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속의 여자
이명윤
어디서 잘라야 할 지 난감합니다. 두부처럼 쉽게 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 어딘지 서툰 당신의 말, 옛 동네 어귀를 거닐던 온순한 초식동물 냄새가 나요. 내가 우수고객이라서 당신은 전화를 건다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수고객이었다가 수화기를 놓는 순간 아닌. 우린 서로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선생님, 듣고 계세요?'
`.....................네'
`이번 보험 상품으로 말씀 드리면요'
나와 처음 통화 하는 당신은 그날 고개 숙이던 면접생이거나 언젠가 식당에서 혼이 나던 종업원이거나 취업신문을 열심히 뒤적이던 누이. 당신은 열심히 전화를 걸고 나는 열심히 전화를 끊어야겠지요. 어떡하면 가장 안전하게, 서로가 힘 빠지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을까요? 눈만 뜨면 하루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어야 하는 당신. 죄송합니다. 지금 저 역시 좀처럼 대답 없는 세상과 통화중입니다. 뚜뚜뚜뚜.
―《2006 전태일문학상 수상작》
―시집『수화기 속의 여자』(삶이보이는창,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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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내용처럼 이런 전화 많이 받아보았을 것이다. 내게도 어떤 때는 하루에 몇 통씩 걸려오는데 내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새나갔는지 알 수가 없다. 사기 당할 정도의 딱히 가진 거 있지도 않지만 어리숙하게 피싱사기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을 때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전화를 받으면 보통은 그냥 끊어버리는데 어떤 때는 좀 듣다가 중간에 바빠요 하며 다 들어주지를 못한다. 아마 대게는 나처럼 이렇게 매정하게 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바쁜 와중에 너무 자주 이런 전화를 받으면 화가 벌컥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의 화자는 다르다. 어렵게 전화기를 버턴을 누른 상대방의 마음 때문에 끊기를 매우 주저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런 일을 하는 알바 같은 비정규직 직업이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몇 통의 전화를 걸어야 하고 기본급은 얼마이며 만약 성사가 되면 따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전화를 거는 사람이 주위의 잘 아는 사람이거나 또는 가족 내 누이가 저런 일을 한다면 그래도 퉁명스럽게 끊어버릴 수 있을까.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감정 노동자라고 한다는데 견디기 힘들 정도의 언어폭력과 냉대에 거의 오래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둔다고 한다.
식물의 씨는 조건이 맞지 아니면 백 년이 있어도 싹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시의 씨앗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리 씨가 우수 품종이고 종자가 좋다 하더라도 적당한 습기와 온도와 주변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발아될 수 없을 것이다. 경제가 안 좋은 요즘도 정보 동의 하시어 전화를 걸었다고 서두를 뗀 뒤 이런 전화가 종종 걸려 온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화를 내고 야멸차게 끊었다면 이런 시를 절대 쓸 수 없을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원초적 따스한 마음이 이런 어여쁜 마음의 알을 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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