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동백 시 모음 -박미란/한춘화/한이나/문충성/김형출/유안진/김지헌...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1. 18. 10:07
728x90

 동백


 박미란



 동백은 집중하며 떨어진다

 무엇이든 내리막이 중요하니까


 물의 온도, 바람의 온도, 저 달의 온도


 언젠가 두고 갈 것들이다


 꽃보다 내가 먼저 시들 테지

 뿌리가 얼기 전에, 하루가 절박하기 전에 숨을 불어

넣자


 어디로 가고 있나

 한 쌍의 남녀가 긴 망설임 끝에 헤어졌다


 피부색은 각자 다른데 이별하는 방식은 모두 같아


 온도를 재는 일과 그것을 지키는 일이 부디 꽃 밖에서

도 이루어졌으면




-시집『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문학과 지성사,2019)


-----------------------------

동백

-43일을 쓰다

 

한춘화

 

참말 징하기도 하지

나는 왜 이리

상처가 많은 나라에 태어나

꽃도 피라고 읽고 있는지

모가지째 뚝뚝 져

땅바닥에 핀 동백을

피바람에 베인

목으로 보고 있는지

누가 동백나무에

그날

져버린 아이와 여자와

남자와 노인의 숨

떨어지는 소리를

걸어놨는지

 

살아 꽃이었던 그 어떤 당신들이

해마다 내 가슴에서

참말로 징한 꽃으로 피어

왜 그리 시뻘건지

속살 벌어진 상처 모냥

이리 아픈게

동백 맞는지

꽃 맞는지

 

    

 

계간시산맥(2019년 봄호)


-----------------------------


  흰 동백 사랑

 

  한이나

 

 

  흰 동백이다 꽃의 흰 사랑이다 그 앞에서는 캄캄한 슬픔도 한결 잦아진다

 

  엎드렸던 마음이다

 

  이 세상 물거품이고 그림자다 흰 색깔의 꽃나무 동백이 다 엎드렸던 마음이다 눈부실 때까지 푸른 열매를 매달지 않는다

 

  나에게는 멀고 먼 반야의 빛이다 아버지다 시다

 

  눈물은 높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흰소리로 내려온다 잎사귀의 비탈에서 저 혼자 굴러 떨어진다 눈시울 젖은 땅 속으로 스며 한살이 물의 꽃으로 별의 꽃으로 순환한다

 

  흰 동백은 다시 태어나는 내 불면의 사랑이다



 시집『플로리안 카페에서 쓴 편지』(서정시학, 2019)


------------------------

동백꽃


문충성

 


누이야.

동백꽃 피어나는 꽃소리 들어본 적 있느냐.

사각사각 맨발로 하얀 눈 한 겨울 캄캄함을 밟아올 때

제주바다는 이러저리 불안을 뒤척이고

찬바람을 몰아다니던 낙엽 소리 돌돌 잠재우며

밤새 동백꽃 피어나는 꽃소리 아련히

 

 


―정호승 외 지음『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

동백꽃

 

김형출

 

 

안에 감추어진 불더미

마구 꺾고 싶거든

 

재넘이 자국 짚고

숫눈에 떨어지는 몸엣것

사랑을 아는 꽃

 

바다 너머 해조음에 갇힌 긴 숨비소리

훔치고 싶거든

 

달팽이관에 물어보자 동박새야

빠알간 눈물 보았느냐고?

돌아올 사람 없는 빈자리에

꽃잎 주워 담고 홍조가 수줍은

솟대보다 겸손하고 장미보다 붉은 눈

 

 

 

ㅡ시집 『낮달의 기원』(문학의전당, 2013)
ㅡ월간『유심』(2013년 6월호)


-------------

선운사 동백꽃


유안진

 


무너지고 싶습니다.
녹아지고 싶습니다라고


여우바람으로 자맥질치는 불길


미친 이 불길 잡아 달라고
눈비를 맞아봅니다만


밤마다 고개 드는
죄를 죽입니다만


눈서리가 매울수록
오히려 뜨거워만집니다.


마침내는 왈칵
각혈 쏟고 말았습니다. 부처님.

 

 


―김화영 지음『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시와시학상, 2008)


---------

동백, 모가지들


김지헌 

 

 
모든 이별이 다 서러운 것은 아니다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꽃도 있지 않더냐


동백꽃이 뚝뚝 무더기로
뛰어 내리는 봄날


타흐리르* 광장
참수(斬首)된 꽃들이
목숨 걸고 대결코자 했던 것


그들이 붉은 피가 식을 때쯤
새로운 태양이
나일을 적실 것이다


모든 이별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타흐리르: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상징.

 

 


ㅡ시집『배롱나무 사원』(시안, 2012)


-----------

동백


박남준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 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꽃의 무상함도 다만 일별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 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 갔던 건
거기 내 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피어나네

 

 

 

―시집『적막』(창비, 2005)


--------------

  동백 신전


   박진성

 

 

   동백은 봄의 중심으로 지면서 빛을 뿜어낸다 목이 잘리고 서도 꼿꼿하게 제 몸 함부로 버리지 않는 사랑이다 파르테 논도 동백꽃이다 낡은 육신으로 낡은 시간 버티면서 이천 오백 년 동안 제 몸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먼 데서부터 소식 전해오겠는가 붉은 혀 같은 동 백꽃잎 바닥에 떨어지면 하나쯤 주워 내 입에 넣고 싶다 내
몸 속 붉은 피에 불지르고 싶다 다 타버리고 나서도 어느 날 내가 유적처럼 남아 이 자리에서 꽃 한 송이 밀어내면 그게 내 사랑이다 피 흘리면서 목숨 꺾여도 봄볕에 달아오르는 내 전 생애다

