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컷' 시인들, 가난과 사랑과 금기를 노래하다
권영미 기자 입력 2017.08.08. 17:56 수정 2017.08.08. 18:25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시를 쓰거나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남성의 시쓰기보다 더욱 어려운 것으로 평가된다.
억압이자 굴레인 남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자웅동체'가 아니기에 필연적으로 남성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모순도 덤으로 여성 시인들을 괴롭혀왔다.
그 가운데 최초의 서정시인인 그리스 시인 사포 등 여성 시인들은 사회의 금기인 동성애를 안타까움과 슬픔, 용기를 버무려 표현하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 시로 도전하고 있다.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암컷이라는 그 어둠 속에서 여성인 나의 시는 발진한다."(김혜순의 시론 '여성, 시하다' 28쪽)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시를 쓰거나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은 남성의 시쓰기보다 더욱 어려운 것으로 평가된다. 밥벌이의 어려움은 둘째로 치더라도 언어 자체를 남성들이 발명했기에 여성이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타자화하는 세계관이나 표현에서 자유롭기가 힘들다는 분석이다.
특히 여성들이 오랫동안 차별과 혐오, 폭력에 노출되어 온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자란 한국문학은 무형의 강한 억압을 여성 시인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억압이자 굴레인 남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자웅동체'가 아니기에 필연적으로 남성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모순도 덤으로 여성 시인들을 괴롭혀왔다.
최근 출간된 시집들인 신현림(56)의 '반지하 앨리스'(민음사), 박연준(37)의 '베누스 푸디카'(창비), 해외 레즈비언 여성들의 시가 다수 들어있는 시선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큐큐)는 악조건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시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난과 금기, 관계에 대한 각성과 극복이 각자의 독특한 시선과 상황에 따라 이뤄진다.
지난주 출간된 신현림 시인의 '반지하 앨리스'는 딸과 함께 전전한 자신의 반지하 삶 10년을 담은 시집이다. 신현림은 토끼굴에 빠져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빗대며 자신을 '돈에 쫓겨 반지하로 꺼져 든 앨리스'라 표현한다.
'등산하면 하산을 하고/출세하면 말세가 오겠지/섹스가 끝나면 이별 빤스가 뒹굴고/여전히 여자가 살기 피로한 조국에서/사랑의 술잔은/한강에 띄우고/운명적인 결혼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다'(신현림의 시 '나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 중에서)처럼 그의 삶은 '사랑'도 '운명적인 결혼'도 포기한 채 피곤하고 신산하다. 하지만 그는 '자식을 키워야 하는' 부모로서의 의무이자 기쁨 덕에 자살하지 않았고 돌고래처럼 하늘로 솟아오르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식을 키워야 해서 자살하지 않았고/쓸쓸한 나와 같은 너를 찾아/슬픔에 목메며/슬픔의 끝장을 보려고/나는 자살하지 않았다'(신현림 시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1' 중에서)
박연준의 시집 '베누스 푸디카'는 '정숙한 비너스'라는 뜻의 라틴어 '베누스 푸디카'를 제목으로 쓰고 있다. 두 손으로 각각 가슴과 음부를 가리는 자세를 뜻하는 이 말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정숙한 태도를 의미하면서 그의 시가 갖는 슬픔의 근원, 나아가 시를 쓰는 이유를 설명한다.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됐는데/떠난 사람의 길고, 축축한, 잠옷이/펄럭이는 걸 보았지//사랑이 길어져 극단까지 밀고 가다/견디지 못하면/지구 밖으로 밀려나는구나'(박연준의 '베누스 푸디카 1' 중에서)
또 더 나아가 은밀하고 섬세한 언어를 통해 시인은 부끄러움과 에로티시즘의 경계를 오가며 권위와 가식에 대한 비판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는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퀴어(성소수자) 작가들의 사랑시를 엮은 시선집이다. 전 세계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양성애자), 트랜스젠더(성전환자) 시인 39명이 한 글자 한 글자 진솔하게 적어 내려간 사랑시 75편을 번역해 수록했다. 그 가운데 최초의 서정시인인 그리스 시인 사포 등 여성 시인들은 사회의 금기인 동성애를 안타까움과 슬픔, 용기를 버무려 표현하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 시로 도전하고 있다.
'얼룩진 왕좌의 아프로디테,/신의 영원한 딸이여,/올가미를 엮는 그대여! 제발, 이렇게 비나니,//슬픔으로 내 마음을 짓누르지 마오!/나에게 와주오, 가마득한 내 절규를 듣고서/그대 아버지의 신전으로부터'(사포의 시 '파포스의 여인에게 드리는 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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