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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혁명의 시인 -고정희 1.고정희의 생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7. 8. 2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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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혁명의 시인 고정희


1. 고정희의 생애


고정희(1948-1991)는 해남군 삼산면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여성운동가로 삼산면 송정리는 고정희가 스무 살 무렵까지 그녀가 문학소녀로서의 꿈과 희망을 키우던 마을이다. 이러한 뿌리가 그의 초기 시에 향토적 서정이 짙은 시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1975년 시인 박남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연가》《부활과 그 이후》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허형만·김준태·장효문·송수권·국효문 등과 [목요회]동인으로 활동하였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시창작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4년부터는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찬아카데미 출판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 ‘또 하나의 문화’ 에서 활동하는 등 여성운동가로서의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 1991년 6월 9일 취재차 지리산 등반 중 실족사하였다.


시 집:《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이 시대의 아벨》1983, 《초혼제》1983, 《눈물꽃》1986,《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여성해방출사표》1990,《광주의 눈물》1990,《아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 등.



2. 고정희 시인 13주기 생가방문·추모

6월9일은 당대 유명 시인이자 여성의 당당한 삶을 추구했던 페미니스트 고정희 시인의 13주기. 그가 창간 동인으로 몸담았던 여성주의 문화단체 ‘또 하나의 문화’는 13년째 그가 태어나고 자란 해남땅을 밟고 생가를 방문하는 추모여행을 마련했다.

1주기 때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만 다녀가다 10년째엔 그의 이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소녀들이 그를 스승으로 삼기 시작했고, 이젠 그의 호흡을 느끼고 싶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편견에 맞섰던 고정희의 시와 삶 속에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어루만지는 힘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문화관광부가 해남과 고정희의 문화 코드를 촘촘히 엮어 관광코스로 적극 개발하겠다고 나서, 고정희 시인 추모여행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커졌다.

양희은의 노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고인의 애창곡이라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즉석 합창이 시작됐고, 고인에게 편지를 쓰는 이들도 있었다.

‘잎새주’ 소주 2병이 무덤에 뿌려지며 묘제는 끝났다. 어떤 이는 생전의 작업실 그대로인 서가에서 시인이 읽던 책을 뽑아 읽었다. 또 어떤 이는 시인이 앉았던 책상에 앉아 방명록을 쓰기도 했다. 깨끗이 씻어 말린 돌멩이에 꽃과 나비, 소나무를 그려 화단을 장식하면서 사람들은 시인을 다시 만나고 있었다.

“제도권 밖에서 교육 받으며 늘 조금씩 불안했었는데 선생님의 시를 만나며 제가 따르고 싶은 모델을 발견할 수 있어 정말 기뻤어요. 요즘에도 힘들 땐 마음속으로 선생님께 의지해요.” 서울시립 청소년 직업체험센터 ‘하자센터’를 졸업한 바람(23)은 고인이 자신에겐 수호신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훌쩍 지났건만, 시인은 그가 사랑했던 여성 벗들에게 물을 주며 그들 사이에서 이렇듯 싱싱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3. 나희덕의 글을 통해 본 고정희

"나를 가장 강하게 사로잡았던 문제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위기와 지성의 뿌리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정치현실과 예술의 혼을 따로 떼어놓지 못한다. 삶과 이데아는 동전의 안과 밖의 관계이다. ‘현실’이라는 렌즈가 곧 꿈의 광맥을 캐는 도구인 것이다. 탐사는 계속될 것이다.”

고정희가 시집 <눈물꽃>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현실은 그의 시가 치열하게 더듬었던 대상이었다. 그래서 고정희의 시는 현실의 부조리함과 이로 인한 민중의 아픔 그리고 가부장제 아래 여성의 삶이 안고 있는 질곡 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이것을 넘고자 했던 강한 실천의지 역시 깊이 배어있다.