 

 


―월간『현대시』2002년 6월호)


--------------

동백꽃 화인


정재록

 


선창가 뒷골목의 동백여인숙 비닐 장판에
800℃짜리 동백 한 송이 졌던가 보다
보일러의 파이프 자국이 물결치는 노르께한 비닐 바닥에
섬처럼 던져진 까만 점 하나


아까 다방에서 티켓 끊어 차 배달 나가던
핫팬츠의 손목에도 세 개나 찍혀 있던 동백꽃 자국
여인숙의 장판만이 아니라 사람의 살 속으로도
불을 찔러 넣을 수 있다는 증표


불의 도장을 꾹 찔러 넣은 화인火印
불이 심어놓은 뿌리는 깊고 깊다
보온병을 든 손목을 종두자국만하게 파고든 불도
이 막다른 선창까지 뿌리가 한참 깊을 것이다


그 불씨 한 점 가슴에 묻고
이 선창가 후미진 여창에서 너를 생각한다
네 속 깊이 찍혔을 화인을 눈여겨보고 있다
네 몸에 숙명처럼 떠 있을 섬 하나를
이 허름한 여인숙의 비닐장판에서 본다
볼 덴 자국을 증거인멸할 수도 없는 너
그 깊은 뿌리를 더듬어 너에게 가리라.

 

 

 

ㅡ시선집『신춘문예 당선 시집』(문학세계사, 2007)


------------------

동백꽃
―선운사에서


김명원
 

 

지고 말면 그뿐
흔적이 살아 있던 자리에
바람조차 성글 터인데


그랬으면 좋겠다
내 사랑 어디에도
있었다 속죄하지 않아도 되는
 

불현듯 피었다 지는
선운사 동백처럼
 

지고 나면 그뿐
아무란 자취 찾을 수 없어 눈 머는
깨끗한 허무였으면 좋겠다

 

 


―시집『달빛 손가락』(시학, 2007)


-------------------



동백꽃 피고 지고


홍정순  
      
 
전대 차고 앉아서
손님들 있는 데서
미쳤지유우 우우
막 자라는 풋옥수수 같은 애를
등교 참의 애를
암만 화가 나도 그렇지유우 우우
(연탄집게는 왜 거기 있어가지구우)
그 걸로 애 엉덩이를 치다니
잠시 제 정신이 아니었지유우 우우우
내친 김에
새벽부터 인나 이 고생하는 거 안 보여, 이년아
한방 멕여 보냈으니
뭣에 씌워도 단단히 씌운 게 틀림없지유우 우우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첫날밤, 도 아니구우)
연탄집게가 탄 중심을 살며시 꼬집어 들어올리듯
시부저기 경고나 해 두는 건데, 우우우
……
전대 찬 마음은 젖은 탄처럼 무거운데 우우우
딸 사랑 받으려고 살짝 빠진 남편
저 화상이야말로 이 연탄집게로 콕!(오늘은 아물케도 제 정신이 아니네유우)
우우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우우우 어릴 적 그……
(딸?)

 

 


ㅡ격월간『유심』(2010년 9-10월호)


------------

동백꽃


신현정 

 

 
눈 나리어 나리어

세상의 길들이 다 사라진 거기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그리고 그녀가 무슨 인기척에 새벽을 나와 볼 적에

그야말로 섬뜩 놀라 자지러질 발자국이라도 찍어 놓고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것을 궁리 중인데

어쩔거나

아 동백꽃이나 꽝 찍어 놓아야겠다.

 

 

 

ㅡ유고시집『화창한 날』(세계사, 2010)


------------

동백섬


김혜영  
 
  
당신의 숨소리 날 삼켜보실래요?

알몸으로 태양을 받아들이는 섬
시퍼런 몸 속 바다로 수장될지도 몰라

점점 섬이 되어가는 여자

파도, 동백꽃 입술을 핥는다

 

 


ㅡ시집『프로이트를 읽는 오전』(도서출판, 2011)


--------------

동백
-미황사에서


박남준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 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다만 꽃의 무상함도 일별 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갔던 건
거기 내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피어나네

 

 


-시집『적막』(창비, 2005)

 

------------

제주 동백


곽효환



검은  돌담장 위로 혹은
돌담 사이로 붉은 꽃이 오른다
봄은 이렇게 온다
중산간 오름에서부터
해안 마을 어귀까지
피를 토하듯 가득할 때
선홍색 붉은 봉화가 되어
짙푸른 그늘을 뚫고
이 곳의 봄은 한 발 늦게 온다
산 사람들의 무덤에서
산 사람들의 마을까지
아무 것도 새기지 않은 아니 새길 수 없는
백비(白碑)를 품고 사는 지질컹이들의
봄은 버둑버둑 몸부림으로 온다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만개한 순간
툭, 하고 모가지를 떨구는
동백꽃 한 송이 가슴에 매달려 온다




ㅡ계간『다층』(2019년 여름호)


--------------

동백꽃


장석남 

 

 
아흔아홉 개의 빛나는 잎으로는
아흔아홉의 눈 마주친 얼굴들을 비춰 감추어 두네
또 아흔아홉의 그늘 쪽 검소한 잎에는
숨어서 볼 수밖에 없던 사람의 이목구비나 손의 맵시들을,
연중 몇 번 겨우겨우
짧은 햇볕 만나 젖듯 새기어 두네
숨죽여 수년을 묵혀 두면 그 내력 가장 가파른 순서가 생겨
꽃으로 차례차례 올려놓으니 그 빛깔이
정갈한 숯불 같을 수밖에는 없는 일
뻑뻑이 겹친 꽃잎의 메아리여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속으로 치솟아가는 메아리여
일생 사랑의 법칙이 그러하려니
한쪽 귀는 반드시 닫고서
그 곁에 앉아 보네
 
 

 


ㅡ월간『유심』(2014년 3월호 - 신춘기획/시인이 사랑한 봄꽃)

 


---------------------
동백꽃


오세영

 

 

괜찮다.
괜찮다.
부풀어오르는 밀물 탓이다.
개펄을 채우고 둑을 넘쳐서
마당까지 벙벙히 넘실대는
물,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이다.
옷고름 풀어헤치고 치마를 들치며
속살 간질이는
갯바람,
괜찮다.
괜찮다.

