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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윤성택 -모든 그리운 것은 뒤쪽에 있다/양현근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9. 6. 27.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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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


윤성택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
 

 


 ㅡ시집『리트머스』(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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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운 것은 뒤쪽에 있다

 

양현근

 

 

아쉬움은 늘 한발 늦게 오는지

대합실 기둥 뒤에 남겨진 배웅이 아프다

아닌 척 모르는 척 먼 산을 보고 있다

먼저 내밀지 못하는 안녕이란 얼마나 모진 것이냐

누구도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어쩌면 쉽게 올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기차가 왔던 길만큼을 되돌아 떠난다

,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기다림은 다시 자랄 것이다

그리운 것일수록 간격을 두면 넘치지 않는다고

침목과 침목 사이에 두근거림을 묶어둔다

햇살은 덤불 속으로 숨어들고

레일을 따라 눈발이 빗겨들고

이 지상의 모든 서글픈 만남들이

그 이름을 캄캄하게 안아가야 하는 저녁

모든 그리운 것은 왜 뒤쪽에 있는지

보고 싶은 것은

왜 가슴속에 바스락 소리를 숨겨놓고 있는 것인지

써레질이 끝난 저녁 하늘에서는 순한 노을이

방금 떠나온 뒤쪽을 몇 번이고 돌아보고 있다

 

 

 

시집 길은 그리운 쪽으로 눕는다근처(시선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