께 잦아든다
그 이름 ‘또 하나의 타이타닉호’
화이트 스타 선박회사 건조
수심 4천 미터 속 부엌을 천천히 걸어다니며
짙푸른 바닷속에 붉은 녹을 풀어넣고 있다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지성사. 2000)
환한 걸레
김혜순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 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사. 1997)
그녀, 요나
김혜순
어쩌면 좋아요
고래 뱃속에서 아기를 낳고야 말았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사랑을 하고야 말았어요
어쩌면 좋아요
당신은 나를 아직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내가 두 눈을 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울부짖어요
저 멀고 깊은 바닷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여자가 울어요 그 여자의 아기도 덩달아 울어요
두 눈을 뜨고 당신을 보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는 게 분명하지요?
그러니 자꾸만 자꾸만 당신이 보고 싶지요)
오늘 밤 그 여자가
한 번도 제 몸으로 햇빛을 반사해본 적 없는 그 여자가
덤불 같은 스케치를 뒤집어쓰고
젖은 머리칼 흔드나봐요
이파리 하나 없는 숲이 덩달아 울고
어디선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함박눈이 메아리쳐와요
아아, 어쩌면 좋아요?
나는 아직 태어나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아직 두 눈이 다 빚어지지도 못했는데
(『한 잔의 붉은 겨울』.문학과지성사.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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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김혜순
이 음악은 이제 너무 들었어요 지겨워요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잖아요?
스위치를 누르면 눈이 휘날리지요
다시 누르면 벚꽃 축제, 아니에요?
윤전기는 쉴새없이 돌아가고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공장 가득 쌓여 있어요
어느쯤에서 태양이 타오르고
어느쯤에서 장마가 시작되는지 난 다 외웠어요
음악이란 모조리 되풀이되는 푸가, 아니에요?
물이 흐르다, 얼음이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이고
지하로 눈 녹은 물이 스며들고, 그 다음엔 물 아지랑이 피어올라요
어느 부분에선가 경건하게 완전 군장하시고
낚시질 떠나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진 이제 정년 지나서 시장 바구니 들고 엄마 따라다녀요
기차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그리고
날마다 새 아침이라고 소근대는 남루한 계단이
쏟아지려는 듯 걸려 있어요
나는 매일 이 계단을 올라갔었어요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만드셨다는데
자고 나면 언제나 월요일이었어요 날마다 출근을 서둘러야 했어요
그래도 강을 건너기도 했어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기도 했어요
달력 속 여자는 맥주를 들고 가랑이를 벌렸어요
그는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쓰윽 집어넣었어요
소복 입은 할머니들이 오늘도 일본 대사관 앞에 서 있었어요
그 여자는 해변으로 가고 나는 달력 속으로 들어갔어요
내 딸이 엄마는 비키는 수영복이 안 어울려 그랬던가요?
공장장님은 색 분해의 도사인 건 틀림없어요
지치지도 않고 달력 속 여자들의 비키니 색이 살아 있으니까
왜, 윤전기 앞에선 한 번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요?
왜, 나는 매일 아침 새로운 형량을 시작해야 하나요?
나는 벌써 이 음악을 다 외워버렸어요 귀에 못이 박일 정도에요
그러나저러나 나한테서 뭘 더 찍을 게 있다고 윤전기는 쉬지 않고
자꾸만 까만 숫자만 찍어대는 거예요?
―시집『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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