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사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정선 기자 입력 2017.09.07. 03:10
마광수 소설, 25년전 음란물 판결 재판 참여자들에 다시 물었습니다]
"지금도 용납될 수 없는 글" "비이성적·정신병리학적 문제"
"다양한 사고를 가감없이 표현" "당시 문학 외적으로 마녀사냥"
"재판결하면 처벌까지는 글쎄.."
빈소엔 문학계 인사 거의 없고 친지·동창·제자들이 자리 지켜
지난 5일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마광수(66) 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의 빈소가 서울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6일 오후 조문객은 드물었다. 100석이 마련된 빈소를 20여 명이 지키고 있었다. 상주이자 누나(74)의 흐느낌만 간간이 울렸다.
빈소를 찾은 조문객 대부분은 중·고교 시절 친구와 연세대 제자였다. 문학계 인사는 보기 어려웠다. 대광고 동창인 이종홍(67)씨는 "광수는 늘 외로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씨가 숨지기 직전 통화를 나눈 인물이다. 5일 낮 12시 27분쯤 마씨로부터 "나 지금 마음이 너무 힘든데 와줄 수 없겠니"라는 연락을 받았다. 1시간 뒤 마씨는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3시까지 간다고 했는데 평생 못 보게 될 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국내에서 문학 작품의 외설성을 이유로 사법 처리된 첫 사례는 1969년 소설 '영점하의 새끼들'이다. 당시 박승훈 건국대 교수가 썼다. 박 교수는 그해 7월 형법상 음란물 제조 혐의로 구속됐다. 1973년에는 소설 '반노(叛奴)'를 쓴 작가 염재만씨가 같은 혐의로 기소됐다. 두 사람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음란물 제조 혐의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즐거운 사라'를 쓴 마씨가 처음이다. 그것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화 이후였다. 1992년 10월 구속된 그는 그해 12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94년 7월 항소가 기각됐고 1995년 6월 상고도 기각돼 형이 확정됐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즐거운 사라'는 성관계를 노골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묘사해 성욕을 자극한다"며 총 17개 부분을 적시했다. 대법원은 "작가가 주장하는 '성 논의의 해방과 인간의 자아 확립'이라는 전체적인 주제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음란한 문서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며 유죄를 확정했다.
당시 1심 재판장은 6일 본지 통화에서 "젊은 여성을 내세워 외설적인 행위만 되풀이하는 것이 국민적 공감대로 볼 때 허용하기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결론이었다"며 "그런 것이 책으로 나오는 것은 지금도 반대하지만, 처벌의 대상이 되느냐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당시에 책 자체가 외설이 아니라는 의견은 많지 않았다"며 "다만 책 출판을 이유로 교수 신분인 사람을 구속한다는 게 옳은지가 논란이었다"고 했다.
그를 대하는 시선은 검찰보다 사법부, 대중보다 지식사회가 더 차가웠다. 그들에게 '사라'는 '문자화한 음란 비디오'였다. 1994년 2월 항소심에서 검찰과 변호인 측에 의해 중립 감정인으로 공동 선임된 안경환 당시 서울대 교수는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이 보호해야 할 정도의 문학적, 예술적, 정치적, 사회적 가치가 없는 법적 폐기물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손봉호 당시 서울대 교수는 신문 기고에서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유행한다. 마광수는 교수가 아니라 마광수씨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전업 작가였다면 비판이 덜했을지 모른다. 그가 대학교수, 게다가 명문대 교수였다는 사실은 죄를 더 무겁게 했다. 수사를 지휘한 심재륜 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2012년 6월 월간조선 기고에서 "'이런 글을 써대면서 국내 명문대 교수로서 남을 가르치고 지도해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심씨는 "작품에 대해 예단을 갖지 않았다. 예술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장삿속만 챙기려는 작품은 세상이 알아서 도태시킬 것이라고 믿었다"며 "그런데 읽어보니 '이렇게까지 변태와 엽기로 가득한 것을 소설이라 해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라'를 두고 "소설 같지 않다"고 했던 소설가 이문열씨는 "마광수가 연세대 교수라는 것이 걱정된다. 연대 교수라는 사람이 '이게 소설이고 예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많이 읽을 텐데"라고 했다.
심씨와 이씨는 지금도 기본적인 판단은 같다고 했다. 심씨는 6일 본지 통화에서 "지금도 생각의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6일 "음란물이라고 판단한 적은 없다. 외설은 아니고 비이성적인 심리고, 정신병리학적인 문제"라고 했다. 또 "기본적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면서도 "풍문으로 많이 외로워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자기 능력으로 충분히 잘 지낼 사람이었는데"라고 안타까워했다.
마씨의 변호인이었던 한승헌 전 감사원장은 "그때도 무죄, 지금도 무죄"라며 변함없는 소신을 드러냈다. 한 전 원장은 "표현의 자유 침해도 시국 사건의 하나로 보고 맡았다"며 "음란성이 있더라도 건전한 비판을 통해 이뤄질 일이지, 국가의 형벌권이 발동돼 처벌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마씨에 대해서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라기보다는 민주사회에서 허용되는 다양한 표현, 다양한 사고를 가감 없이 실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심 당시 검찰 측 감정인으로 나섰으나 검찰 측 입장과 반대로 마씨를 옹호했던 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는 "작품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을 보고 이 사회가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당시 고려대 총장 앞으로 '민용태를 쫓아내라'는 편지가 많이 왔다. 시말서를 썼다"고 했다. 민 교수는 "거드름 피우면서 점잖은 척하는 한국 사회의 위선 때문에 마씨가 고독해질 수밖에 없었다"며 "문학이 문학 외적인 기준으로 재단되는 것은 그때도 지금도 마녀사냥"이라고 말했다.
마씨는 숨지기 전까지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이달 중에 단편 21편을 묶은 유작 소설집 '추억마저 잊으랴'가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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