시인 나희덕은 얼마 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발표한 ‘시대의 염의를 마름질 하는 손’이라는 제목의 고정희론에서 “80년대를 온몸으로 돌파해낸 정신의 족적에 경의를 표”한다며 “서정시의 좁은 틀을 과감하게 부수고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을 부단히 탐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부정의 현실 속에서 정치적으로나 성적으로 금기시되던 시적 언술들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그 선구적 역할을 인정받기 충분하다”고 했다.

초기엔 기독교적 세계관 하의 현실을 노래하다가 이후 민중적 제의를 시형식으로 끌어들이고 결국 여성주의 시로 시세계를 넓혀 간 고정희 시를 두고 나희덕은 고정희의 시 화두를 기독교, 민중 그리고 여성으로 본다.

나희덕에 따르면 고정희에게 있어 여성문제가 본격적인 주제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부터이다. 여성성에 대해 다소 낭만적으로 접근했던 초기시와 달리 이때에 이르면 그가 상정한 여성성의 원형인 어머니는 수난받는 여성의 대표이자 역사적 해원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 고정희는 분단의 슬픔이라는 현실과 여성의 역사를 결합시켜 민족의 문제를 생각케 하는 ‘넷째거리-진혼마당’‘사람의 본이 어디인고 하니’등의 시를 썼다.

이후 고정희는 <여성해방출사표>(1990)에서 여성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을 드러내며 다양한 시적 방법론을 구사하게 된다. 신사임당, 황진이 등과 서신을 나누기도 하고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기면서 여성주의 시의 지평을 넓혀 나간다.

그러나 고정희에게 있어 민중이냐 여성이냐, 실천이냐 이론이냐, 문학이냐 운동이냐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킬지는 오랫동안 고민거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한편에서는 여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머슴아들에 치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기집아들에 치이면서”라는 조한혜정 교수의 조사(弔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자가 문제라도 민중인 여성이 문제라는 틀 안에서 생각했던 고정희는 이후 필리핀, 타이 등을 돌며 자유롭고 진보적인 여성들을 만나면서 기존 민중운동의 가부장성과 경직성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여성운동을 어떻게 민주화운동과 결합시킬까, 더 나아가 여성운동이 어떻게 전체 민주화운동의 토양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여성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 나간다.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혁명’은 그가 찾은 새 패러다임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격적인 실천을 앞에 두고 지리산 뱀사골에서 마흔 셋의 길지 않은 삶을 마감했다.

나희덕은 “그의 유고시집을 읽다 보면 … 스스로의 속도를 늦추고 뒤를 돌아보는 시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런데 그 창조적 균열을 좀더 심화시켜야 할 시점에서 그는…홀연 사라지고 말았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지은주 기자 ippen@womennews.co.kr)



4. 고정희의 작품 세계

고정희의 고향은 해남이며, 20대에 서울로 올라왔다.
고정희는 대도시 서울 생활을 감성적으로 거부하고 고향을 가슴에 담고 있다.

< 한양 생활 십여 년 / 인스탄트 우정에 길들고 난 후 / 우리가 지킨 것은 무엇이드냐 / 대도시의 변두리로 사지를 몰아붙인 후 / 우리에게 남은 건 무엇이드냐>(서울사랑 -두엄을 위하여)

< 문득, 신경통에 좋다는 골담초 꽃멍울이 / 건들건들 흔들리는 고향집이 그리웠다>(황혼일기)

고정희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타의 기독교 시인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진보신학, 민중신학이 막 태동하던 시기에 한국신학대학을 나온 그는 시의 곳곳에 고난받는 하느님, 실천하는 기독교인, 그리고 구원의 약속과 해방의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은 '원격조정 바벨탑'(서울사랑 -두엄을 위하여) 처럼 거대하지만 불안하다. 그러나, 세상은 '다 평안하신지' '다 잠드셨는지' '잠잠한 오월' '말없는 오월'(서울사랑 -침묵에 대하여)이 계속될 뿐이다. '이 땅의 젊음은 전율하지만' 세상의 '나날은 고요하기만'(디아스포라 -환상가에게) 하다.

