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향림(1942~)
충남 당진의 깊은 산골로
선산이 옮겨간 뒤 수북한 잡초 속에
몇 기의 무덤이 앉아 있다.
그 발치 아래 자투리땅은 감자밭이다.
그곳에서 캐낸 감자 한 상자가
내가 사는 고층아파트까지 올라왔다.
붉은 황토가 묻은 감자알들은
임부의 배처럼 튼실했다.
속에다가 무슨 희망을 잉태하고 있는지
모두가 크고 둥글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모골이 송연해졌다.
오랜 시간 땅속 깊숙이에서만
안으로 뭉쳤을 응집력 탓이다.
(…)
드디어 익은 감자를 식히고 한 입 베어 먹는다.
잘 익어 혀끝에 살살 녹는다.
몇 편의 시도 이처럼 잘 익어
입에 녹는 맛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는 생각이 둥글수록 잘 익은 놈이다.
선산의 발치 아래 자투리땅이 감자밭이라니 그 감자들, 참 옹골차겠다. 그 감자들이 고층아파트까지 올라와 스테인리스 냄비 안에서 덜컹대고 있으니 탐스러운 시간들이 얼마나 잘 익어가는가. 시도 잘 익은 둥근 놈으로 몇 편 얻는다면 이 여름, 그것으로 충분하겠다.
<김승희·시인·서강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