 

사릿날
초조(初潮)의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달아오르는
처녀의
볼.

 

 


ㅡ시집『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시와시학사, 1992)

 

 

------------------------
동백꽃

 

김형출

 

 

안에 감추어진 불더미

마구 꺾고 싶거든

 

재넘이 자국 짚고

숫눈에 떨어지는 몸엣것

사랑을 아는 꽃

 

바다 너머 해조음에 갇힌 긴 숨비소리

훔치고 싶거든

 

달팽이관에 물어보자 동박새야

빠알간 눈물 보았느냐고?

돌아올 사람 없는 빈자리에

꽃잎 주워 담고 홍조가 수줍은

솟대보다 겸손하고 장미보다 붉은 눈

 

 

 

ㅡ시집 『낮달의 기원』(문학의전당, 2013)
ㅡ월간『유심』(2013년 6월호)

 

 

----------------------------------
동백꽃


문충성

 


누이야.

동백꽃 피어나는 꽃소리 들어본 적 있느냐.

사각사각 맨발로 하얀 눈 한 겨울 캄캄함을 밟아올 때

제주바다는 이러저리 불안을 뒤척이고

찬바람을 몰아다니던 낙엽 소리 돌돌 잠재우며

밤새 동백꽃 피어나는 꽃소리 아련히

 

 


―정호승 외 지음『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
동백꽃


신현정 

 

 
눈 나리어 나리어

세상의 길들이 다 사라진 거기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그리고 그녀가 무슨 인기척에 새벽을 나와 볼 적에

그야말로 섬뜩 놀라 자지러질 발자국이라도 찍어 놓고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것을 궁리 중인데

어쩔거나

아 동백꽃이나 꽝 찍어 놓아야겠다.

 

 

ㅡ유고시집『화창한 날』(세계사, 2010)

 

-----------------
동백꽃
―선운사에서


김명원
 

 

지고 말면 그뿐
흔적이 살아 있던 자리에
바람조차 성글 터인데


그랬으면 좋겠다
내 사랑 어디에도
있었다 속죄하지 않아도 되는
 

불현듯 피었다 지는
선운사 동백처럼
 

지고 나면 그뿐
아무란 자취 찾을 수 없어 눈 머는
깨끗한 허무였으면 좋겠다

 

 

―시집『달빛 손가락』(시학, 2007)

 

 

---------------------
동백

 

정훈

 


백설이 눈부신
하늘 한 모서리


다홍으로
불이 붙는다.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그 뉘를 사모하기에
이 깊은 겨울에 애태워 피는가.

 

 

 

《자유문학》(1959. 3)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
동백


박남준
 

 

동백의 숲까지 나는 간다
저 붉은 것,
피를 토하며 매달리는 간절한 고통 같은 것
어떤 격렬한 열망이 이 겨울 꽃을 피우게 하는지
내 욕망의 그늘에도 동백이 숨어 피고 지고 있겠지


지는 것들이 길 위에 누워 꽃길을 만드는구나
동백의 숲에서는 꽃의 무상함도 다만 일별해야 했으나
견딜 수 없는 몸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동백을 보는 일이란
곤두박질한 주검의 속살을 기웃거리는 일 같아서
두 눈은 동백 너머 푸른 바다 더듬이를 곤두세운다
옛날은 이렇게도 끈질기구나
동백을 보러 갔던 건
거기 내 안의 동백을 부리고자 했던 것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떨어지네
무수한 칼날을 들어 동백의 가지를 치고 또 친들
나를 아예 죽고 죽이지 않은들
저 동백 다시 피어나지 않겠는가
동백의 숲을 되짚어 나오네
부리지 못한 동백꽃송이
내 진창의 바닥에 피어나네

 

 

 

―시집『적막』(창비, 2005)

 


--------------------
동백 

 

이명윤

 

 

별들이 다시 지상에 왔다
눈 먼 바람의 시린 손이 마을을 더듬는
아직도 이곳은 위험한 계절이다
서로를 믿었으므로 개의치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 속에 묻힌 오래된 말들이 하나 둘 눈을 뜬다
너는 지상에서 꽃이라 불리지만
바람 앞에 맨살로 피어나는 것은
꽃이 아니라 신념인 것
신념은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또 다시 두 겹 세 겹 포위해 오는 겨울 앞에
부릅뜬 눈동자로 선 너는
곧 우수수 목소리가 잘려나갈 위험한 사랑이다
봄으로 가는 암호를 스스로 찢어 깨물은
붉은 입술은 네 순결한 사랑의 증표인 것을
감히 누가 사랑을 진압하였다 말하는가
해마다 망각을 찢고 불쑥 불쑥 세상을 겨누는
저 붉은 총구 앞에

 

 


―시집『수화기 속의 여자』(삶이 보이는 창, 2008)