그리고, 그런 현실은 곧 신이 고난을 받는 모습이다.
< 불볕 같은 햇빛 아래 사내는 지쳐 쓰러지고 ... 그 사내는 대학을 다닌 적도 없습니다. / 부귀를 누린 자도 아닙니다. / 권력을 가진 자도 아닙니다. ... >(히브리傳書) 사람들의 기도는 '우리'와 분리된 '말'로만 존재하며, 그런 말은 마치 '로보트와 분별이 안 가는'(서울사랑 -말에 대하여)사람을 낳는다.

그런데, 이따금 사람들은 거대한 태풍이 이 나라를 휩쓸고 가는 때에 '너희 별장을 엎고 교회당과 종탑을 엎으려는'(이 시대의 아벨)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리고 진실로 회개하며 울부짖는다.
<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동안만이라도 / 주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 한번만 더 간청하오니 / 여기 의인 열 사람만 두엄으로 뿌려지면 / 이 땅을 멸하지 않으시렵니까? >

그런 울부짖음 뒤에 날씨는 개이고 그는 희망한다. 모든 것을 나누어준 '사내, 예수'가 부활까지도 가난한 자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상한 영혼을 위하여)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고정희 시인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투시와 비판을 함찬 언어로 승화시켜 시를 시로서 보게 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우리에게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어떻게 절규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고정희의 시집 가운데 《초혼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위로한 장시집(長詩集)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의 아벨》과 마지막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격한 시를 썼다.

< 하나님 나라 해방절 운동은 / 그리스도인의 몸에 칼을 대는 혁명이다 변명의 때는 끝났다 / 이제 내 평화의 칼을 들어라 / 그리고 너희 몸에 먼저 그 칼을 들이대라 / 그 때 너희는 해방되리라>(밥과 자본주의 -해방적 도성에 찾아오신 예수)

그는 또한, 통일, 여성 해방, 희년(희년이란, 구약성경 레위기25장에 나오는 약자해방법의 하나로 매 50년 마다 부채탕감, 노예해방, 토지반환, 농경지 휴식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한국기독교협의회에서는 1995년, 분단된 지 50년 되는 해를 맞이하여 '평화와 통일의 희년'을 1988년에 선포하였다. 고정희 시의 희년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유래한다.) 등에 대한 강한 믿음과 확신을 표출해 낸다. 또한,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 여성을 억누르는, 밥을 독차지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세력에 대한 강한 분노를 토해 낸다.(똥,좇 등의 단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들은 역시 기독교이다. 이전의 시들보다도 보다 적극적으로 성경을 변주 변용하고 있다. [밥과 자본주의]라는 연작시 중 [우리 시대 산상수훈],[신 없이 사는 시대의 일곱 가지 복],[가진 자의 일곱 가지 복],[새 시대 주기도문] 등은 민중신학적 관점을 유지하며 성서의 본래 메시지를 우리시대에게 전하는 시들이다. 시에 종교적 색채가 진하게 도색된 감이 없지 않으나, 그와 같이 기독교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세지는 성경 이상의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초혼제》부터 그가 추구하던 [굿마당]의 형식도 더욱 세련된 형 태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유고시집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통일 굿마당 - 몸통일 마음통일 밥통일이로다]라는 서른 페이지에 달하는 시는 이 땅 한반도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결정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정희는 시집의 후기를 통해 이렇게 말을 했다.

