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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화 -바람의 집/바람 조문/그림자의 집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1. 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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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

이서화


사북*이라는 말, 접힌 것들이 조용히 쉬고 있는 곳
 
접린의 힘을 가진 나비는 날갯짓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 몸을 열어보면 다 풀어진 사북이 들어 있을 것이다.
 
맨 처음 가위는 풀들이 겹치는 모양에서 본을 따왔을 것이고,
가윗날 지나간 옷감은 그래서 펄럭일 줄 안다.
 
쉬이 맞물리지 않는 나무들에게서 헐렁한 가위소리가 난다.
접점의 날이 만나면서 툭툭 떨어지는 호두나무 몫의 바람은 날카롭다.
부챗살이 접혔다 펴질 때마다 더위는 종이로 찢어지고 바람은 모두 사북으로 몰려가 있어 떨어지지 않는다.
 
가을, 들판의 풀은 허리가 겹치면서 늙어간다.
계절에도 키가 있다면 여름에 모두 자랄 것이고 바람을 거둬들이는 즈음을 사북이라 부르면 될 것이다
 
눈 밟는 소리에 몰려가 있는 사북사북
걸어간 발자국은 양날의 흔적이다 흰 전지(全紙) 한 장을 가르며 지나가는 가웟날의 흔적이다.
화선지 모양의 걸음 문양에 한동안
매운 바람소리가 들어 쉴 것이고
따뜻해지면 그 발자국을 싣고 떠날 것이다.
 


* 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의 아랫머리나 가위다리의 교차된 곳에 박아 돌쩌귀처럼 쓰이는 물건을 이르는 말.



ㅡ계간『모:든시』(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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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조문


이서화

 


한적한 국도변에 弔花가 떨어져 있다
내막을 모르는 죽음의 뒤끝처럼
누워있는 화환의 사인은
어느 급정거이거나 기우뚱 기울어진 길의 이유겠지만
국화꽃들은 이미 시들어 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잡풀 속
며칠 누워있었을 화환
삼일동안 조문을 마치고도 아직 싱싱한 꽃송이들
잡풀 속 어딘가에 죽어 있을
야생의 목숨들 위해
스스로 이쯤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까
같이 짓물러가자고 같이 말라가자고 누워있는 화환
보낸 이의 이름도 사라지고
꽃술 같은 근조(謹弔) 글자만 남아 시들어 간다


길섶의 바랭이 강아지풀
기름진 밭에서 밀려난 씨앗들이 누렇게 말라간다
누군가 건드리면 그 틈에 와락 쏟아놓는 눈물처럼
울음이 빠져나간 뒤끝은 늘 건조하다
지금쯤 어느 지병의 망자도 분주했던 며칠의 축제에서
한 숨 돌리고 있을 것 같다


먼지들이 덮여 있는 화환 위로
뒤늦은 풀씨들이 떨어진다
밟으면 바스락거릴 슬픔도 없이 흘러가는 국도변
가끔 망자와 먼 인연이었다는 듯
화환 근처에 뒤늦게 찾아와 우는 바람소리만 들린다

 

 

 
―계간『시산맥』(2012. 겨울)
―일간『박후기의 울림이 있는 시 한 편 119』(용인신문. 2013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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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의 집

 

   이서화 

 

 

    아버지가 지은 집은 뒷산의 협력이 있었고 남향의 묵인이 있었다 날마다 그늘은 집을 돌고 돌았다 마당의 감나무까지도 햇빛의 반대 방향으로 그림자가 고양이처럼 돌아다녔다 함석지붕은 장마의 서식지였고 하늘의 뜨거운 아랫목이었으며 내 운동화가 잘 마르던 즐거운 건조대였다 지금 그 함석지붕엔 노을이 묻어있고 곧 어둠에 허물어질 것이다

 

    집은 그 집 식구의 평수다 한 번 불탄 집의 평수는 다른 곳으로 버려지고 다시 지어 넓힌 그 넓이로 우리는 자라고 점점 멀어졌다 결국, 텅 빈 평수가 될 때까지 집은 사람의 자취로 흥하고 쓸쓸함으로 가득 찬다 식구가 줄어들면서 마당 빨랫줄에 걸쳐져 있던 바지랑대는 일렬로 맺힌 빗방울을 받치고 있다 마루는 말없이 때가 끼고 방문들은 시큰둥해졌으며 감나무는 저 스스로 집안 사정을 감안해 풋감을 서둘러 떨어뜨렸다

 

    아버지는 쓸쓸한 평수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 집을 아버지의 집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 집엔 아버지가 산다 그러나 누구도 이 쓸쓸한 평수를 상속 받으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림자가 구박 받던 형제처럼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있다

 


―계간『미네르바』(2017. 겨울)