 


-------------------
동백꽃 패설

 

임영조

 

 

법당 앞 돌계단 사이에 두고
어린 동백 두 그루 마주 서 있다
새파란 잎들이 공양 받은 햇살을
키질하듯 살랑살랑 까분다, 금세
분분한 소문 같은 금빛 가루 부시다
그 무슨 법문을 주고받기에
온통 벌개진 낯으로 키들거릴까
얼마나 솔깃하고 귓맛이 나면
노란 목젖이 다 보이도록
꽃술을 활짝 열고 자지러질까
용맹 정진하라, 땡그렁!
아니면 파계하라, 땡그렁!
부연 끝 풍경이 수시로 경을 쳐도
동백꽃은 한사코 입 다물 줄 모른다
참 농후하고 불경스러운 수작을
불당에서 내내 내려다보는
부처님도 손들고 조용하시다
저 철없이 고운 사미들 돌연
옷 벗고 정말 파계하면 어쩌나
절 버리고 혹 내게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가슴 설레는
볼수록 낯뜨겁고 황홀한
동백꽃 패설.

 

 
―계간『시와 사람』(2000년 가을호)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6시집)』(천년의 시작, 2008)

 

----------------------------
붉은 동백


문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는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이고 싶어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시집『맨발』(창비, 2004)

 

--------------------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고재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소리소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뱍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소월시문학작품집『백련사 동백숲길에서』(문학사상, 2002)

 


----------------------------------
동백이 활짝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시집『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 2000)

 


------------------
禪雲寺 河口

 

서정주

 

 

禪雲寺 고랑으로
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冬天』, 민중서관, 1968)
―박영근의 시읽기『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
선운사에서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1994)

 

 

-----------------------------
선운사 동백꽃


임영조

 

 

오늘은 내내 소문만 듣던
해마다 벼르다가 미처 못 가본
선운사 동백꽃 보러 나섰습니다
(소문의 저쪽은 왜 늘 그리움인가?)
고속도로 좌우로 비탈진 산허리엔
한물 간 개나리 진달래 산벚꽃 들이
잠 덜 깬 얼굴로 배웅하지만, 대충
목례나 보내며 직행으로 달렸습니다
(환상은 왜 실제보다 더 화려한가?)
낯선 풍경을 차장으로 으깨며
김제 지나 태인 지나 정읍서 꺾어
한가롭게 내지른 국도로 접어드니
산과들과 마을이 제자리 잡고
무엇이나 움트는 게 보이더군요
시냇가에 밭둑에 논두렁길에
방금 핀 들꽃들의 자잘한 웃음소리
더 생생하고 가깝게 들리더군요
내심 연모해온 그대 만나러 가듯
선운사 동백꽃 보러 가는 길
앞만 보고 내처 달리다보니
마음이 먼저 붉게 젖었더군요
복분자술 탓인가, 춘정 탓인가?
정작 선운사 동백꽃은 못 보고
붉게 터져 선혈이 낭자한 상처
노골적인 색정만 보았습니다
입술 색 너무 황홀하고 야하여
온몸이 후끈 달아 넋 놓고.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 (제4시집 귀로 웃는 집)』(천년의 시작, 2008)

 


--------------
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시집『그여자네 집』(창작과비평사, 1998)

 


--------------
선운사 동백꽃


유안진

 


무너지고 싶습니다.
녹아지고 싶습니다라고


여우바람으로 자맥질치는 불길


미친 이 불길 잡아 달라고
눈비를 맞아봅니다만


밤마다 고개 드는
죄를 죽입니다만


눈서리가 매울수록
오히려 뜨거워만집니다.


마침내는 왈칵
각혈 쏟고 말았습니다. 부처님.

 

 


―김화영 지음『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주세요』(시와시학상, 2008)

 


--------------
동백, 모가지들


김지헌 

 

 
모든 이별이 다 서러운 것은 아니다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꽃도 있지 않더냐


동백꽃이 뚝뚝 무더기로
뛰어 내리는 봄날


타흐리르* 광장
참수(斬首)된 꽃들이
목숨 걸고 대결코자 했던 것


그들이 붉은 피가 식을 때쯤
새로운 태양이
나일을 적실 것이다


모든 이별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타흐리르: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상징.

 

 


ㅡ시집『배롱나무 사원』(시안, 2012)

 


----------------------------
동백꽃 피고 지고


홍정순    
     
 
전대 차고 앉아서
손님들 있는 데서
미쳤지유우 우우
막 자라는 풋옥수수 같은 애를
등교 참의 애를
암만 화가 나도 그렇지유우 우우
(연탄집게는 왜 거기 있어가지구우)
그 걸로 애 엉덩이를 치다니
잠시 제 정신이 아니었지유우 우우우
내친 김에
새벽부터 인나 이 고생하는 거 안 보여, 이년아
한방 멕여 보냈으니
뭣에 씌워도 단단히 씌운 게 틀림없지유우 우우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첫날밤, 도 아니구우)
연탄집게가 탄 중심을 살며시 꼬집어 들어올리듯
시부저기 경고나 해 두는 건데, 우우우
……
전대 찬 마음은 젖은 탄처럼 무거운데 우우우
딸 사랑 받으려고 살짝 빠진 남편
저 화상이야말로 이 연탄집게로 콕!(오늘은 아물케도 제 정신이 아니네유우)
우우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우우우 어릴 적 그……
(딸?)