詩쓰는 행위가 곧 신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詩와 행동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구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나의 시가 관심하는 문제는 삶 자체이지 결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우리의 삶의 영역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전통의 문제들이 곧 우리 삶의 현장이며 그것들과 내 삶이 부딪는 장소에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된다. 나의 시는 그러한 삶의 현장에서의 고뇌의 궤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가도 사회학자도 경제학자도 아니지만 개개인의 삶이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들의 규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러한 제도적 억압의 굴레를 극복하려는 힘. 그것이 자유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시는 항상 자유 의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에너지였다.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10여년 동안의 시작을 통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시인에게 시란 생리작용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로움을 갈망하고 사소한 생리, 그러나 통로가 막힐 때 질식 직전의 고통에 시달리며 노여워하며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신비한 생리, 그것이 시의 힘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시를 쓸 수 밖에 없고 또 시가 요구하는 하늘 쪽에 머리를 둘 수 밖에 없다.

《눈물꽃》의 시편들이 만들어질 동안 나를 가장 강하게 사로잡았던 문제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위기와 지성의 뿌리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정치현실과 예술의 혼을 따로 떼어놓지 못한다. 삶과 이데아는 동전의 안과 밖의 관계이다. '현실'이라는 렌즈가 곧 꿈의 광맥을 캐는 도구인 것이다. 탐사는 계속 될 것이다. (시집 《눈물꽃》의 후기 중)


5. 김승희가 말하는 고정희와 여성주의 문학

1970년대 중반쯤 되면, 한국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들이 억눌린 사람에 대한, 요즘 말로 하면 타자에 대한 인식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70년대 말 또는 80년대 초반이 되면, 영미 문학자들이 페미니즘 이론 서적들을 많이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여성주의 문학을 이야기할 때는 고정희라는 이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정희 시인은 70년대 중반에는 민중 운동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이 시대의 아베》 등의 시집을 낼 때까지만 하더라도,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들의 억눌린 권익들, 상처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를 냈었습니다.

그런데 고정희 시인이 민중 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민중이라는 추상 명사 속에는 여성이라는 것이 없다, 말하자면 다같이 민중 운동을 하는데, 여성에 대한 배려라든지, 그야말로 억압받고 있는 한국에서의 계층은 여성인데, 여성에 대한 공감이나 남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연민 의식 같은 것들이 없는 것을 보면서, 민중 운동을 하는 남성들의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주의에 고정희 시인은 굉장히 실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더 외로움을 느끼면서 《여성 해방 출사표》라는 시집을 냈었습니다.

그리고 영미 페미니즘 문학이 번역되면서 전신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페미니즘 이론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에 최승자, 김혜순, 김정란 시인 등이 다함께 시를 쓰면서, 누가 어떤 시를 제일 먼저 썼고, 그 뒤에 누가 썼다고 하기보다는, 상당히 여성주의(여성을 중요시 여기는)적인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80년대에는 상당히 많은 여성주의라고 할 수 있는 문학이 그야말로 꽃피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70년대 후반 혹은 1980년대 초반 한국 여성주의 문학이,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여성들에게 파고들었고, 또한 많은 주변 여건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민중의 저항적인 목소리 속에서, 그 동안 우리를 지배해오던 담론들의 체계가 모든 인간을 위한 가치 체계가 아니고, 인류의 반인 남성들을 위한 담론의 체계가 아닌가 하는 새로운 인식들이 많이 싹텄습니다.

여성 문학의 최초의 단계는 일단은 가부장적인 사회, 문화적 체계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억압받는가 하는 것을 고발하는 단계입니다. 영문학에서도 아마 그럴 겁니다. 고발 단계가 아까 얘기했던 고정희 시인의 《여성 해방 출사표》라는 시집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정희 시인은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민중 운동에서부터 여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라든가, 사회나 가족, 남편, 아들로부터 착취당하는 여성 현실들을 많이 그려 냈습니다.

