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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7. 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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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 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내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작가노트]

 

장을 허물다는 고향인 충남 청양군 남양면 대봉리 628-1에 있는, 지금은 비어 있는 시골집을 배경으로 해서 쓴 시다. 아버지는 일찍 폐암으로 돌아가셨으니, 어머니가 혼자 농사지으면서 사시다가 돌아가신 집이다. 기둥이 제법 반듯한 집이나 사람이 살지 않으니 한해 한해가 다르게 무너져가고 있다.

집안 어른인 재당숙의 말씀에 의하면, 전쟁 나던 1950년 여름에 장마에 무너진 집을 그 자리에 다시 나무와 흙으로 지었다고 한다. 대부분 민가가 그랬듯이 처음에는 초가집이었겠지만,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지붕을 함석으로 얹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함석에 빨간색을 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집을 중심으로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만든 벽돌로 쌓은 담장이 남아 있다. 생각해보니 동네 많은 집들이 거의 동시에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더니 함석지붕으로 바꾸고, 담장도 나무울타리에서 시멘트 벽돌로 쌓았다. 담장 위에는 유리병을 깬 날카로운 사금파리를 꽂아 놓거나 철조망을 둘러놓았다. 흉측한 풍경이었다.

사실 이 집은 동네의 종가격인 재당숙이 살던 집이다. 도시에 사는 내가 돈을 벌어서 어머니에게 사드린 것이다. 동네 가운데 살다가, 맨 꼭대기 집에 살았었는데, 이 집에 사시면서 만족하고 행복해 하셨다. 동네 공씨가 이집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 집 앞에 있는 밭의 일부인 653번지가 내 본적지이니, 아마 증조나 할아버지가 장가 간 뒤에 이 집에서 나와 바로 앞에 집을 짓고 살림을 차렸을 것이다.

이 시는 내가 오래 살아서 잘 아는 정보를 엮어서 만들었다. 청양군에서 보내온 개별주택가격 결정통지문을 보면 이 시를 쓸 무렵인 2012년에는 900만원이었지만 2018년에는 1370만원이다. 대지는 260여 평이다. 자랑이라기보다는 이것도 역사가 될 수 있어서 구체적 가격과 크기를 적어놓는 것이다.

이 시는 2013년 작가가 선정한 가장 좋은 시에 선정되었다. 몽블랑 만년필(F)을 상품으로 받았다. 또 이 시로 고양행주문학상을 받았고, 이 시를 표제시로 하는 시집을 내어 신석정문학상을 받았다. 그림책 담장을 허물다도 냈는데 한 해 동안 4천부를 찍었으니 만족스럽다. 내게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가져다 준 시다.

이 시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은 졸저인 산문집 맑은 슬픔(2016)에 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집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낸다. 그러나 지금 내려가 살 수도 없고, 그러니 돈 들여 새로 짓기도 그렇고, 팔기도 그렇고, 먼 시골이라서 빌려달라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필요 이상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