 


ㅡ격월간『유심』(2010년 9-10월호)

 


----------------------
동백꽃 화인


정재록

 


선창가 뒷골목의 동백여인숙 비닐 장판에
800℃짜리 동백 한 송이 졌던가 보다
보일러의 파이프 자국이 물결치는 노르께한 비닐 바닥에
섬처럼 던져진 까만 점 하나


아까 다방에서 티켓 끊어 차 배달 나가던
핫팬츠의 손목에도 세 개나 찍혀 있던 동백꽃 자국
여인숙의 장판만이 아니라 사람의 살 속으로도
불을 찔러 넣을 수 있다는 증표


불의 도장을 꾹 찔러 넣은 화인火印
불이 심어놓은 뿌리는 깊고 깊다
보온병을 든 손목을 종두자국만하게 파고든 불도
이 막다른 선창까지 뿌리가 한참 깊을 것이다


그 불씨 한 점 가슴에 묻고
이 선창가 후미진 여창에서 너를 생각한다
네 속 깊이 찍혔을 화인을 눈여겨보고 있다
네 몸에 숙명처럼 떠 있을 섬 하나를
이 허름한 여인숙의 비닐장판에서 본다
볼 덴 자국을 증거인멸할 수도 없는 너
그 깊은 뿌리를 더듬어 너에게 가리라.

 

 

 

 

ㅡ『신춘문예 당선 시집』(문학세계사, 2007)

 


-------------------
그게 동백꽃이더라


한옥순

 

 
이모네 집은 두어 시간 걷고 또 걸어서 가야 있었다

스레트울타리 끼고 칠이 벗겨진 파란색 나무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들반들한 툇마루가 먼저 보이는 마당 깊은 작은 집,

이모는 말이 별로 없는 대신 소리 없이 크게 웃는

걸걸한 우리 엄마보다는 아주 조금 이뻐 보이는 여자였다

이모가 국수를 삶아 내오는 동안 쪼그리고 앉아서는

휘 둘러볼 것 없이 작고 좁은 방을 한바퀴 돌아본다

이모네 안방 벽엔 포플린인지 옥양목인지 이름만 아는

흰색의 횃대보가 서커스 천막처럼 늘 씌워져 있었다

그 안엔 이모의 단벌 외출복인 공단한복이 걸려져 있었고

이모부의 잿빛 양복과 겨울 외투가 귀한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이모네 벽에 걸렸던 옷들은 오래전에 다 잊었다

다만 쉰다섯 해가 너머 가도록 잊혀지지 않는 건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빨아 꼭꼭 눌러 다려 놓은 횃대보에 핀

꽃, 아주 붉고 작은 슬픈 얼굴의 꽃송이었다

왜 난 궁금하면서도 그 꽃 이름을 묻지 않았었는지

밤새 하얗게 내린 눈밭에 금방 떨어진 듯한 꽃송이들

맨 처음 생리혈을 묻힌 듯 생경스럽고 가슴 뛰는 그 색 색 색

금세라도 숨이 끊어질 듯 한 그 얼굴 얼굴 얼굴들이

동백꽃이란 걸 너무 많이 나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생전 처음 본 동백은 이모네 방 바람벽에 피었다가

나이 서른아홉에 모가지 툭 내던지듯 목숨 떨군 이모와 함께

연기로 날아간 흰 색 횃대보에 핀 핏빛보다 더 선명하게 붉던 꽃이었다

여덟살 계집애 가슴을 붉게 물들이며 숨이 막히게 하던

그 꽃 이름이 동백이라 하더라

뭔지모를 어린 시절에도 괜스레 눈시울 뜨겁게 하던 꽃들이,

초겨울 석양처럼 늙어서 가 본 서귀포 낯선 길 가 마다에

이모 얼굴을 수도 없이 그려 놓은 것 같은 꽃들이

그게 글쎄 동백이라 하더라

나는 동백꽃을 너무 어릴 적에 보았어라

 

 


―월간『우리시』(2010년 3월호)

 


----------------------
   동백 신전


   박진성

 

 

   동백은 봄의 중심으로 지면서 빛을 뿜어낸다 목이 잘리고 서도 꼿꼿하게 제 몸 함부로 버리지 않는 사랑이다 파르테 논도 동백꽃이다 낡은 육신으로 낡은 시간 버티면서 이천 오백 년 동안 제 몸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먼 데서부터 소식 전해오겠는가 붉은 혀 같은 동 백꽃잎 바닥에 떨어지면 하나쯤 주워 내 입에 넣고 싶다 내
몸 속 붉은 피에 불지르고 싶다 다 타버리고 나서도 어느 날 내가 유적처럼 남아 이 자리에서 꽃 한 송이 밀어내면 그게 내 사랑이다 피 흘리면서 목숨 꺾여도 봄볕에 달아오르는 내 전 생애다

 

 


―월간『현대시』2002년 6월호)

 


---------------------
동백 아가씨


서안나

 


야야 장사이기 노래 쪼까 틀어봐라이
그이가 목청 하나는 타고난 넘이지라
동백 아가씨 틀어 불면
농협 빚도 니 애비 오입질도 암 것도 아니여
뻘건 동백꽃 후두둑 떨어지듯
참지름 맹키로 용서가 되불지이


백 여시같은 그 가시내도
행님 행님 하믄서 앵겨붙으면
가끔은 이뻐보여야
남정네 맘 한 쪽은 내삘 줄 알게되면
세상 읽을 줄 알게 되는 거시구만
평생 농사지어봐야
남는 건 주름허고 빚이제
비오면 장땡이고
햇빛나믄 감사해부러
곡식 알맹이서 땀 냄새가 나불지
우리사 땅 파먹고 사는 무지랭이들잉께
땅은 절대 사람 버리고 떠나질 않제
암만 서방보다 낫제


장사이기 그 놈 쪼까 틀어보소
사는 거시 벨것이간디
저기 떨어지는 동백 좀 보소
내 가심이 다 붉어져야


시방 애비도 몰라보는 낮술 한 잔 하고 있소
서방도 부처도 다 잊어불라요
야야 장사이기 크게 틀어봐라이
장사이기가 오늘은 내 서방이여!

