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
ㅡ시집『리트머스』(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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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운 것은 뒤쪽에 있다
양현근
아쉬움은 늘 한발 늦게 오는지
대합실 기둥 뒤에 남겨진 배웅이 아프다
아닌 척 모르는 척 먼 산을 보고 있다
먼저 내밀지 못하는 안녕이란 얼마나 모진 것이냐
누구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어쩌면 쉽게 올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기차가 왔던 길만큼을 되돌아 떠난다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기다림은 다시 자랄 것이다
그리운 것일수록 간격을 두면 넘치지 않는다고
침목과 침목 사이에 두근거림을 묶어둔다
햇살은 덤불 속으로 숨어들고
레일을 따라 눈발이 빗겨들고
이 지상의 모든 서글픈 만남들이
그 이름을 캄캄하게 안아가야 하는 저녁
모든 그리운 것은 왜 뒤쪽에 있는지
보고 싶은 것은
왜 가슴속에 바스락 소리를 숨겨놓고 있는 것인지
써레질이 끝난 저녁 하늘에서는 순한 노을이
방금 떠나온 뒤쪽을 몇 번이고 돌아보고 있다
―시집 『길은 그리운 쪽으로 눕는다』 근처』(시선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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