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칼코마니
김지유
뭉그러져야
완성되는 그림
형체도 없이
짓이길 때
비로소 만나는
늘 처음 보는
나비, 데칼코마니
끈적이는 우연이
달라붙어
양쪽 날개는 찢기고
지루한 연애가
몸을 바꿔 오는 시간
펼쳐지는 것이
나비만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짓누를수록
기억은 더 푸르게 날아
지독한 사랑을
하지, 베테랑처럼
ㅡ시집『액션페인팅』(천년의시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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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이민화
식구들 몰래 이사를 오신 어머니
언제부턴가 내 방 거울 속에 숨어산다.
번지르한 당신집 놔두고 항상 딴죽을 걸던 내게 와서 얹혀산다
(…)
오늘은 외출을 하는 모양이다
밝은 바이올렛 빛 파우더를 바르고
핑크색 립스틱으로 정성스레 입술을 그린다
장롱 깊숙이 걸어둔 옷을 꺼내 입고서
요리조리 뒤태까지 신경을 쓴다.
(…)
거울 속에는 어머니를 닮은 내가 세들어 산다
ㅡ시집『오래된 잠』(황금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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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신철규
네 감은 눈 위에 꽃잎이 내려앉으면
네 눈 속에 꽃이 피어난다.
네 감은 눈 위에 햇살이 내리면
네 눈 속에 단풍나무 푸른 잎사귀들이 살랑거린다.
네 감은 눈 위에 나비가 앉으면
네 눈동자는 꽃술이 되어 환하게 빛나고 있을까.
먼 항해에서 돌아온 배의 노처럼
네 긴 속눈썹은 가지런히 쉬고 있다.
가끔씩 배가 출렁이는지
넌 가끔 두 주먹을 꼭 쥐기도 한다.
네 감은 눈 속에 눈이 내리면
나는 새하얀 자작나무숲을 한없이 헤매고 있을 거야.
지친 발걸음이 네 눈동자 위에 찍힌다.
네가 눈을 뜨면 내 눈은 까맣게 감기고 말 거야.
나는 너를 채우고 너는 내게서 빠져나간다.
우리는 번지면서 점점 뚜렷해진다.
ㅡ계간『시향』(2015년 가을호)
ㅡ신현림 지음『아들아, 외로울 때 시를 읽으렴』 (사과꽃,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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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김현주
큰집에 잔치가 있던 그 날
엄니가 누런 잇바디로 톡, 구멍을 내시더니
배고픙게쪼옥빨아먹으랑게얼릉얼릉
주위를 살피며 서둘러 목구멍으로 삼킨 슬픈 핵
엄니 소매춤에 달랑 숨어있던 비린 생달걀이었네
대나무그림자 어룽이던 오래 된 뒤안
급하게 나를 부르던 열아흐레 낮달이 어떻게 기울었는지
엄니가 비린 양수 속에 어떻게 나를 숨기셨는지
투명한 알집을 깨고 나온 나는 몰랐었네
유년의 누런 겉장을 뜯어내면
기울어진 비린 낮달 속으로
누런 잇바디로 구멍을 뚫고 계시는 엄니와
그 구멍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어린 내가
엄니가 깬 구멍으로 흘러내린 끈적한 슬픔을
도화지에 쏟아 붓고 손가락으로 휘젓고 있네
비릿한 슬픔이 다 풀어질 때까지
생달걀처럼 풀어지던 엄니의 잇바디
열아흐레 낮달 속에서 나를 보고 웃으시네
ㅡ시집『폐르시안석류』(문학아카데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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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우진용
숨구멍이 낙지에게 죽음구멍이다.
낙지꾼은 숨구멍을 좇는다.
죽음구멍이 낙지꾼의 숨구멍이다.
뻘밭을 뒹구는 모진 생들이
구멍을 사이에 두고
생과 사를 넘나들고 있다.
바다도 허리를 뒤집으며
하루 두 번 밀고 당긴다.
잠시 숨을 고르는 바다.
접힌 수평선을 펴면
복사된 달, 데칼코마니.
ㅡ웹진『시인광장』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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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황희순
몸에 박힌 옹이를 한 개씩 뽑아
너에게 심고 싶다
모든 옹이가 통증이 스며있는 건 아니다
네 것을 뽑아 내게 심는다면, 기꺼이
중심을 내놓을 것이다
이 별을 숨쉬게 하는 건
서로 다른 너와 나의 옹이다
ㅡ웹진『시인광장』 (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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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
박주용
경계란 참으로 가깝고도 먼 그리움인가
소금쟁이가 연못 위를 미끄러지며
생의 균형을 잡으며 간다
경계에 푸른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수양버들도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삶의 촉수 내민다
물 위에 떠 있는 연잎에 나도 손바닥 대어본다
노랗게 불을 켠 손금 같은 잎맥들이 표면장력으로 달려 나오고
덩달아 셀 수 없는 물이랑이 자맥질하며 내 나이 자꾸 건져 올린다.
그리움은 접어도 그리움인가
허리 숙여 연못 속을 들여다본다
목덜미 물렸는지 하늘은 온통 노을빛이다
하늘은 흐르고 꽃그늘이 머문 구름 속엔 우물거림으로도 잘 씹히지 않는
살아온 신발 자국이 숨바꼭질처럼 웅크리고 숨어 있다
어둠과 빛살 가득 담긴 신발을 펴 운동장에 활짝 펼쳐보면
내 나이는 신기하게 거꾸로 걷고 있고
몰린 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는 가끔 철봉에 발 얹기도 한다
하늘에 뿌리를 둔 탯줄이 연잎을 둥글게 경계로 밀어 올리는 지금
소금쟁이보다 짠하게 물 위를 걷고 있는
간간한 내 나이가 반으로 접히고 있다.
ㅡ시집『점자, 그녀가 환하다』(시산맥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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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데칼코마니
정혜선
노란 점박이 검정 찌르레기 한 마리
오래오래 걸어와서는
그렇게 천년을 지나온 듯
서두르지 않고 내 주위를 한 바퀴 돕니다
홀로 헤매는 그림자 다 몰고 와서
발자국마다 가득가득 채워 넣습니다
외로움이 수도 없이 바닥에 찍힙니다
하늘 가까이에서
그림자 없이 살아가는 것이
새의 숙명
소나기 쏟아진 초여름
햇살이 반짝 얼굴을 내민 오후
새는 길게 늘어뜨린
제 그림자를 쪼기 시작합니다
그림자가 점점 짧아집니다
그림자를 버린 새들은
쉽게 풍화되지 않습니다
거대도시 인공 연못에는
빛의 대칭점들이 흥건하고
선명하게 빛나는
새의 날개도 젖어 있습니다
새는 제 그림자를 날개 깊숙이 감추고
왔던 길을 되짚어가듯
석양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망각하지 않으려
쉬지 않고 걸어온 길에 찍어놓은
데칼코마니의 발자국
다시 마파람이 불어옵니다
물 위에서 오래 머뭇거리는 내 그림자도
동심원 속에서
같은 그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ㅡ웹진『시인광장』 (201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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