 

 

 

―계간『시와 문화』(2007년 여름호)


-------------------

동백


 박미란



 동백은 집중하며 떨어진다

 무엇이든 내리막이 중요하니까


 물의 온도, 바람의 온도, 저 달의 온도


 언젠가 두고 갈 것들이다


 꽃보다 내가 먼저 시들 테지

 뿌리가 얼기 전에, 하루가 절박하기 전에 숨을 불어

넣자


 어디로 가고 있나

 한 쌍의 남녀가 긴 망설임 끝에 헤어졌다


 피부색은 각자 다른데 이별하는 방식은 모두 같아


 온도를 재는 일과 그것을 지키는 일이 부디 꽃 밖에서

도 이루어졌으면




-시집『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문학과 지성사,2019)


-----------------------------

동백

-43일을 쓰다

 

한춘화

 

참말 징하기도 하지

나는 왜 이리

상처가 많은 나라에 태어나

꽃도 피라고 읽고 있는지

모가지째 뚝뚝 져

땅바닥에 핀 동백을

피바람에 베인

목으로 보고 있는지

누가 동백나무에

그날

져버린 아이와 여자와

남자와 노인의 숨

떨어지는 소리를

걸어놨는지

 

살아 꽃이었던 그 어떤 당신들이

해마다 내 가슴에서

참말로 징한 꽃으로 피어

왜 그리 시뻘건지

속살 벌어진 상처 모냥

이리 아픈게

동백 맞는지

꽃 맞는지

 

    

 

계간시산맥(2019년 봄호)


-----------------------------


  흰 동백 사랑

 

  한이나

 

 

  흰 동백이다 꽃의 흰 사랑이다 그 앞에서는 캄캄한 슬픔도 한결 잦아진다

 

  엎드렸던 마음이다

 

  이 세상 물거품이고 그림자다 흰 색깔의 꽃나무 동백이 다 엎드렸던 마음이다 눈부실 때까지 푸른 열매를 매달지 않는다

 

  나에게는 멀고 먼 반야의 빛이다 아버지다 시다

 

  눈물은 높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흰소리로 내려온다 잎사귀의 비탈에서 저 혼자 굴러 떨어진다 눈시울 젖은 땅 속으로 스며 한살이 물의 꽃으로 별의 꽃으로 순환한다

 

  흰 동백은 다시 태어나는 내 불면의 사랑이다



 시집『플로리안 카페에서 쓴 편지』(서정시학, 2019)


------------

동백, 모가지들


김지헌 

 

 
모든 이별이 다 서러운 것은 아니다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꽃도 있지 않더냐


동백꽃이 뚝뚝 무더기로
뛰어 내리는 봄날


타흐리르* 광장
참수(斬首)된 꽃들이
목숨 걸고 대결코자 했던 것


그들이 붉은 피가 식을 때쯤
새로운 태양이
나일을 적실 것이다


모든 이별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타흐리르: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상징.

 

 


ㅡ시집『배롱나무 사원』(시안, 2012)


---------------

동백, 모가지들


김지헌 

 

 
모든 이별이 다 서러운 것은 아니다
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꽃도 있지 않더냐


동백꽃이 뚝뚝 무더기로
뛰어 내리는 봄날


타흐리르* 광장
참수(斬首)된 꽃들이
목숨 걸고 대결코자 했던 것


그들이 붉은 피가 식을 때쯤
새로운 태양이
나일을 적실 것이다


모든 이별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타흐리르: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상징.

 

 


ㅡ시집『배롱나무 사원』(시안, 2012)


----------

동백섬


김혜영  
 
  
당신의 숨소리 날 삼켜보실래요?

알몸으로 태양을 받아들이는 섬
시퍼런 몸 속 바다로 수장될지도 몰라

점점 섬이 되어가는 여자

파도, 동백꽃 입술을 핥는다

 

 


ㅡ시집『프로이트를 읽는 오전』(도서출판, 2011)


--------------

  동백


  송종규



  모든 창밖에서 네가 오고 있다 모든 창밖에서 어스름이 오고 모든 창밖에서 태연하게 새벽이 온다 그러므로 모든 창밖은 유효하다 모든 창밖에서 엄습하는 겨울과 운명, 모든 창밖에서 도래하는 환영과 꽃잎들, 슬픔과 서사와 우체국도 모든 창밖에서부터 온다 그러므로 모든 창밖은 유효하다


  구름의 한날과 꽃의 비명과 바람의 전갈 같은 문장들은 모든 창밖에서 오고 모든 창밖에서 느닷없는 검은 박쥐들이 날아들기도 한다 그날, 모든 창밖은 안개처럼 사라진 듯했지만 모든 창밖은 순식간에 복구된다 네가 오니까, 그러니까 네가 온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창밖은 유효하다


  물고기는 물고기끼리 사향고향이는 사향고양이끼리 은하는 은하끼리 내통하는


  모든 창밖에서 네가 오고 있다 너는 아주 먼 데서 오고 자욱한 날의 문장에서도 온다 십자가처럼 모든 창밖에서 붉은 물이 넘쳐날 때 너는 위험한 난수표처럼 오고 나뭇잎 위에 걸터앉은 세밀한 빛줄기처럼 오기도 한다


