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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높새바람같이는/이영광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9. 3.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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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높새바람같이는/이영광

입력 : 2016-09-02 17:58 ㅣ 수정 : 2016-09-02 18:32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903022003&wlog_tag3=daum#csidx5b827e7904435beb99eab10c976edf9



높새바람같이는/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 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 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상대가 내게 품고 있는 마음이 더 작을 때 우리는 짝사랑이라는 병에 든다. 이 병은 열병이다. 하지만 짝사랑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상대를 가까이하는 마음보다, 상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클 때 생긴다. 이럴 때 우리의 눈에 비치는 상대는 더없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다행스럽게도 상대와 나의 감정이 비슷하게 차오를 때 우리는 연애와 사랑의 세계로 전환된다. 연애의 세계에서 그리고 사랑의 세계에서 관계는 더없이 충만하며 인자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감정이라는 불안한 층위에 겹겹이 쌓아 올려진 이 세계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고 결코 영원하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는 곧 관계의 죽음을 맞는다. 

눈을 감고 내가 가장 즐거웠던 한 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때 나의 눈앞에는 더없이 아름다웠던 연인이 웃음을 내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연인의 정한 눈동자에는 나의 모습이 설핏 비쳐 보인다. 어쩌면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나의 옛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상대와의 헤어짐이라는 사건만으로는 울지 않는다. 다만 순수하고 맑았던 오래전 나 자신과의 헤어짐을 슬퍼하며 운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에서 나는 너무 멀리 떠나왔다. 

박준 시인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903022003&wlog_tag3=daum#csidx280edc2462d603b9ec9f9789d7c844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