그리고 고정희 시인의 굉장히 특이한 점은 신학대학 출신이어서 기독교적인 청교도 정신, 의인 정신이 굉장히 강했는데, 나중에는 기독교가 아버지 중심 체계를 갖고 있어서, 아버지 이외의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매우 가혹한 일인주의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정희 시인의 발견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발견입니다.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서 제일 민중적인 존재입니다. 그 다음에는 큰딸쯤일 것 같습니다. 집안의 귀족이나 주인 계급은 아버지나 큰아들, 독자일 겁니다. 고정희 시인은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으로부터 어머니, 또는 만신(무당)적인 생각으로 나아갔고, 만신을 무녀에게서 발견했다기보다는 한국의 땅, 국토(이것은 우리 어머니의 몸인데), 고향(지리산), 강물 등의 만물 속에서 신을 보았고, 만신적인 힘이 바로 민중의 힘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고정희의 여성주의라는 것은 단순히 어머니의 희생만을 노래했다기보다는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을 모든 소외 계급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에 있습니다.

고정희는 아시아 여행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것은 유작 시집인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에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 때 필리핀에 가서 고정희 시인이 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그룹에서 창작 공부를 했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여러 시인들과 함께, 남성이 정신과 이성을 갖고 있다면, 여성은 몸으로 살아가고, 몸으로 아이를 낳기 때문에 좀더 흙과 가까운데,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의해서 억압받거나 차별을 받는 땅의 이야기들을 필리핀 여성 노동자들에게서 봅니다. 또한 태국의 몸을 파는 어린 노동자들을 보면서, 여성 현실은 한 국가나 한 계급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제국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에서 시작된 것인데, 제국주의라는 것은, 내가 중심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타자이기 때문에 나의 질서대로 조직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남성 중심주의와 같고, 제국의 문법에 따라서 조직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피식민지적인 아시아라는 대륙의 슬픔을 발견했고, 그것을 어머니와 노동자 누이들과 함께 확산시켰던 데에 고정희 시인의 상당히 중요한 업적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정희 시인은 굉장히 선구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정희를 통해서 여성주의 문학의 고발적 단계를 통과했고, 지금은 최영미 시인의 《퍼스널컴퓨터》 같은 시를 보면, 사이버 문화를 통해서 상당히 많은 성적 해방, 아니 육체의 해방이 아니라 성적인 젠더를 탈출하는, 성적 정체성이 혼동되는 자유를 상당히 많이 누릴 수가 있다고 하는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남성은 남성으로서,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젠더가 확정되어 있지만, 사이버에서 아바타를 통해서 자신의 성을 바꾸는 종류의, 사이버 문화를 통한 성의 바꿈을 통해서 상당히 많은 여성들의 자유가 사이버 공간이지만, 정신적인 쾌감으로 진행되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을 무슨 이즘으로 시를 써야 된다면 재미가 없는 겁니다. 페미니즘이 20년 정도 진행되면서 상당히 많은 성숙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고발의 차원을 넘어서서, 최영미가 말했던 문화 속에서의 젠더의 변화도 상당히 재미있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 김선우 시인과 같은 모성성의 재발견, 남성 시인들은 굉장히 희생적인 어머니를 미화하는 시를 많이 썼고, 또한 페미니즘의 여성 시인들은 어머니의 희생을 미화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질서 이전에 있었던 유토피아 공간으로 그렸었는데, 아버지의 근대에 의해서 병들어 있는 우리의 문명을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모성성은 상당히 넉넉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고통스럽다, 아프다고 절규하는 단계를 넘어서 상당히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 한국 여성주의 문학의 폭과 깊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 가상인터뷰

민족과 민중의 현실과 역사의 부조리함에 끊임없이 날카롭고 과격한 렌즈를 들이대며 항상 눌린 자와 누르는 자의 관계에 천착하여 인간의 고통에 대한 비범한 감수성을 보여 주었던 고정희 시인은 많은 지인들에게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과 애석함을 남기고, 1991년 43세의 나이에 그가 생전에 그렇게 사랑했던 지리산에서 실족사했다. 그의 말처럼 현실과 이상이 따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또한 그 이면의 분노와 슬픔을 거침없고 당당하며 통렬하게 노래한 그를 '사랑과 혁명의 시인'이라고 이름 붙인 조한혜정 선생님의 수사를 그대로 제목으로 붙였다. 그를 만나 보자.