  누군가 밀폐되고 누군가 범람한다


  일억 이천 삼백 년 후에도 모든 창밖은 유효하다 일억 이천 삼백 년 후에도 문을 열면 내 앞에 서 있는 너처럼,




ㅡ계간『시산맥』(2019년 여름호)


--------------

동백 전언

서안나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었다
오후 내내 폭설이었다
집에서 앞 머리카락을 잘랐다
가려두었던 이마의 흉터가 선명했다

어릴 적 담장에 핀 동백을 따다
커다란 돌이 내 이마에 떨어졌다
흰 눈에 떨어진 선혈이
느리게 꽃을 읽어내려갔다
읽을 수 없는 것들이 다 보였다
나는 꽃의 끝이었다

동백을 보면
오줌이 마려웠다
첫 생리를 시작한 날도 동백이 피었다
숲을 더럽히고 싶었다
아플 때마다 꽃이 피었다

동백이 피면
꿈속에서
열 개의 손톱이 다 부러졌다
부러진 손톱에서 진흙 동백이 피었다
가위를 들고 종이 인형을 오리는 습관이 생겼다
빨리 죽는 것들에 대하여 오래 생각했다
인간의 죄는
손에 다모여있다
죄가 묻은 동백은 밤에도 검다

이번 생은
내가 만든 산이라
혼자 넘어야 한다
무릎을 안으면 진흙이 묻어있었다

이제 모든 것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계절
뒤돌아보지 않았다



ㅡ계간『문학의 오늘』(2018년 봄호)



동백꽃

유종


삼동 내내
꾹꾹 눌러 담아 품었던
눈물 글썽한
그리움을 피멍울처럼
저렇게 매달아 놓고
스스로 목을 매다니
독하다

오래 서있지 않겠다
난 그대의 죽음을 표절하지도 않겠다
그저 바라만 보다 가겠다



ㅡ계간『사람의문학』 (2018년 봄호)


-----------------------

나, 동백꽃 보러 간다

송찬호



거긴 혁명가들이 우글우글 하다더군
오천 원짜리 음료수 티켓만 있으면
따뜻한 창가에 앉아
불타는 얼음 궁전을 볼 수 있다더군
거긴 백지만 한 장 있으면
연필 끝에서 연애가 생기고
아직도 시로 빵을 구울 수 있다더군
어느 유명한 사상가의 회고록도
거기도 집필됐다더군
고요한 하오에는 붉은 여우가
소리 없이 정원을 지난다더군
길의 방향은 다르지만, 폭주족들의
인생목표도 결국 거기라더군
그리고 거기는 여전히 아름다운
장례의 풍습이 남아 있다더군
동남풍
바람의 밧줄에
모가지를 걸고는
목숨들이 송두리째
뚝, 뚝 떨어져내린다더군
나, 면회 간다
동백 교도소로



ㅡ시집『붉은 눈 동백』(문지, 2000)


---------------------

동백이 활짝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ㅡ시집『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 2000)


----------------

백련사 동백꽃

이수희


만덕산이 동백불을 밝히고 있다
바람이 덩달아 무릎을 꿇고
햇살도 일어나 기둥으로 서서
붉게 속정을 태우고 있다
백련결사가 잎잎으로 귀를 세운다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이 열기를
세상에 돌아온 꽃부처
봄도 젖어서 눈이 아프다
지난 내 겨울은
동백꽃 단내에 취해 있다





ㅡ시집『민들레 학교』(현대시학사, 2016)


-------------------

동백꽃

송기원



달빛 가득한 거문도의 밤에는
부두 뒷골목 낙원장 색시들만 노래 부르는 게 아니라

이 밤 따라 얄궂게 목소리가 떨리고
가슴을 더듬는 뱃사람 손길도 거칠지 않아

가슴 속에 쌓여 있던 무엇인지
자꾸만 자꾸만 넘쳐난다 싶을 때

달빛 가득한 뒷동산 동백숲에는
기어코 꽃봉오리가 터쳐나는 노래, 노래들



ㅡ시집『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랜덤하우스중앙, 2006)



-------------

동백 울타리

이경림


키가 어른 허리만큼 거두절미된 동백 울타리가 마을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잘린 허리에도 툭툭
피같이 꽃이 피어서는 마을로 들어가고
연둣빛 이파리가 터져서는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러고도 동백은 사이사이에 새들을 키워
어린 새들, 무시로
돌팔매처럼 날아올라 마을로 가기도 합니다
가서는 소식이 없습니다
동백 울타리는 누구든 마을 입구까지만 데려다 줍니다
그 끝에서 길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아아 누군들, 소문처럼
그곳으로 간 꽃들이 작부가 되고
어린 새가 협잡꾼이 되리라 생각이나 할까요
저기, 누군가 또 허리춤에 동백을 데불고 마을로 갑니다
그 속에서 다시 누우런 해가 솟구쳐 올라서는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ㅡ시집『상자들』(랜덤하우스중앙, 2005)



동백

민구


나는 항상 그를 본다 유년의 어느날
따귀 맞은 채 올려다본 교정 한가운데서
유유히 담을 넘던 사내의
멋진 신발을 기억한다

그는 내가 태어난 항구도시 벽면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현상금이 적힌
수배전단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소문대로 민첩했다
제보를 받고 달려가면
무지개 연막을 치고 자갈이 무성한 강을
단숨에 건너 산 너머로 달아났다