언니네 : 안녕하세요? 올해가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10주기 되는 해네요.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두고 가셔서 애석하지 않으셨어요? 진정한 여성해방문학에 대한 탐구를 남은 자의 몫으로 하고 떠나셨는데..

고정희 : 가난하지만 자유롭고 민주적인 필리핀 여성들을 만나고 와서 1991년 6월 8일, 한국여성해방문학의 정립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서, [또 하나의 문화] 월례 논단에서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 혁명"을 주제로 발표를 했었어요. 그 발표 후에 여성의 삶과 여성문학에 대한 좀더 혁명적이고 깊이있는 논의를, 지리산 갔다 와서 그 얘기를 하자고 하고 갔었는데.. 그리고 나서 바로 지리산에서 그런 일이 있었죠. 제 친구들이 항상 저더러 본격적인 여성해방문학을 할 것을 종용하곤 했는데(웃음) 그것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해보지도 못하고 갔으니 친구들이 많이 원망했을 거예요.

언니네 : 선생님은 항상 시대적인 아픔, 민중의 아픔, 여성의 아픔을 노래하신 참여시인으로 알려져 있고, 끊임없이 누르는 자와 눌린 자의 문제, 근원적인 인간 해방의 문제에 대해 천착하신 것 같은 데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나요?

고정희 : 땅끝이라고 불리는 전남 해남이 제 고향입니다. 김지하 시인과 황지우 시인과 김남주 시인의 고향도 그 곳이죠. 특히나 제 아버지와 김남주 시인의 아버지는 동갑내기 친구였답니다. 이 사람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오월 광주'를 속으로 깊숙히 간직한 사람들이에요. 광주는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분노이자 슬픔이었고 그래서 또한 자긍이요, 희망인 화두죠. 제가 그 때 오월에 광주에 있었습니다. 그 땐 모두들 광주에 가위눌리던 시절이었죠.

질문하신 그 힘에 대해서는, 아니 힘이라기보다는 토양이라고 해야겠군요. 전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광주에서 시대의식을 얻었고, 수유리 신학대학 시절을 통해서 민중과 민족을 얻었고, 그 후 [또 하나의 문화]를 만나서 민중에 대한 구체성, 페미니스트적인 구체성을 얻었다고요.


7. 마무리

고정희의 시세계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상실현을 꿈꾸는 희망찬 노래에서부터 민족민중문학에 대한 치열한 모색, 그리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탐구와 정열을 감싸 안는다. 그리고 그 모든 시에서 생명에의 강한 의지와 사랑이 넘쳐 난다. 고정희의 이와 같은 치열한 역사의식과 탐구정신은 5. 18 광주 항쟁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녀는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와 민중의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 다져지는 저항의 힘을 힘차게 노래하였던 것이다. 현실사회의 개혁과 더불어 새로운 글쓰기의 혁명은 이처럼 고정희에게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삶의 지향점이었다.

이토록 정직하게, 줄기차게, 자유를 향한 이념을 불태우며 민족, 민중,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고정희의 문학가로서, 여성운동가로서의 실천은 한국 문학사에 대단히 중요한 귀감이 될 것이 틀림없다.

고정희의 시가 왜 좋은 문학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상을 꿈꾸게 하기 때문일 거다.


우리는 꿈꾸네 한사랑 꿈꾸네
둘이 살다 하나 되는 큰세상 꿈꾸네
기쁨이면 나누고
고통이면 맞들어
우리는 꿈꾸네 한살림 꿈꾸네

우리는 길을 가네 한겨레 길을 가네
둘이 가다 하나되는 한민족 길을 가네
힘든 길은 의지하고
험한 길은 쉬엄쉬엄
우리는 길을 가네 통일의 길을 가네
-남남북녀 사랑노래, 고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