증거랍시고
수면에 번진 발자국을 떠내거나
기절한 물방개를 흔들어 깨울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번번이 그를 놓치는 대신
작은 여인의 손에 수갑을 채웠고
밤마다 송진이 흘러내리는
구릿빛 책상도 하나 가졌다
나는 서랍 속 수사일지에
그녀의 사진을 끼워둔다

그녀가 산중턱 어느 절간에서
발아래 펼쳐둔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세던 사내와 잠시
놀아났다는 사실도 잊은 채



ㅡ계간『창작과 비평』(2010, 가을호)


----------------


  동백이라고 했다

 

  고은수

 

  봄 겨드랑이 사이사이, 고개를 내민 사냥꾼이다

  눈인사만 하려 했는데 바싹 안긴다

  금세라도 젖이 흐를 듯한 봉오리,

  설렘까지 탱탱하다

  나도 슬쩍 만져본다

  다 받아주기는 너무 뜨거운 정 아닌가

  얼른 데려가 달라고 하는 듯,

  온몸이 달떠 있잖아

  떨떠름한 나는 소극적이다

  가슴께를 스치는 봄바람이 쓰리다

  뜻밖의 사건 같은 건 기웃거리는 바람에게나

  일어나는 거지

  구름이 두 번 지나가는 동안에도

  절정으로, 탁탁 터지는 옷섶

  속속들이 붉다

  엉거주춤 한 걸음 물러서는 건 나다

  사혈침 맞은 자리가 뜨끔거린다

  괜한 피만 쏟았지

  그래도 사랑은 버리는 게 이니라고,

  시작한 자리를 쓸어안고, 길 끝으로 가는 너를 본다

 

 


 ―계간『시에』(2017년 봄) 


---------------

동백꽃 피는 해우소


김태정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 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 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시집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 2004)


--------------------------------

동백 지는 저녁

 

김정수

 

 

  석양을 건너는 눈물

  태양을 헤아리고 있다

 

  먼 산중의 불빛 하나 강을 건넌다 어느 생에선가 당신은 불이었을까 손

잡을 수 없는 바람이었을까 한바탕 난리를 치다가 바위의 배꼽 위에 소복

소복 올라앉은 꽃잎이었을까 서걱서걱 입안에 머무는

 

  오목한 상처마다 고양이 울음 같은 새싹 키우는

 

  동백 지는 저녁에

  돌아서서 손 흔들지 말라는

  붉디 붉은

  눈동자

 

 

 

- 계간『시와문화』(2015년 가을호)



지심도 동백

 

김승기

 

 

일주일 만 늦게 올 걸
사람들은 투덜댔다


나는 바닥만 보고 다녔다


선착장 근처 한 노파가 짓무른 동백을 한 삼태기 두엄 위에 던졌다
동백들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벼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푸른 바다,
눈 깜짝할 사이 뛰어내렸다
뒤따라오던 수천 송이 붉은 동백이 뒤를 이었다


남해바다가 환했다


낭랑한 경(經) 읽는 소리

 

 


-계간 『리토피아』(2013년 여름호)


-------------

동백열차


송찬호

 

 

지금 여수 오동도는
동백이 만발하는 계절
동백 열차를 타고 꽃구경 가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인 삼월의 신부와 함께


오동도, 그 푸른
동백섬을 사람들은
여수항의 눈동자라 일컫지요
우리 손을 잡고 그 푸른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요


그리고 그 눈부신 꽃그늘 아래서 우리 사랑을 맹세해요
만약 그 사랑이 허튼 맹세라면 사자처럼 용맹한
동백들이 우리의 달콤한 언약을 모두 잡아먹을 거예요
말의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아요 풀무질과 길쌈을 다시 배워요


저 길길이 날뛰던 무쇠 덩어리도 오늘만큼은
화사하게 동백열차로 새로 단장됐답니다
삶이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꿈일지라도
우리 그 환한 백일몽 너머 달려가 봐요 잠시 눈 붙였다
깨어나면 어느덧 먼 남쪽 바다 초승달 항구에 닿을 거예요


 

 

―송찬호 시집『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 2000)


---------------

무인도 동백

 

김진수

 

 

외로워질 것 하얗게

가끔은 푸르게 혼자라야 할 것

추억처럼 제 꽁지를 깨물고

앵돌아지는 배

까마득한 벼랑 날 끝에

이마를 부딪치며 방금

동백꽃 한송이 졋다

 

어디선가

누구라도 한번쯤

외로워질 것

 

한 나절 뭉클 파도 위를 떠돌다

건듯 저물면

갓 젖뗀 섬아기처럼 돌아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모래톱을 뒹굴며

먼 까치놀 한 조각 베어 물고

홀로 철석철석 쏴아아

깊어질 것

 

 

 

-시집『아주 오래된 외출』 (내일을 여는 책,2003)


---------------

동백이 피었다


강회진

 


언제쯤일까
십년도 더 지난 그때
날이 하 좋아
어쩌지 어쩌지 발 구르다가
서둘러 찾아간
선운사 입구 동백나무 아래              
지금은 시인이 되어버린
동백처럼 여리고
동백씨같이 단단한 그녀와
가슴께로 떨어지는 낮달을 안주삼아
낮술을 마셨네                   
      

환한 봄볕 아래
꽃불처럼 피어오르던 얼굴 둘,
그때 동백에 얼굴을 묻고 동박새가 울었던가
안 울었던가
그때 그녀는 동백아가씨를 불렀던가
안 불렀던가
그때 우리는 막차를 타고
무사히 그 풍경을 빠져나왔던가
그예,
동백숲에 붙들렸던가

 


                          
-시집『일요일의 우편배달부』(문학들,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